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가오지 마세요-21화 (21/70)

21화

“와…….”

방송국에서 일할 때 멋진 집은 웬만큼 다 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연이 데리고 온 그녀의 집은 상상 이상이다.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자, 수연은 자연스럽게 들어가며 생긋 웃었다.

“주기적으로 서재를 정리하거든요. 도우미 아줌마랑 같이하는데, 며칠 전에 다리를 다치셔서.”

“네에.”

대체 몇 평이야. 입이 떡 벌어지는 입구부터 시작해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놀라웠다. 2층의 단독주택은 세련됐으나, 싱그러운 식물들로 포근한 느낌이 강했다. 따스한 식물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서재는 2층이에요. 올라와요.”

수연을 따라 올라가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멍하니 구경하고 있자, 어느 방 앞에 멈춰선 수연이 문을 달칵 열었다.

“시급은 카페보다 더 높게 쳐 줄게요.”

자연스럽게 서재를 구경하려던 이라의 시선이 수연에게 향했다.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오늘 카페 문도 안 열었는데, 그냥 여기서 일한다고 생각할게요. 그리고 청소 정도는 언제든 도와드릴 수 있어요.”

“생각보다 고돼요. 책장도 높고, 책도 많아서. 원래는 아들 없을 때 청소해 두긴 하는데. 일주일 정도 오전에 카페 일하고 오후에 느긋하게 와서 청소하는 거 어때요?”

“저야 좋지만…….”

“그럼 오늘부터 부탁할게요. 대부분 영어로 된 책이라 꺼내져 있는 건 알파벳 순서로 넣어두면 돼요. 웬만하면 책 순서 건들 일은 없으니까, 쌓인 먼지만 털어주면 돼요.”

부탁할게요, 라며 수연은 1층으로 내려갔다. 원래 청소하려고 했던 건지 이미 청소 도구는 서재 안에 있었다.

“와아.”

서재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오니 더 멋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그 앞에는 1인용 소파와 티테이블, 다인용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 뒤로 쭉 빼곡하게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나열됐다.

“이걸 다 읽긴 한 건가.”

아들이 영어를 잘하나 보네. 죄다 영문 서적이었다. 천천히 둘러보던 이라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빨리해야지.”

수연의 배려로 오늘 이 꼴로 카페에서 일하는 창피는 막았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짐을 책상 위로 올리다가 아까 이건이 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봉투를 열어보니, 오만 원권 열 장이 보였다.

이건은 종종 이렇게 이라에게 미란과 지강 모르게 돈을 챙겨주곤 했다. 버는 족족 미란에게 넘어가는 걸 알기 때문에, 밖에서 밥이라도 제대로 된 거 먹으라며 늘 용돈을 줬다. 이혼하고 난 뒤에도 은우를 편히 만나는 건 전부 이건 덕분이기도 했다.

아마 이번에도 난리가 난 미란을 막아준 것도 이건이겠지. 봉투를 곱게 접어 올려둔 이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 청소.”

시선을 돌리며 준비된 먼지떨이를 들었다. 3일 안에 끝내주겠어.

***

한참 바라보던 휴대폰을 책상 위로 탁 놓았다. 로버트의 짙은 녹색 눈동자는 다시금 휴대폰을 향했다. 질끈 인상을 쓰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연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젠장.]

당장 스케줄을 변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릴 때, 인터폰이 울렸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또각또각,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는 책상 앞에 섰다. 허리까지 오는 금색 머리는 풍성하게 여자의 몸을 감쌌고, 로버트를 보는 바다를 담은 것 같은 푸른 눈은 한없이 당차기만 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했는데, 더 복잡해지겠군. 로버트의 입에서 낮고 느릿하게 여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로렌.]

무작정 로버트의 사무실로 찾아온 로레인에, 그의 비서는 진땀을 뺐다. 그런데도 로레인은 당당한 얼굴로 로버트 앞에 설 뿐이었다. 그녀의 늘씬한 몸매는 무례를 저지른 것도 모른 채 한껏 뽐내기 바빴다.

[왓슨 씨, 부디 정중하게…….]

[밥, 내 말 좀 들어봐요.]

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레인의 입에서 정중과는 거리가 먼 말들이 튀어나왔다. 비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로레인은 여전히 떳떳했다. 결국, 로버트는 침묵을 관두며 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필요하면 부르지, 셀.]

[알겠습니다, 에반스 씨. 30분 뒤 회의는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진행해. 금방 끝날 거야.]

비서는 고개를 꾸벅이며 그의 집무실을 나갔다. 덕분에 로레인은 뜻대로 로버트와 둘만 남게 됐다. 제이든이 나이를 먹어 중후한 느낌이 강해진다면 바로 이 사람과 똑같겠구나 싶을 정도로 둘은 닮았다. 어쩌면 그가 혼혈인 걸 뒤늦게 안 이유는 아버지인 로버트를 더 닮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제이든과 똑같은 녹색 눈동자는 로레인에게 전혀 다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로버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로렌.]

[제이디가 연락을 안 받아요.]

