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아, 안녕하세요.]
여태 생각했던 건 전부 날렸다. 새하얗게 바랜 머리는 그의 모습으로 꽉 찼다. 바보같이 인사를 한 후에야 로레인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리키한테 들었어요. 아, 제가 먼저 말을 했지만, 오늘은……!]
생긴 거랑 다르게 당황하는 모습에 제이든은 무미건조하게 피식 웃었다. 아무 의도 없이 하루 재워달라던 작은 여자가 생각났다. 당황하는 게 좀 닮긴 했나.
[로레인 왓슨이라 했나.]
그의 말에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붉어진 뺨을 비롯해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 움츠린 어깨에 앙다문 입술. 늘 그를 보던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반가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온다고 알리지도 않았고 너무 조용히 온 터라 아직 그를 알아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실 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놀까 싶었는데, 막상 오니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다.
제이든의 시선이 로레인에게 짧게 머무르고 관심 없다는 듯 돌아갔다. 순간 쿵, 하며 심장이 떨어지는 걸 느낀 로레인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로렌이라고 불러요. 제이디라고 불러도 되나요?]
[마음대로.]
쿵쿵쿵쿵. 매일 스크린에서나 봤던 그와 실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토록 떨릴 줄 몰랐다. 에릭에게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는데. 남자 앞에서 이렇게 당황한 것도 처음이었다.
로레인은 조용히 심호흡하며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슬쩍 시선을 내리자 파티를 즐기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여긴 동떨어진 것만 같았다. 오직 그와 단 둘뿐인 것처럼.
[저…… 많이 알고 있어요. 이번에 영화도 봤나요? 케이티 역할을 했는데.]
[아아. 잘했더군.]
꽤 실력 있었다. 시트콤으로 시작한 연기치고는 더 성장 가능성이 있는 연기였다. 운과 인맥이 함께 받쳐준다면 앞으로 주연은 어렵지 않게 따낼 수 있을 배우였다.
그의 칭찬에 로레인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의 연기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그에게 받는 연기 칭찬은 더 감격스러웠다. 로레인은 힐끗 그를 보며 말했다.
[장면이 참 좋았어요. 모든 걸 각오하고 호수에 빠지는 장면은 연기한 저도 가장 기억에 남는걸요.]
[케이티는 강단 있는 인물이지. 운이 더 좋았다면 아마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을 인물이었어.]
[하지만 정이 너무 많았어요. 외삼촌을 끝내 버리지 못했으니까요.]
진지하게 분석한 듯한 말에 제이든의 시선이 다시 로레인에게 향했다. 여전히 절 보고 있었는지 푸른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픽 웃었다.
[맞아. 케이티가 주인공일 수 없는 이유기도 해.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인물이지. 사실 영상화 될 땐 성격을 바꿀까 고민도 했어. 연기로 케이티를 완전히 녹여낼 수 있는 비슷한 인물의 배우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단조로운 어투에도 로레인은 잔뜩 들떴다. 인물 분석만 몇 개월을 걸쳐서 했는지 몰랐다. 너무 힘들어 울 때도 많았고, 감정을 따라가다 지칠 때도 많았다. 근데 그 모든 고난이 그의 한 마디에 눈 녹듯 사라졌다.
[다음에 함께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로레인의 말에 제이든은 피식 웃으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들고 있던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
***
2년 후.
[제이디!]
와락-
차에서 내린 그의 품으로 쏜살같이 달려온 작은 체구가 안겼다. 반동으로 혹여나 넘어질까 제이든은 단단한 팔로 제게 안겨 온 몸을 휙 들어 끌어안았다. 동시에 입술이 얼굴 이곳저곳으로 퍼부어졌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일주일은 너무 길었어.]
[수연과 함께하는 건 어쩔 수 없어.]
[응, 그래서 다음에는 나도 함께 한국 가려고.]
배시시 웃는 로레인의 모습에 제이든은 픽 웃었다. 재회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로레인을 내려두자, 자석처럼 그의 옆구리에 딱 붙는 그녀였다.
1년을 넘게 그의 옆을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단칼에 거절했으나, 로레인은 지치지도 않고 구애했다. 세간이 알 정도로 로레인은 대놓고 그에게 마음을 표현했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받아준 지 반년이 채 안 됐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수연을 보러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제이든이었다. 함께 가자고 몇 달 전부터 졸랐지만, 제이든은 그녀를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다. 잠깐 미국에 왔던 수연과 자주 보는 로버트를 본 적은 있었다. 직접 소개할 생각 없이 의도치 않게 보게 된 거지만.
[제이디, 나 다음 주에 런던 가잖아. 같이 가자!]
고급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로레인이 쫑알쫑알 떠들었다.
[촬영 마치고 며칠 놀다 오자. 수연은 언제 온대? 너무 보고 싶어. 나 한국말도 열심히 연습 중이야. 하지만 아직 제이디나 밥을 따라갈 정도로는 힘들어.]
