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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20화 (20/70)

20화

“엄마아…….”

은우가 칭얼거리며 이라의 손을 꾹 붙잡으며 매달렸다. 여린 은우를 보니 마음이 너무 흔들렸다. 그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라는 천천히 은우의 앞에 주저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미안해. 엄마가 전화도 자주 하고, 은우 보러 자주 올게.”

“……흐으잉.”

결국 꾹 참던 은우의 눈물이 터졌다. 한껏 오므린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부드러운 뽀얀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 왜 아빠랑 헤어졌어? 흐으윽, 나랑도 같이 안 살고…….”

“은우야…….”

명치 한가운데가 콱 막힌 듯 답답했다. 우는 은우를 달래면서도 방법이 없어 짙은 한숨만 내뱉었다. 너무 어린 은우에게 가혹한 현실을 너무 일찍 알려준 것만 같았다.

“엄마가 진짜 미안해.”

뚝뚝 눈물을 흘리던 은우는 잡고 있던 이라의 손까지 내팽개치고 침대로 와다다 뛰어갔다. 이불까지 폭 덮은 아이는 얼굴을 감췄다. 마음이 아파 몇 번 더 은우를 불렀지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이라는 천천히 일어나서 은우의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은 익숙한 이들이 서 있었다.

“하, 참나.”

“……흉 안 지게 연고만 잘 발라주세요.”

익숙한 상황이었다. 내려앉을 듯 무거운 공기, 팽창해 터질 것만 같은 거센 감정. 오롯이 쏟아지는 이것들은 이라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은우를 가진 후부터 최근 몇 개월 전까지 몇 년을 지냈던 집이었다. 전 시댁이자, 지강의 본가. 이혼하고는 처음 마주하는 지강의 친모 계미란과, 친부 정이건이었다.

은우의 손이 다 낫고 약속대로 오늘 이라는 은우를 데리고 돌아왔다.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미란의 시선에도 아이를 먼저 방에 데려다 놨다. 미란은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짜악-

이라의 고개가 거세게 돌아갔다. 이럴까 봐. 이럴 걸 알아서, 은우를 먼저 들여보냈다. 두툼한 손에 맞은 뺨이 화끈거렸다.

“당신 진짜……!”

뒤늦게 놀란 이건이 미란을 잡았지만, 미란은 이미 분노에 이성을 잃었다.

“뭐, 연고?! 너 미쳤니? 애 데리고 오라고 했어, 안 했어! 며칠을 데리고 있으면서, 한 번을 안 찾아와? 연락도 다 씹고, 네가 드디어 돌았구나? 미쳤구나?”

“그만해! 은우 다쳐서 그랬다고 했잖아.”

“말리지 마! 내가 오늘 저 못 배워먹는 년을 확 그냥……!”

길길이 날뛰는 미란을 이건이 강하게 붙잡았다. 악을 쓰며 욕을 질러대는 미란의 목소리가 은우의 귀에까지 들어갈까 걱정이었다. 거실에서 난리를 피우는 둘을 보며 이라는 짧게 고개를 꾸벅였다.

“은우 잘 부탁할게요. 가보겠습니다.”

“야!”

휙 몸을 틀어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은우를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아마 본다면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숨도 안 쉬고 집을 나온 이라는 곧장 밖으로 향했다.

5월 초의 바람은 따스하지 않았다. 찬 공기가 그새 부은 뺨 위를 스치자, 화끈거렸던 부위가 오히려 진정됐다. 참기만 했던 뜨거운 감정 역시 조금 가라앉았다.

“하아…….”

걸음을 멈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문득 다시 제이든이 떠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아직 새 가죽 냄새가 빠지지도 않은 샤넬 로고가 박힌 지갑을 바라봤다.

‘낡았길래. 은우에게도 당신에게도 특별한 날이 됐길 바라.’

집에 들어가기 직전 건네준 쇼핑백에는 새 지갑이 들어 있었다. 놀라 어떤 반응도 못 하는 이라를 두고 그는 피식 웃으며 가버렸다.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제대로 보답한 것도 없는데 또 받기만 했다. 바로 돌려주려고 전화했지만, 그는 그러리란 걸 알았던 건지 짧게 문자만 보냈다.

<출국 전에 한 번 더 함께 밥 먹어. 그땐 당신이 사줘.>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왜 대체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고작 십 년 전에 마음에 들었던 찰나의 여자에게. 그것도 십 년 전과 다르게 더 현실이 팍팍해진 자신에게.

그의 생각으로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살면서 본 가장 근사한 남자였다. 때론 연예인 같았으며, 때론 또 신기루 같은. 결론은 가까워도 가까울 수 없는 남자.

“이라야.”

뜻밖의 목소리에 휙 뒤돌았다. 바로 쫓아 나온 건지 이건이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아버님…….”

“하이고, 하아. 간 줄 알고, 뛰어나오느라.”