하아. 말을 하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 로버트는 막무가내인 로레인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인상이 강한 로버트를 닮은 제이든은 인상만큼이나 성격이 좋지 못했다. 물론 남을 폄훼하거나 안하무인은 아니었지만, 싫은 건 죽어도 싫은 성격답게 아무리 로레인이 쫓아다녀 봤자였다.

로버트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았다. 자신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심각한 오해를 하는 게 있다만, 로버트 자신보다 제이든이 더 한 성질 한다는 사실이다. 미소가 수연을 닮은 덕분에 웃을 때는 한껏 부드러워져 남들이 종종 오해하지만.

[로렌.]

세 번째 그녀를 부른 로버트는 다음 회의 때 필요해 읽어야 할 서류를 향해 눈을 내렸다.

[제이디 성격 알잖아. 나라고 그를 꺾을 순 없어.]

[수연도 연락을 안 받아요! 밥, 날 좀 도와줄 순 없어요? 제발.]

간곡하게 붙는 말에도 로버트는 읽던 서류를 쭉 읽어 내려갔다. 로레인을 도와준다면 제이든에게 미움받을 게 뻔했다. 그리고 로버트는 제 아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또한, 마음에 안 드는 게 더 있다면 이런 로레인이 수연을 휘말리게 하는 것도.

[마음 약한 수연에게 연락한 건 꽤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나나 제이디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수연도 연락을 안 받는다니 이미 마음이 정리됐겠군.]

[제이디가 한국에 갔나요?]

[제발 사람이 말을 하면 먼저 듣고 생각을 해. 그다음에 입 밖으로 말을 내뱉어. 좋은 순서일 거야.]

[밥!]

[수연이 내 애칭을 듣고는 예전에 이름이 ‘밥’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 아, 라이스 말이야. 한국어 발음이 그렇다더군. 이해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

엉뚱했던 앳된 수연의 모습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피식 웃은 로버트는 슬쩍 시선을 들었다. 확실히 로레인은 아름다웠다. 그러니 여러 수식어가 그녀를 꾸며댔다. 하지만 적어도 제이든의 취향은 아니었다. 로레인의 취향이 제이든인 건 확실하지만.

아들을 너무 잘나게 낳았나. 평생에 걸쳐 여자들이 그를 너무 괴롭힌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중 가장 중증은 누가 뭐래도 로레인이겠지만.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 아니에요. 나는 심각하다고요.]

[나 또한 그래. 로렌, 부탁하건대 내 아들의 성질을 더는 건들지 마. 성격파탄자를 아들로 두고 싶진 않거든.]

[제이디는 늘 내게 다정했어요.]

[그렇겠지. 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로버트의 시선이 순간 차가워졌다. 그걸 로레인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잠시 멈칫했던 로레인은 시선을 휙 돌렸다. 역시나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이럴 때면 로버트는 로레인이 어떤 여자인지 가끔 까먹곤 했다.

그들에게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수연은 기뻤었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레인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였다. 어떤 불행한 사고나 우연이 아닌, 고의적인 행동으로 제이든을 불행에 밀어 넣었다. 더는 로레인에게 다정할 이유가 없었다.

[이만 어리광은 그만 부렸으면 좋겠군.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좋아하는 약이라도 해 봐. 기분이 나른해지지 않겠어?]

로레인의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놀란 듯 벌어졌다.

[어떻게 나한테…….]

[널 반기지 않는다는 뜻이었어. 왓슨.]

[밥…….]

[알아들은 것 같아 다행이야. 나가는 문은 들어온 곳과 같아.]

***

“그냥 털면 될 줄 알았는데 은근히 손이 많이 가네.”

몇 시간 째 청소하고 있는데 삼 분의 일도 못 했다. 보기보다 책도 많았고, 뒤쪽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책이 든 상자도 몇 개 보였다.

“저건 버리는 건가?”

노끈으로 묶어둔 책이 한편에 있었다. 수연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러면서 허리도 좀 펴고.

“으으.”

허리가 뻐근했다. 절로 나오는 신음을 꾹 삼키며 몸을 제대로 폈다. 방송국 일하면서 고된 일이란 일은 다 해 봤는데, 고작 몇 달 쉬었다고 그새 몸이 또 망각했다.

문으로 걸어가며 수연에게 물어볼 몇 가지를 정리했다. 묶인 책이랑, 상자에 든 건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아, 사다리도.”

책장 위 먼지도 털어야 할 것 같았다. 생각하며 문고리를 탁 잡는데, 잡기도 전에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타의로 확 열렸다. 방어할 겨를도 없이 이라의 몸이 앞으로 확 쏠리며 넘어갔다.

“으아!”

쿵-

언뜻 보인 맨살과 함께 그대로 그것을 깔며 넘어졌다. 누가 봐도 벗은 남자의 상체였다. 그것도 매우 튼튼한. 순간 수연이 아들이 있다고 한 이야기가 생각나 이라는 고개를 팍 들며 무조건 사과부터 했다.

“정말 죄송합……!”

“…….”

말이 뚝 끊겼다. 허공에서 마주친 황당하고 당황한 녹색 눈 때문에. 채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카락에서 툭 물이 떨어져 그의 단단한 상체를 적셨다.

“이라.”

“제이든?!”

OMG. 이게 뭔데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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