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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26화 (26/70)

26화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헤이, 제이디!]

주인 허락도 없이 대뜸 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은 목소리가 마냥 들떠 있었다.

[릭.]

차분한 방 주인은 짙은 녹색 눈동자만 살짝 돌려 불청객을 바라봤다. 까칠한 시선에도 마냥 좋아 미소를 짓는 에릭은 질 좋은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았다. 널찍한 어깨를 떡 벌려 등받이에 양팔을 걸친 에릭은 고개를 돌려 잔뜩 인상을 쓴 제이든을 바라봤다.

집필 중이었던 건지 높은 콧대에 걸쳐진 안경이 살짝 내려가 있었다. 그는 깔끔한 행동으로 얼굴에서 안경을 벗어버렸다.

[워후, 화보가 따로 없네.]

에릭이 킬킬거리면서 보자, 제이든은 위아래로 눈을 흘기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작업하긴 글렀군. 대충 상체를 세워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또 무슨 쓸데없는 용건으로 내 시간을 빼앗으려고 온 거지.]

[가여운 내 친구 제이든. 끝내 오늘 파티에 안 올 거야? 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다고!]

에릭은 검지를 휙 위로 올렸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였다.

[옷은 걱정하지 마. 내가 네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한테 연락해서 다 준비해 놨어.]

[제니는 바빠. 괜히 괴롭히지 마.]

[오히려 좋다고 사이즈 추천해 주던걸?]

[망할 제니퍼.]

생각만 해도 그녀가 얼마나 들떠서 보냈을지 상상이 갔다. 싹 다 갈아엎을 수도 없고. 제이든은 한숨을 푹 내쉬며 삐딱한 시선으로 에릭을 바라봤다.

화려한 금발에 걸맞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는 늘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세간을 들쑤셨다. 포브스 선정 올해의 가장 섹시한 보디를 가지고 있는 남자 1위랬나. 틀린 말은 아닌 듯 대충 앉은 몸 자체도 화려해 다른 이라면 눈을 못 뗐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제이든의 날 선 시선에도 에릭은 싱글벙글했다. 제이든은 한동안 정신 나간 짓 하더니 요즘은 또 책상에만 붙어 있었다.

[근데 그 신데렐라 찾기는 포기했어?]

에릭은 무심결 술 먹고 했던 얘기를 아직도 기억하며 종종 말했다. 제이든은 의자를 반쯤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냥 사라져 버린 그 여자를 찾기 위해 공항에 갔을 땐 난리가 났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공항 전체에 플래시가 터졌다. 그 후로도 부단히 노력했다. 남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했지만.

국적이나 이름이라도 정확히 알았다면 찾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을 텐데. 그보다도 인사도 없이 홀랑 사라져버린 여자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인사도 없이 떠날 정도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을 텐데, 내가.

[1년도 더 된 일이야.]

제이든은 다시 시선을 바로 했다. 요즘도 종종 생각나긴 했지만, 처음 몇 개월처럼은 아니었다. 솔직히 찾을 줄 알았는데 못 찾아서 더 미련이 남나 싶기도 하고.

[그래, 잘 생각했어. 그건 다 잊고 오늘 파티에 와. 끝내주는 미인이 있다고, 너도 놀랄걸?]

[내가?]

제이든이 코웃음 쳤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한 태도에 에릭은 금방 수긍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웬만한 여자들이 다 너한테 빠지긴 했지.]

제이든만 보면 환장했던 여자들을 이미 어릴 때부터 봐 왔기에 에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포브스 선정 섹시한 보디가 자신이라면, 가장 잘생긴을 포함해 여러 수식어로 1위를 한 남자가 제이든 리 에반스였다.

제이든과는 촬영장에서 처음 만났다. 데뷔로 치면 아역부터 한 자신이 더 빨랐으나, 그는 순식간에 정상을 치고 올라갔다. 지금이야 동등한 위치의 배우로 둘 다 주목받지만, 제이든의 경우는 더 특별했다.

십 대부터 잘 나갔던 소설가로 유명세를 치른 그는, 제 소설이 영화화 되며 주인공으로 촬영에 참여했다. 그게 그의 첫 데뷔이자, 주인공 친구로 캐스팅된 에릭에게서도 가장 흥행한 영화 중 하나였다.

배운 적 없음에도 탁월한 연기와, 탄탄한 시나리오로 우뚝 정상을 차지했던 제이든은 배우 생활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릭처럼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진 않았다. 배우 생활 내내 꾸준한 집필로 소설가로서도 굳건했다.

[사실 다들 네 인터뷰 따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근황도 궁금해하고.]

이십 대 중반을 넘어서며 거의 스크린에 나오지 않았다. 고작 해 봐야 2, 3년이지만, 인터뷰를 포함해 연예 생활을 중단하다시피 집필에만 몰두했다.

[내 근황을 왜 알려줘야 하지?]

[그래! 알겠어. 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오늘 파티에만 가. 약속한 게 있단 말이야.]

또 무슨 짓을 벌였길래. 제이든이 인상을 쓰며 보자, 에릭은 휙 자세를 바꿨다. 키도 그와 비슷하게 큰 주제에 몸짓은 또 날렵했다.

[로레인 왓슨, 알지?]

[몰라.]

당연한 대답에 에릭은 기죽지 않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거야 이제 알면 되고. 사람은 늘 알아가고 맺는 사회적인 동물이잖아?]

[쓸데없는…….]

[오케이, 오케이. 왓슨은 이번 네 최신작에 조연으로 나왔던 배우야. 아주 좋은 성적을 냈고. 물론 내가 주인공이니까 작품 자체가 좋았겠지만.]

