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드디어 얼굴 보네.”
“미안해요.”
이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앞에 자리한 윤진은 황당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페 일은 잘되고?”
“진짜 꿀이에요. 사장님도 너무 친절하시고…….”
그도 있고. 뒷말을 삼키며 그냥 웃어넘겼다. 주말이라 윤진을 만났다. 그녀의 직업상 주말이 보장되진 않으나, 오늘 꼭 만나자는 말에 알겠다며 나왔다. 주말도 일을 구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근데 왜 그렇게 급하게 보자고 했어요? 오늘 촬영 없어요?”
“끝났고, 어떻게 시간이 났다. 술 괜찮지?”
“네, 뭐.”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오랜만에 낮술이었다. 점심에 만나자길래 식사할 줄 알았는데 윤진은 바로 회사 근처 술집으로 불렀다. 알탕과 소주가 나와 테이블을 채웠다. 보글보글 끓는 탕을 보며 문득 제이든이 생각났다. 그는 이런 걸 먹어봤을까. 어제 보니 갈비 같은 건 먹던데.
“왜 실실 웃어?”
“네?”
놀라 입가를 매만졌다. 진짜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그 녹색 눈동자가 문제다.
“내가 언제요.”
“참나, 웃었구만. 좋은 일 있어?”
알탕을 국자로 뒤적거리다 소주 뚜껑을 딴 윤진은 힐끗 이라를 바라봤다. 엄청 힘들어하거나, 우울 모드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이라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혹시 남자 생겼어?”
“무, 무슨 소리예요.”
“그런 반응 하면 내가 당황스럽지. 진짜 같잖아.”
허, 남자는 무슨. 이라는 고개를 저으며 소주잔을 들어 대충 잔을 부딪쳐 입으로 털어 넣었다. 쓴 소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따듯한 알탕 국물을 맛보는데, 술은 안 마시고 빤히 보는 노골적인 윤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왜, 왜요.”
윤진은 잠시 흐음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할 말이 있는 듯하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넘기는 모습이었다.
“뭐 알겠고, 보자고 한 이유는 말이야.”
빈 이라의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말했다.
“너랑 배소라 동영상, 찾은 것 같아.”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들던 이라의 손이 우뚝 멈췄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윤진은 무언가 복잡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귀할 수 있다, 이라야.”
“무슨, 어떻게요? 그때 전 스태프 다 영상 촬영 없다고…….”
“멀리서 찍긴 했는데, 일용직 막내 스태프가 찍었다더라. 혼날까 봐 말 안 하고 있었대. 내가 걔 찾느라 죽는 줄 알았어.”
“선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윤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반응 충분히 이해했다. 정직에 결국 해고에. 몇 개월을 고생했는데.
“미녀 스타 한이라 PD. 아주 잠깐이긴 했어도 너 그 타이틀로 반짝 유명했잖아. 차라리 그때 널 드라마로 데려오는 거였는데. 괜히 예능 가게 해서.”
윤진은 씁쓸한 얼굴로 술을 휙 들이켰다. 이라가 아주 잠깐 유명했었다. 예능 촬영에 여자 출연진과 함께 얼굴이 잠깐 나온 적이 있는데, 예쁜 얼굴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여배우보다 예쁜 막내 PD라며 이라의 영상이 순식간에 조회수 100만을 찍었다.
그때 시청률 좀 뽑겠다며 한동안 의도적으로 이라를 출연시켰고, 그때 일이 터졌다.
“배소라가 너 엿 먹이려고 다 식은 커피 붓고 화상 입은 척한 거잖아. 진단서도 위조고. 욕이란 욕은 네가 다 먹고, 회사 압박에 합의금 물어주고. 정직에 해고에.”
당시 배소라 SNS에 이라의 실명을 거론하며 여론몰이가 될 법한 글이 올라왔다. 붕대를 감아 화상을 입은 손 사진을 올린 후, 이라가 고의로 부었다며 악의적인 거짓말을 꾸며냈다.
“내가 걔 속내를 모르겠냐? 거기 스태프 다 알았어. 너 얼굴 예쁘고 주목받으니까, 자기랑 같이 나오는 게 꼴사나웠겠지. 자꾸 자기랑 비교해서 예쁘다고 하니까.”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속이 터졌다. 힘없는 이라는 억울하다고 했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배소라를 감쌌고, 정확한 증거도 없었다. 애매한 각도로 이라가 커피를 쏟을 뻔한 건 맞지만, 결국 식은 커피를 제 손에 쏟아부은 건 배소라였다.
윤진의 말을 멍하니 들었다. 당시 억울했던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잠도 못 잘 정도로 억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혼과 동시에 은우도 빼앗겼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술잔을 잡았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느새 벌겋게 눈가가 달아올랐다. 억지로 눈물을 참기 위해 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 거칠게 심호흡했다.
“선배, 나 진짜 속이 답답해요.”