“그래?”
[어? 그거 맞는다는 말이지!]
활짝 웃으며 떨어지지 않는 로레인에 결국 제이든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자연스럽게 안긴 로레인이 미소 지으며 그에게 입술을 내밀려던 찰나, 엉덩이에 푹신한 소파가 느껴졌다. 동시에 그가 로레인을 품에서 놓았다.
응? 의아함에 그를 올려다보자, 제이든은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할 게 많아. 씻고 남은 작업해야 하거든. 다음 주 런던은 힘들 것 같아.]
[그렇지만 우리 일주일 만에 봤는데…….]
로레인이 강아지처럼 그를 올려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잠시 그런 로레인을 보던 그는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엉켜 오는 얇은 두 팔을 자연스럽게 잡아 내리며 짧게 머물렀던 입술도 뗐다.
[그리고 로렌. 수연은 영어가 서툴러. 전화해서 영어로 말하면 대부분 알아듣지 못해.]
[하지만 통화가 하고 싶은 걸……. 수연과 친해지고 싶어.]
수연이 제이든과 로버트가 있는 미국으로 오는 건 몇 년에 한 번이었다. 기본적으로 적응하지 못했던 시기가 기억에 강하게 박혀 있어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런 수연에게 로레인이 영어로 자꾸 전화하니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번역기도 써!]
로레인이 강하게 어필했지만, 제이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연이 불편한 건 하지 않는 게 맞아. 내가 있을 때 하면 도와줄게.]
[하지만…….]
제이디는 늘 바쁘잖아. 뒷말을 삼킨 로레인이 입술을 꾹 다물며 쳐다보기만 했다. 제이든은 그런 로레인을 한 번 바라보고는 자세를 바로 해 샤워실로 향했다.
곧장 솨아아,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홀로 소파에 우뚝 앉았던 로레인은 두 다리를 끌어모아 안았다. 일주일 동안 난 보고 싶어 애가 탔는데. 그 없는 침대에 홀로 누워 그리움에 잠도 설쳤는데.
알고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제이든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줬다는 거. 그럼에도 자신 있었기에 대놓고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사랑에 빠트릴 강한 자신감으로.
[……이건 아니야.]
로레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저 가벼운 관계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에 대해 자신이 아는 건,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가 억만장자로 유명한 사업가 로버트 에반스의 외동아들이라는 것도 로레인은 그와 사귀면서 기사가 터져 알았다.
뭔가가 필요했다. 그를 확실히 붙잡아 둘 무언가가.
***
[로렌?]
아까 전까지만 해도 거실에서 TV 보겠다며 떠들던 로레인이 안 보였다. 오늘치 원고를 끝낸 제이든은 너무 조용함에 의아했다. 집에 갔나. 말도 없이 갔을 리도 없고, 그가 집에 있는데 제집에 돌아가서 혼자 잘 로레인도 아니었다.
두 달 전부터 런던에 가자, 한국에 가자고 졸랐던 로레인이 요즘 잠잠했다. 한 번은 한국을 제외한 어딘가로 데려갈 생각이긴 했다. 그보다 그와 사귀면서 활동이 줄어들어 걱정됐다. 전보다 인기도 많았고, 로레인의 목표였던 그와 함께 영화를 찍는 것도 성공해 톱스타 계열에 앉은 지는 꽤 됐지만.
[로렌.]
거실로 나가 그녀를 불렀으나 조용하기만 했다. 넓은 집을 돌아다니다 문이 닫힌 화장실 앞에 섰다. 불이 켜져 있었다.
[화장실에 있어?]
그의 명성을 등에 업고 더 유명해진 로레인이니, 사실 그녀가 더 열심히 살 줄 알았다. 연기에 대한 열망도 있었고. 그러나 요즘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뿐이었다. 결국, 이런 가벼운 관계가 그녀를 망친다면, 그는 미련 없이 헤어질 생각이었다. 늘 그랬듯이.
대답 없는 화장실을 보며 그는 똑똑 노크했다. 그러자 달칵, 하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있었으면서 왜 대답이 없었어.]
[제이디.]
화장실에서 나온 로렌의 표정이 이상했다. 들뜬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겁을 먹은 듯 위축돼 있었다. 딱 봐도 그의 눈치를 살피듯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파란 눈동자에 그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어디 아파?]
[제이디, 그게 있잖아…….]
꿀꺽. 그에게 들릴 정도로 로레인의 침 삼키는 소리가 컸다. 의아함에 그는 따로 대답 없이 로레인을 내려다봤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로레인은 아까부터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플라스틱의 기다란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시선을 내려 그것을 바라봤다. 기다란 막대 중앙에는 빨간 두 줄이 선명했다. 그리고 제이든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 임신했어.]
[…….]
[나 제이디 아이를 가졌어.]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빨간 두 줄에 고정돼 떨어지지 않았다. 로레인이 임신을 했다. 내 아이를, 내 아이가.
나의 아이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