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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28화 (28/70)

28화

[……로렌.]

[기뻐해 줘. 우리 아이잖아.]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너무 예상치 못했다. 피임이라면 누구보다 확실하게 했을 텐데. 완벽한 피임은 없다고 해도……. 근데 지금 이 기분은 뭐지.

가슴이 두근두근 울렸다. 처음 느껴보는 형태의 감정이었다. 로레인의 하얀 손 위에 들려 있는 기다란 이것이 그를 울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벅차올랐다.

흔들리는 로레인의 파란 눈동자를 마주 봤다. 걱정 반 기쁨 반인 그녀의 모습에 그는 결국 두 팔을 뻗어 그녀를 품으로 감쌌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로레인에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때, 때리지 마세요. 배고프다고 안 할게요. 흐으윽, 집에 가고 싶다고 안 할게요.’

‘죄송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훔쳐 먹지 않을게요.’

여러 아이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윙윙 울렸다. 다섯 살의 제 목소리도 들렸다. 그보다 더 어린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로레인을 꽉 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작은 여자를 로레인에게서 찾았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는 단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아이.

***

[곧 태동도 느껴지지 않을까?]

[아직 너무 이르지 않나.]

들뜬 로레인의 말에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제이든의 시선 역시 그녀의 볼록한 배로 향했다. 아직 그리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꼬물꼬물 아이가 크고 있는 게 보였다. 누가 봐도 임산부로 보일 법했다.

[먹고 싶은 건 없어?]

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내려 볼록한 배 위에 입 맞췄다.

[건강하게 태어나려면 많이 먹어야지.]

[제이디는 가끔 나보다 우리 아기 걱정을 더 한단 말이야.]

[네가 잘 안 먹어서 그렇잖아.]

그는 피식 웃으며 로레인을 번쩍 안아 제 품으로 데려왔다.

[건강하게 아이 낳은 후에 몸매 관리하면 돼.]

[그렇지만 살찌는 거 싫어. 기본 영양소는 충분히 먹고 있다구.]

이미 그가 잔뜩 사다 놓은 영양제는 줄지 않았다. 잠시 그것에 관한 얘기를 꺼낼까 하다가 그는 속으로 삼켰다. 괜히 잔소리처럼 들려 스트레스 주는 것보단 옆에서 챙겨주는 게 낫겠다는 결론 때문이었다.

[맞다, 내일 초음파 찍는데 뉴욕에 꼭 가야 해?]

로레인이 투덜거리며 그의 품에 코를 묻었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찍고 데려다주고 출발할 거야. 릭한테 부탁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릭한테 말해. 경호원도 더 붙이고 갈게.]

[치……. 그래도 나흘은 너무했어.]

[미안.]

로레인의 부드러운 금발에 그가 입술을 꾹 찍었다. 마음 같아선 안 가거나 로레인도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여건이 안 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일 년 전부터 잡혀 있던 일정이라 조정도 불가했다.

로레인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임신을 안 뒤 제이든은 달라졌다. 로레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다정하게 변했다. 하지만 배가 불러오면 불러올수록 점점 그 애정이 어디로 향하는 건지 뚜렷하게 느껴졌다. 제이든은 아이를 품은 제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에게 더 강한 애정을 느꼈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도 무섭고, 아이가 자라는 것도 두려웠다. 그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기대감에 차오르는데, 로레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턱턱 막혔다. 예쁜 몸매가 망가지는 게 느껴져 행복하지 않았다.

날 사랑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진실하지 않은 그의 대답이 들려올까 무서웠다. 그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기에 내 곁에 있을까.

***

[웃고 있다니까.]

[거짓말.]

초음파 사진을 보며 그가 평소답지 않게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눈코입이 또렷하게 나온 입체 초음파 속의 아이는 주먹을 꼭 말아쥐고 있었다. 아직은 작았지만, 그래도 확실한 형태에 두근거렸다.

입술 끝이 올라간 모양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는 이미 따라 웃으며 아이가 웃고 있다고 단정 지었다. 옆에서 초음파를 힐끗 보던 로레인은 부른 배를 만졌다. 정말 여기에 저 아이가 있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았다.

[아주 예쁠 것 같아.]

그가 씨익 웃으며 초음파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로레인은 신호를 받고 멈춘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봤다. 평소와 달리 제이든이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자, 운전기사 역시 그의 기분에 맞춰 몇 마디 주고받았다.

로레인이 창밖을 보는 사이, 제이든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그제야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한국어인 걸 보니 수연이었다. 곧이어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익숙한 여자 목소리에 로레인은 여전히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시간 잘 맞췄어?

“완벽해요. 지금 막 초음파 사진 찍고 돌아오는 길이거든요.”

그가 아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웬일이야. 아이 태어나기 전에는 꼭 가야지.

늘 미국에 오길 꺼렸던 수연이 이렇게 말할 정도니 제이든 뿐만 아니라 로버트도 새 생명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해?

