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탁. 차에서 내린 제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부재중으로 찍혀 있는 반갑지 않은 연락에 기분이 저조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니, 저녁 준비 중이었던 건지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다.
“응? 왔어?”
부엌에서 나오던 수연이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제이든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네, 뭐.”
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2층 계단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일이 있어서 빨리 씻고 통화하고 내려올게요.”
“어? 제이든……!”
수연이 뒤늦게 불렀지만, 이미 제이든은 2층으로 올라가고 난 뒤였다. 사람이 있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씻고 내려올 거라니까, 뭐.”
수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 사용인이 한둘도 아닌데, 마주쳐도 놀라진 않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라 씨에게 밥 먹고 가라고 해야지.
2층으로 올라온 제이든은 곧장 제 방으로 향해 옷을 벗고 씻으러 들어갔다. 최대한 빨리 씻고 나온 그는 큰 타월 하나만 맨 허리에 둘렀다. 마침 시간에 맞춰 휴대폰이 울렸다.
[네. 들었습니다, 누락된 페이지 확인해 보죠.]
급히 전화를 받으며 방을 나갔다. 바로 옆이 그가 일하는 서재였다. 성큼성큼 서재로 향해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리고 순간 안쪽에서 놀랄 틈도 없이 작은 몸이 그의 위로 덮쳤다.
“으아!”
쿵-
그대로 바닥에 넘어진 그는 순간적으로 제 위로 넘어진 작은 몸을 잡았다.
“정말 죄송합……!”
허. 퍼뜩 고개를 든 이의 정체에 황당했고, 당황했다. 채 말리지 못한 물이 가슴팍으로 뚝 떨어졌다. 나지막하게 낮은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이라.”
“제이든?!”
그의 널찍한 품으로 넘어진 게 다름 아닌 이라라니. 그것도 수연의 집에서.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이해하기 전에 그는 이라를 잡은 상태 그대로 휴대폰을 다시 고쳐잡았다.
[아, 죄송합니다. 누락된 페이지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죠. 네.]
뚝.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제이든은 여전히 제 위에 놀란 채 엎어져 있는 이라를 바라봤다. 나 못지않게 당황한 얼굴을 보니 이것도 우연이라는 말인데.
“이, 이게 대체. 무, 무슨.”
너무 당황해 말이 안 나온다는 게 지금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까. 왜 그가 여기, 그것도 이렇게 편한…….
“헉!”
후다닥. 이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장에 너무 놀라 그가 어떤 차림인지 잠시 까먹었다. 넘어질 때 이라를 잡았던 그의 손이 더는 무의미하게 허공을 잠시 맴돌았다. 그는 황당한 얼굴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넘어진 그 상태 그대로 이라를 올려다봤다.
“무슨 소리야?”
그때 수연이 놀란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다급하게 2층으로 올라온 수연은 둘의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이든…… 너 괜찮니?”
“하.”
“이라 씨도 괜찮아요? 서로 너무 놀란 거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흘렀다. 제이든은 수연과 이라를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체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이 상황을.”
“대체 여기 왜 있어요?”
대뜸 튀어나온 이라의 질문에 제이든도 수연도 눈이 커졌다. 잠시 둘을 바라보던 이라는 아니겠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수연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저번에 말했던 내 아들 제이든이에요. 제이든, 여기는 우리 카페 알바생 한이라 씨.”
“What did you say?”
뭐라고? 제이든의 눈이 다시 휙 이라에게로 향했다. 이라 역시 수연의 소개에 이미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수연을 둘의 모습은 번갈아 보다가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둘이 원래 아는 사이……?”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수연은 잠시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봤다. 이미 이라는 놀라 굳어 있었고, 제이든도 별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의 옷차림이랄까.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타월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근데 너 옷부터 입어라.”
수연의 말에 제이든의 시선이 그제야 제 하반신으로 향했다.
“……Holy shit.”
***
“괜찮아요. 시간도 늦었고, 얼른 두 분 식사하세요.”
“먹고 가.”
저녁까지 차려준 수연에게 미안함에 손을 젓는데, 제이든은 그런 이라를 붙잡았다. 어서 앉으라는 듯 식탁을 가리키자, 수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 고생했는데 저녁 먹고 가요.”
“어, 제가 너무 죄송한데…….”
아직도 제이든이 수연의 아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내내 청소했던 그 서재가 그의 서재라는 사실도.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혼혈이라 잘 몰랐는데, 수연과 닮은 구석이 언뜻 보였다.
“앉아요. 제이든 먹이려고 많이 해서 괜찮아요.”