“알지. 하아, 내가 어떻게 모르냐.”
벌게진 눈으로 술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꿀꺽 삼키니 쓴맛과 향이 입안 전체를 맴돌았다. 당시 이라를 향해 달렸던 폭력적인 댓글과 동료 직원들의 시선, 배소라 팬들의 테러까지 모든 게 생생하게 떠올랐다.
윤진은 손을 뻗어 이라의 손을 감쌌다. 천천히 토닥이던 윤진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꼭 영상 찾아서 제대로 터트려줄게. 배소라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어차피 사과문 올리고 조금 자숙하면 될 일이잖아요. 걔가 잘리길 하겠어요, 망하길 하겠어요.”
“그래도, 이미 우리 쪽에선 소문 다 퍼졌다. 내가 하도 영상 찾으려고 들쑤시고 다니기도 했지만. 다들 알아, 너 억울한 거.”
윤진이 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이라야.”
이라가 붉어진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앙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지만, 윤진은 그런 이라를 배려하듯 손을 토닥이며 시선을 피해줬다.
***
“아이스 한 잔.”
허. 황당했다. 잠깐 힐끗 가게를 살핀 이라는 카운터에서 몸을 불쑥 내밀었다. 바로 앞에 여유롭게 서 있는 녹색 눈동자를 소유한 뻔뻔한 제이든 리 에반스에게.
“뭐해요?”
“주문하잖아.”
뭘 묻냐는 듯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황당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그 주문을 왜 여기서 하는데?
“사장님은 오늘 안 나오시고, 왜 당신이 오냐는 말이었어요.”
“당신은 그저 뭐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아니……!”
“저쪽에 앉아 있을 테니까 가져다줘.”
그는 휙 돌아 구석 창가로 향했다. 막 오픈해 손님도 없는데, 제일 먼저 들어온 게 그였다. 회색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고선 손에는 태블릿PC 하나뿐이었다.
황당해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던 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 남자 진짜 돈 많은 백수, 뭐 그런 건가? 출근 안 해?
“아, 한국이라서 안 하는 건가.”
중얼거리며 그라인더에서 곱게 간 원두 가루를 뽑아냈다. 샷 추출을 위해 머신에 장착하며 힐끗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어느새 자리를 잡고 태블릿PC로 무언가를 보는 그는 화보가 따로 없었다. 우우웅, 하는 머신 소리를 들으면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아침부터 저렇게 잘생길 일인가. 괜히 투덜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만든 뒤 그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정말 뭘 하긴 하는 건지 꽤 집중한 모습이었다.
“진짜 커피 마시러 온 거예요? 아침 여덟 시부터?”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뒀다. 그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둬 이라를 힐끗 쳐다봤다. 익숙한 그의 녹색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닿았다. 잠시 당황한 이라는 큼, 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사장님은 오늘 출근 안 하시나 봐요.”
“어차피 오전만 하는 거라며.”
“네, 당분간 서재 청소 때문에.”
“그래, 그럼.”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빨대 없이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한 모금 마시던 그는 눈썹을 휙 올렸다.
“샷 추가해줘. 투 샷.”
“뭐예요. 여기 커피 처음 마셔요?”
“응.”
너무 당당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자기가 차려준 거라며? 허, 참.
“투 샷이면 되죠? 아침부터 속 버려요. 빈속은 아니죠?”
잔을 들며 말하자, 제이든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타고 올라가 얼굴로 향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에 그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는 당신은.”
“난 빈속에 커피 안 마셔요. 기다려 봐요.”
휙 가버린 이라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그의 테이블로 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트레이에 뭔가 가득했다.
“투 샷 더 추가했고, 이건 샌드위치예요. 디저트가 없어서, 아침으로 먹으려고 사 온 건데 반 나눠 줄게요.”
생색내듯 이라가 생긋 웃었다. 그녀가 가져온 햄과 치즈 그리고 야채가 듬뿍 담긴 샌드위치는 꽤 맛있어 보였다. 제이든이 피식 웃으며 이라를 향해 말할 때였다.
“그럼 같이 먹…….”
딸랑. 말이 끝나기 전에 가게 문이 열렸다. 이라가 서둘러 몸을 돌리며 말했다.
“먹고 마셔요. 난 주문 받아야 해서.”
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후다닥 가버렸다. 카운터로 들어간 이라가 주문받기 시작했다. 출근 시간이라 그런가 직장인들이 한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
빤히 카운터를 보던 제이든의 시선이 그녀가 두고 간 샌드위치를 바라봤다. 반이 아니라 통으로 가져왔다. 반 나눴다는 말은 거절할까 봐 한 말이겠지.
태블릿PC를 탁 덮은 그는 음료를 제조하는 이라를 빤히 바라봤다. 장사가 잘 안 된다고 해서 온 거였는데, 막상 본 그녀는 꽤 바빠 보였다.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지속해서 들렸다.
그는 한참이나 이라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