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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24화 (24/70)

24화

대체 언제까지 저럴 건지. 책장 밑쪽을 정리하던 이라가 휙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황당해 입을 벌렸다. 이라가 벌떡 일어났다.

“대체 며칠째예요? 혹시 나 감시해요? 잘하나, 못하나?”

황당해도 너무 황당했다. 여덟 시에 대뜸 카페로 오던 제이든은 오후가 돼 이라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첫날만 그런 거라면 또 몰라. 오늘까지 나흘째였다.

솔직한 심정으론 그를 보면 기분은 좋았다. 저 잘생긴 얼굴 보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하지만 그걸 떠나서 부담스럽다고.

이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뭔갈 하긴 하는 건지 문득 보면 바빠 보이면서도, 가끔은 시선이 곧장 마주치기도 했다. 아니, 거의 마주치는 횟수가 더 많았다.

“여기가 내 서재인 건 잊지 않았지.”

“알죠. 하지만 카페는 당신 구역이 아니잖아요.”

성큼성큼 걸어가 책상 앞에 딱 섰다. 그는 그런 이라가 흥미로운 듯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댔다. 씩 웃는 모습에 이라는 괜히 일부러 더 표정을 앙칼지게 지었다.

그를 자주 볼 수 있는 건 좋았다. 순전히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기쁨뿐이었다. 꼭…… 그렇지만 않더라도 어쨌거나!

“대체 당신 뭐 하는……!”

뭘 그리 바쁘게 하면서도 근처에 있나 싶어서 모니터를 휙 바라봤다. 하지만 온통 죄다 영어였다. 텍스트 전부가 영어로 빼곡하게 차 있는 화면에 휙 시선을 뗐다. 젠장. 하나도 못 읽겠어.

“궁금하면 읽어줄까?”

“됐거든요.”

큭큭 웃는 그는 그럼 말고, 라며 노트북을 대충 덮었다. 가까이 온 이라를 웃는 얼굴로 빤히 봤다.

“책 정리를 꽤 잘했던데.”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고, 비닐 뜯는 게 전부인…….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사장님 말씀으론 원래 카페 잘 안 갔다면서요.”

모든 걸 다 떠나서, 그가 자꾸 주변에 보이니까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어릴 때 반한 거라고 지금도 그가 잘생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현실은 현실이지만, 아무 의도 없는 그의 행동에 흔들리는 자신이 자꾸만 위축됐다.

오해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에 다른 감정이 있을 거라 멋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게 쓰린 마음을 달랬다.

“내가 가서 요즘 장사 잘된다던데?”

그것도 부정하진 못한다. 진짜 며칠 그가 꼬박꼬박 와 오전에 손님이 늘었다. 그것도 매장 취식하는 여성 손님들이. 덕분에 바빠진 건 이라 하나였지만.

괜히 그에게 따질 말이 없었다. 당신 보면 내가 떨려서 집중을 못 하니까 오지 말라고? 오해하고 바보처럼 굴까 봐 오지 말라고? 벌써부터 황당하고 어이없어하는 그가 보였다. 정말 그는 제 일을 하고 있을 뿐일 텐데.

“그……!”

“주말에 뭐 해?”

대충 얼버무릴 말을 찾는데 그가 대뜸 물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상체를 바르게 세운 그가 긴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쳤다.

“식사 남았잖아.”

“네?”

무슨 식사? 잠시 생각하던 이라는 곧장 떠올렸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가요?”

“응.”

‘출국 전에 한 번 더 함께 밥 먹어. 그땐 당신이 사줘.’

태연한 그의 대답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간다고……. 그러면 이제 이렇게 보는 건 끝인 건가. 물론 수연과의 연이 생겼으니 십 년 전처럼 완전히 끊기진 않겠지만. 이젠 번호도 있고……. 근데 왜 이렇게 마음이 이상하지.

잠시 책상 앞에 굳은 듯 멈췄던 이라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남았죠. 보답.”

“그래, 남았지. 은우도 볼 수 있나, 가기 전에 인사하고 싶은데.”

“아.”

이라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일요일에 보긴 하는데…….”

그는 차분히 뒷말을 기다렸다. 괜히 그의 시선을 피해 말했다.

“은우 아빠랑 보는 날이어서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제이든 앞에서 지강의 이야기를 하려니까 낯설었다. 이미 알 거 다 아는데도 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아이 아빠 얘기에 그의 머릿속에선 며칠 전 붉게 부어오른 이라의 뺨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굳이 다시 말을 꺼내거나 묻진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 그럼 토요일에 볼까.”

“그래요. 토요일에.”

마음이 묵직하게 불편했다. 이 감정의 시작이 무엇인지 알아서 이라는 애써 괜찮은 척 미소 지었다.

***

“윽!”

화끈한 감각에 확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손등을 바라봤지만 이미 뜨거운 물에 데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머, 괜찮으세요?”