초가 지날 때마다 없던 흥미도 사라지는 제이든이었다. 에릭은 빠르게 말했다.

[케이티 역할 했잖아. 네가 잘 살릴 수 있을지 걱정했던.]

아. 그제야 기억난 듯 제이든의 한쪽 눈썹이 반응했다. 에릭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그를 휙 가리켰다.

[바로 그거야. 이제 넌 로레인 왓슨을 알게 된 거야. 바로 파티에 가면 돼. 왓슨이 널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거든. 솔직히 내가 봐도 왓슨은 매우 아름답거든. 특히 나와 같은 파란 눈동자가 말이야.]

[별 소득 없는 대화였어, 나가는 문은 저쪽이야.]

꼼짝도 안 하는 말에 에릭이 결국 벌떡 일어나 책상 가까이 향했다.

[연애할 때도 되지 않았어? 무려 1년을 넘게 연애를 쉬었다고, 너!]

[릭. 끌려 나가고 싶다면 말리지 않아.]

젠장, 안 통하네. 에릭은 슬쩍 제이든의 눈치를 보며 책상 끝에 살포시 걸터앉았다. 성격상 그는 진짜 가차 없이 쫓아낼 남자인 걸 알아서였다.

[이봐, 친구. 밝고 귀엽다고, 왓슨은.]

[진짜 밝고 귀여운 여자를 알아.]

날 차가운 침대에 홀로 버리고 가버렸지만 말이야. 젠장, 생각하니까 또 속이 뒤집혔다. 제이든의 인상에 에릭은 기회다 싶어 다시 말을 꺼냈다.

[그 신데렐라를 말하는 거지? 내가 장담할게. 실제로 왓슨을 보는 순간, 넌 신데렐라를 잊을 거야. 정말로.]

제이든은 피식 웃었다. 그건 노골적인 조소였다. 단 하루아침에 퍼주고 퍼준 여자였다. 앞으로 다신 만나지 못할 걸 알았지만, 그 여자보다 더 저를 자극할 여자가 없다는 것쯤은 안다. 결코.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듯한 에릭의 불타오르는 의지에 제이든은 깊은 한숨만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완성하기 직전의 원고로 향했다.

여잔 모르겠고, 조금 머리나 식힐까.

***

[에릭 나이틀리.]

[오, 왓슨. 섭섭하게 그렇게 부르기야?]

에릭은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도 저를 부른 여자를 바라봤다. 허리까지 오는 금발 머리에 저와 같은 푸른 눈을 가진 여자. 풍성한 머리카락은 반쯤 벗고 있는 여자의 육감적인 몸을 감쌌다. 진한 화장이 먹힐 정도로 짙은 이목구비의 여자는 에릭 옆으로 와 눈을 바쁘게 굴렸다.

위에서 아래로 로레인을 내려다보던 에릭은 피식 웃었다. 풍성한 속눈썹이 걱정스럽게 움직일 때마다 톡 건드려 보고 싶었다. 에릭은 차분하게 로레인의 어깨에 팔을 걸쳐 어느 한쪽으로 돌아보게 했다.

[저 계단을 올라가면 있어.]

[정말로?!]

[하지만 제이디가 기분이 썩 좋지 않아. 알다시피 말이야, 성격이 좋은 녀석은 아니거든. 작가는 늘 까칠하지.]

[그건 편견이죠, 리키.]

[이제야 날 다정하게 불러주는군. 로렌.]

[에블린 번호는 문자로 남겨둘게요.]

[제이디에겐 비밀로 해줘. 벌써부터 욕 들을 생각에 귀가 따갑거든.]

로레인은 생긋 웃고선 곧장 계단을 올랐다. 올라가면서도 몇몇 익숙한 셀럽이 그녀에게 말을 건네거나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이미 부푼 꿈을 안고 있는 로레인에게는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2층은 1층보단 비교적 소리가 덜 들렸다. 인파가 대부분 아래에 있기도 했지만, 정확한 건 파티 참석한 이들이 제이든이 온 걸 아직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그 전에 그 옆자리는 내가 차지해야 한다고.

아슬아슬할 정도로 높은 힐이 또각또각 소리 냈다. 아찔한 길이의 스커트가 걸을 때마다 타이트하게 엉덩이를 감쌌다. 몸매에 한껏 자신 있는 로레인은 단번에 제이든을 찾아냈다.

언제나 그렇듯 반쯤 깐 고동색 머리카락과 제이든의 대표적인 녹색 눈동자는 심장을 내려앉게 할 정도로 설레게 했다. 그는 와인 잔을 든 채 생각에 잠긴 듯 1층을 내려다보았다.

그보다 2살 어린 로레인은 처음 그가 작품에 나왔을 때 한눈에 반해버렸다. 이건 그냥 연예인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남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과는 달랐다. 뜨거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는 걸 느꼈으니까. 그건 누가 뭐래도 사랑이었다.

당당하게 옆에 서서 인사해야지. 나는 옆선이 예쁘니까 턱을 조금 치켜들어야겠다. 긴 머리로 가슴이 가려지면 안 되니까 오른쪽은 뒤로 넘기고, 웃을 땐 눈만 살짝 웃어야지.

완벽한 시뮬레이션이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워진 거리에 늘씬한 다리를 쭉 뻗어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무표정하게 아래를 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로레인에게 향했다.

“…….”

쿵쾅쿵쾅. 허공에서 마주친 녹색 눈동자에 로레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완벽한 시뮬레이션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르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Hi.”

무미건조하고 낮은 그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음악을 뚫고 들어왔다. 로레인은 그대로 숨을 들이켜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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