수연의 들뜬 목소리에 제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시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글쎄요.”

-그런 게 어딨어?

아직 수연은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 차이였다. 이곳은 연인끼리 동거도 흔한 일이었고, 아이가 생겨도 결혼하지 않고 동거인으로 함께 사는 커플도 적지 않았다. 법적인 문제가 걸리면 골치 아프기도 했고.

따로 수연에게 시간을 내 설명해야겠다 싶던 제이든은 순간 시선이 느껴져 로레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 정도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한 로레인이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결혼이란 단어는 들었으리라.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휴대폰을 가리켰다.

[수연. 결혼 언제 할 거냐고 물으시네.]

[아.]

로레인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제이든 역시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마저 통화를 이었다.

사실 아이를 가지면 당연히 그가 결혼하자고 할 줄 알았다. 아이가 없을 때도 이미 로레인의 고집에 반 동거를 하고 있었다. 결국, 달라진 건 없었다. 그의 집에 자신의 짐이 조금 더 늘어난 것을 제외한다면.

“로렌 데려다주고 뉴욕으로 가요. 인터뷰도 있고, 촬영도 잡혀 있어서 이래저래 바쁠 것 같아요.”

-혼자 있으면 서러울 텐데. 배도 많이 나왔을 거 아니야?

걱정스러운 수연의 말에 제이든 역시 힐끗 로레인을 바라봤다. 그가 바빠서 그런지, 아니면 임신 때문에 호르몬 변화가 있어 그런지 로레인도 성격이 변했다. 예민해졌고 웃음도 많이 사라졌다. 내심 그게 걱정됐지만, 또 그와 함께 있을 땐 잘 웃었다.

“일정 끝나면 함께 한국 갈까 봐요. 안정기라 비행기 타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정말? 맛있는 거 많이 준비해야겠다.

“다음 주 중으로 가볼게요.”

-이렇게 갑자기? 나는 너무 좋지.

들뜬 수연과의 통화를 마친 후에 그는 다시 사진을 바라봤다.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너무 예쁘겠지.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럼 최고의 아빠가 되도록 노력해야지.

[로렌. 다음 주에는 함께 한국 갈까?]

그의 말에 로레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눈을 깜빡이며 보는 모습에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수연이 맛있는 걸 잔뜩 해 준다고 하네.]

[정말?]

[응. 그리고 한국에 갔을 때 집도 수리할까 해. 아이 방도 만들고, 이젠 물건도 많이 사야겠어.]

초음파를 보니 확실하게 와 닿았다. 묵직한 책임감과 함께 그는 풍족함을 느꼈다. 그의 말에 로레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좋아! 너무너무 좋아!]

해맑은 미소에 그는 따라 웃었다. 가볍게 시작한 만남이지만, 로레인에게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블루 사파이어로 목걸이를 선물할 거야.]

[블루 사파이어? 왜?]

[예정일이 9월이니까, 탄생석이기도 하지만. 고대에는 하늘이 커다란 사파이어고, 지구가 그 안에 박혀 있다는 낭만적인 믿음이 있었대.]

그의 시선이 로레인의 배로 향했다. 따스함을 품은 시선이었다.

[내 아이는, 분명 내 세상일 테니까.]

로레인은 그런 제이든을 멍하니 바라봤다. 세상…….

아쉬워하는 로레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그는 곧장 뉴욕으로 향했다. 공항까지 다시 차로 이동해 뉴욕까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로레인과의 연애 때부터 시끄럽게 난리가 났지만, 그녀의 임신이 알려진 후 세간은 더 난리였다. 톱스타들의 결혼이라며 벌써 2세에 대한 관심도도 엄청났다.

공항에서의 인파를 뚫고 비행기로 들어온 그는 일등석으로 가 털썩 앉았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대충 벗고 휴대폰을 꺼냈다. 바로 로레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 제이디.]

밝은 목소리로 받는 로레인이었다. 대답하려던 제이든은 순간 수화기 너머가 시끄러운 걸 느끼고 의아했다.

[밖이야?]

-[응, 잠시 친구들이랑 나왔어.]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 그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티 내지 않으며 말했다.

[경호원은 함께 갔겠지?]

-[그럼. 저녁만 있다가 들어올 거야. 비행기 탔어?]

[응. 먹을 거 조심하고, 항상 몸도 조심해.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나든 아버지든 혹은 릭한테라도 연락해야 해.]

-[당연하지. 나 벌써 한국이 기대돼. 수연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잔뜩 연습할 거야.]

들뜬 목소리에 제이든은 걱정은 접어두고 편히 통화했다. 짧은 통화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섯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비행기에서 내렸을 땐, 수십 통의 연락이 쏟아졌다. 그는 곧장 다시 LA행 비행기로 올랐다. 다급한 에릭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제이든, 놀라지 말고 들어.’

내용을 떠올리던 그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로렌이 사산했어.’

기절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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