왜…….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이건은 천천히 이라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손에 바스락거리는 무언가를 쥐여줬다. 멍하니 시선을 내려 보니 봉투였다.

“얼마 안 돼. 아가, 너 너무 야위었다.”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봉투를 다시 내밀었다.

“아니에요. 제가 이걸 어떻게 받아요.”

“받아.”

이건은 한숨과 함께 다정한 시선으로 이라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서 그래. 항상 너한테는 내가 너무 미안해. 그냥 아빠가 주는 용돈이라고 생각해.”

“아버님, 저 이거 못 받아요.”

“미안해. 아가야, 이라야. 괜히 우리 집으로 시집와서 고운 너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 저렇게 예쁜 은우까지 낳아줬는데, 내가 미안하다.”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전보다 더 마른 것 같은 이건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이라의 두 손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힘들면 언제든 아빠한테 연락해. 지강이 그놈과 별개로, 이라 너도 내 딸이야. 너한테는 고맙고, 미안해. 고생한 거 알고 있어. 지강이 그 자식이 너 힘들게 한 것도 다 알아. 너희 이혼한 거, 난 잘했다고 생각해. 은우도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렴. 잘 챙겨 먹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그래야지.”

“…….”

“너도 이제 잘 살아야지. 살아봐야지.”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안쓰럽게 웃는 이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빠가 있었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런 게 사랑인 걸까.

고된 결혼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줬던 건 사랑스러운 은우와, 다정했던 이건 덕분이기도 했다. 매일 구박하는 미란과 제 멋대로인 지강에게서 잠시 도피할 수 있게 구해준 사람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 봉투를 꾹 손에 쥔 이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로 얼룩졌다. 어깨를 토닥이는 이건의 손길에, 아까의 은우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

“어머, 이라 씨.”

카페에 출근하자, 수연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맞았던 뺨은 더 확연하게 부었다. 팽팽해진 피부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 얼굴로 일할 수 있나 고민했지만, 일은 해야지 어쩔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마스크라도…….”

“무슨 소리예요. 얼음찜질이라도 해야겠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여자 얼굴이…….”

수연이 서둘러 얼음팩을 만들었다.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수연의 손에 이끌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얼음의 찬기가 뺨의 열기를 가라앉혔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는 거예요?”

얼음팩과 함께 따듯한 라떼를 만들어온 수연은 한숨과 함께 이라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흰 피부가 약할 정도로 얇아 보여 맞은 게 확연하게 보였다.

“아, 그게.”

한 손은 얼음팩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커피잔을 쥐었다. 상반되는 온도가 제 마음 같았다. 오면서 많이 울어 눈도 팅팅 부었고, 수연이 걱정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 봐도 괜찮냐고 물어볼 상태였으니까.

은우의 존재만 알지, 수연은 이혼 사실을 몰랐다. 우물쭈물 고민하던 이라는 아까 돈 봉투를 쥐여주는 이건의 모습이 떠올라 다시 울컥했다.

“어머, 어떡해.”

“흐읍, 죄송해요.”

눈물이 팡 터진 이라에게 수연은 손수건을 건넸다.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 이라가 속사정을 털어놨다. 수연이 너무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줘서, 지금은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일찍 임신해서 결혼한 것부터, 이혼하고, 직장에 잘린 것까지. 훌쩍이며 그간 있던 일을 수연에게 말했다.

“그럼…… 배소라 그 일의 PD가 이라 씨였어요?”

끄덕끄덕. 눈물을 닦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수연은 황당하면서도 놀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라는 이미 다 식은 커피잔을 매만졌다. 그냥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갑자기 놀라셨죠. 죄송해요. 제가 부모님이 안 계셔서, 사장님이 너무 잘해주시니까 울컥했나 봐요.”

옅게 웃었다. 다 울고 나니까 민망했다. 이라가 어색하게 웃었지만, 평소라면 따라 웃어줄 수연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잠시 시선을 내렸던 수연은 짙게 한숨을 내뱉었다.

“왜 자꾸 마음이 갈까.”

나직한 수연의 말에 이라가 충혈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수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고아였거든. 천애 고아. 잠시나마 봐줄 할아버지 같은 분도 없던.”

“……아.”

“나랑 이라 씨가 너무 비슷하네. 그래도 이라 씨가 더 낫다. 난 우리 아들 못 지켰거든. 엄마 자격이 없어서.”

‘여러모로 나는 많이 상처받았지만, 당신은 적어도 은우는 제대로 지켰잖아.’

뭐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수연의 모습에서 왜…… 그가 보였지. 씁쓸한 그 미소가 언뜻 수연과 제이든이 닮아 보였다.

“그럼 이라 씨, 돈 필요하면 나 좀 더 도와줄래요?”

딴생각에 빠져 있던 이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연은 온화한 미소를 짓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착각이겠지. 그래, 그럴 리가.

“무슨……?”

“우리 집에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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