픽업 대 앞에서 커피를 기다리던 손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라는 서둘러 괜찮다고 말한 후 흐르는 찬물로 대충 씻어내고 밀린 주문을 받았다.

어제부터 영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요 며칠 계속 봤던 그를 이제 못 본다고 생각해서일까. 오늘따라 실수가 잦았다. 바쁜 와중에 시선은 계속 구석 창가로 향했다. 하필이면 오늘은 왜 또 안 와서.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출근 시간에 확 몰렸던 마지막 주문까지 해치웠다. 바글바글했던 손님들이 훅 빠져나가자, 정신까지 탈탈 털린 기분이었다. 쌓인 설거지를 해치우고, 더러워진 바를 닦고 물건을 채우고 정리했다.

오늘은 조금 더 오래 카페를 일하고 서재 청소하러 가도 됐다. 웬만한 건 어제 다 마무리했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청소만 가볍게 하면 끝날 것 같았다. 시간도 많이 들지 않을 것 같고.

딸랑-

어질러진 건 거의 다 치웠을 무렵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습관적으로 인사하며 뒤를 돌았다.

“어서 오세…….”

“오늘은 한산하네.”

제이든이었다. 그는 카페를 둘러보며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카운터 앞에 섰다. 이라는 잠시 멈칫했으나, 평소대로 돌아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오늘도 투 샷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죠?”

어차피 매일 찾는 거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익숙하게 샷을 내리러 몸을 돌리는데, 늘 자리로 갔던 그가 성큼성큼 바 안으로 들어왔다.

탁. 뭐라 할 새도 없이 그에게 손을 붙잡혔다. 놀라 그를 올려다보자, 그답지 않게 꽤 인상을 쓴 모습이었다.

“다쳤어?”

“아, 정신없어서요. 많이 데인 것도 아니고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내버려 두면 가라앉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듯 깊은 아이홀이 구겨진 인상 덕분에 더 깊어졌다.

“치료는 해야지.”

“알았어요. 퇴근하고…….”

손을 빼려고 했으나, 그는 강하게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은우만 덜렁댈 줄 알았는데, 아이와 다를 게 없군.”

“그게 아니라, 나는 일하다가…….”

이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가게 밖으로 성큼성큼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얼떨결에 끌려 나온 이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디 가요?!”

“병원.”

“지금 이거로 간다는 거예요? 자, 잠깐만요! 잠깐만, 제이든!”

황급히 제이든을 불러세웠다. 뭐가 대수라고 조금 데인 거 가지고 병원을 간다고!

“봐요, 병원 갈 정도 전혀 아니거든요?”

이라가 휙 손을 들어 그의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잠시 손등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이라를 바라봤다.

“이라. 자신의 몸에 생기는 상처를 별거 아니라 치부하지 마.”

멈칫했다. 그녀가 다친 게 짜증 난다는 듯 표정을 구기고 있는 그가 이상해서. 걱정하는 건가. 겨우 이 정도로 왜?

이라가 그대로 손을 비틀어 빼냈다. 아까와 달리 그는 손쉽게 손을 놓아줬다.

“아무리 어머님 가게라고 해도 난 일하는 입장이잖아요. 무턱대고 나오면 곤란해요.”

“굳이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어.”

그렇겠지. 수연이 심심해해 차려준 카페니까. 매출도 신경 안 쓰니까 망할 걱정도 없고.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곳에, 가장 좋은 자리임에도. 문득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를 만날 때마다 간과한 적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온몸으로 느끼고 닿을 때면, 그의 세계가 나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 알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뜨겁게 뛰었던 심장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도요.”

차분하게 미소 지은 이라는 허공에서 그와 한 번 눈을 마주쳤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에도 이라는 몸을 돌려 다시 카페로 들어갔다.

일부러 뒤돌지 않았다. 그가 그냥 갔으면 해서. 자꾸 이런 식으로 그가 다정하게 굴고, 걱정해 주고, 신경 써 주니까.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아서. 거지 같은 현실을 잊게 해서.

“……추해, 나.”

입술을 꽉 깨물었다. 괜히 닦았던 곳을 마른행주로 닦고 또 닦았다. 내일이면 그만 볼 사람이잖아. 복직하면 카페도 그만둘 거고. 십 년 전처럼 그렇게 또 힘들어할 시간도 기력도 정성도 애정도 없어. 없어야만 한다고.

“하아.”

딸랑-

한숨에 기운이 쭉 빠지는데, 다시 문 열리는 소리에 뒤돌았다. 자동으로 나오는 어서 오세요, 를 뱉기도 전에 입을 꾹 다물었다.

문을 열고 성큼성큼 바 안으로 들어오는 그는 녹색 눈동자로 여전히 다정한 시선을 던졌다. 조금 굳어진 표정에 꾹 다문 입술로 그가 이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차가운 느낌에 시선을 내려 보자, 약국에 다녀온 건지 화상 연고를 바르는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쿵쿵. 곤두박질치는 심장에 이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 완전히 홀렸어. 이 남자한테 완전히 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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