“아, 그럼 정말 감사히 먹겠습니다.”
더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이라가 조심스레 앉았다. 제이든은 당연한 듯 이라의 옆자리에 앉았고, 수연은 그 반대편에 자리했다. 고용인이 서둘러 식탁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럼 둘이 원래 아는 사이였어요?”
수연의 말에 제이든이 황당하게 피식 웃었다.
“둘도 아는 사이라는 게 더 놀랍네요. 저번에 카페 알바생 뽑았다고 했을 때 저도 간 것 같은데.”
제이든이 눈썹을 휙 올리며 이라를 빤히 바라봤다.
“네? 설마요. 왔으면 못 봤을 리가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저 외모를 못 보고 지나칠 리가 없었다. 부정하는 이라를 보며 수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 내려주고 바로 가서 못 봤을 거야.”
수연은 먹기 좋게 바른 갈비를 제이든과 이라의 밥 위로 얹었다.
“감사합니다.”
이라가 생긋 웃자, 수연도 따라 웃었다. 맛있게 먹기 시작하는 이라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제이든을 바라봤다. 어서 먹으라고 말하려 했는데, 수연의 입이 그대로 굳었다. 밥은 먹지 않고 뚫어지게 이라를 바라보는 그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요.’
‘사실 많이 변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똑같더라고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생각보다 더 반갑더라고요.’
‘그냥 어디선가 잘살고 있겠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거든요.’
수연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럼 제이든이 말했던 한국인 여자가 이라 씨였다고? 놀란 시선으로 다시 보니, 어느새 그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했다.
“혹시 둘은…….”
수연의 말에 이라와 제이든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사이지. 설마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이는 아니겠지. 제이든은 이라 씨에게 어린 아들이 있다는 걸 알려나. 복잡한 고민에 잠시 우물쭈물하던 수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생긋 웃었다.
“아니에요. 어서 먹어요.”
“네, 너무 맛있어요.”
“제이든, 너도.”
그가 피식 웃으며 대충 말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것도 인연이면 인연인 건지, 어떻게 이런 우연이 계속 겹칠 수 있는지 웃음이 나왔다. 어색해하면서도 최대한 예의 차려 식사하는 이라를 보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우는 어쩌고 늦게까지 일해?”
“아, 그게.”
이라가 힐끗 수연을 바라봤다. 어차피 수연도 다 아는 사정이었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 아빠한테 보냈어요. 손도 다 낫고.”
“다 나았다니 그건 다행이네.”
수연은 놀란 듯 제이든을 바라봤다. 아, 다 알고 있구나.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적어도 자신이 알기엔 제 아들은 이렇게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다. 늘 떨어져 지내 깊은 속사정까진 몰라도, 전에 봤던 여자들에겐 그랬다. 딱 한 명, 과거 제이든의 여자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먹고 데려다줄게. 늦었어.”
“괜찮다니까요. 바쁘지 않았어요?”
“데려다줄 시간은 있으니까 어서 먹어. 이왕이면 좀 많이.”
그가 피식 웃자, 이라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식사했다. 수연은 여전히 복잡한 눈으로 제이든을 바라봤고, 그는 이라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그녀를 어두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까부터 모른 척 묻지 않았지만, 손자국이 난 여린 얼굴이 신경 쓰였다. 울었는지 눈도 좀 부었고. 무슨 일이냐고 당장 묻고 싶었지만, 앞에 수연이 있어 좀 그랬다. 안 그래도 힐끔거리는 수연의 시선도 느껴졌고. 궁금한 게 많겠지.
식사가 다 끝나고, 달큰한 과육이 맛있는 딸기까지 먹고 일어났다. 됐다는데도 그는 차 키를 챙겨 이라를 쫓아 나왔다.
마지막까지 수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이라가 차에 올랐다. 핸들에 기대 그녀가 타는 걸 지그시 보던 그가 수연이 들어간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일 있나.”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이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그의 시선이 제 볼에 닿는 걸 느끼고서야 알아챘다. 거울을 못 봐서 부어오른 것도 까먹고 있었다. 황급히 어색하게 웃으며 손으로 가렸다.
“괜찮아요.”
“…….”
“진짜 별일 아니었거든요.”
앞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에 그는 잠시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부우웅-
대체 다 큰 성인 여성이 뺨 맞고 울 일이 뭐가 있다고. 차를 출발하면서도 그는 이라의 붉은 뺨과 울었던 눈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화를 삭였다.
아주 만일, 저 손자국이 그녀의 전남편이라면 삭일 수 없을 만큼이나 화가 나겠지만. 우선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