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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19화 (19/70)
  • 19화

    쿵쿵. 심장이 뛰었다. 너무 빨리 뛰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미쳤나 봐.

    “제이든! 아, 알았어요.”

    후. 그의 이름을 부르니 그제야 그가 시선을 거뒀다. 괜히 씩씩대며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앞에 있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김에 말도 놔.”

    “그건 정말 내가 알아서 할게요.”

    괜히 그를 흘겨본 이라는 피규어를 가지고 노는 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저 피규어. 저게 발단이었지.

    “얼마 안 하는 거지만, 저녁은 내가 살게요.”

    “그럴 필요…….”

    “있어요. 당신한테 그만 받고 싶어요. 미안하단 말이에요.”

    이라가 눈으로 은우 손에 들린 피규어를 힐끔거렸다. 저것도 포함해서, 라는 뜻에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린이날이잖아.”

    “그래도요. 그리고 나한테도 제대로 당신한테 보답할 기회를 줘요.”

    “보답이라니?”

    그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썹을 휙 올렸다. 이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 아직 당신한테 아무것도 안 해준 거 알아요?”

    “꼭 받은 대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나?”

    “받은 대로 돌려주지도 못해요. 당신한테 받은 게 돈으로만 해도 얼만데……. 그냥 돌아가기 전에 밥 한 번 더 먹어요. 그래서 묻는 건데, 언제 가요?”

    비싼 거라도 꼭 먹여야겠다 싶었다.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보니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웃는 거 잘생긴 건 알겠는데 언제 가냐고.

    “글쎄, 원래라면 갔겠지만 말이야.”

    “네?”

    “우선 일어나지. 다 먹은 것 같은데.”

    제이든이 씩 웃으며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은우를 챙기는 모습에 이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다정한 게 몸에 밴 건지. 가방을 챙기며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8만 9천 원입니다.”

    지갑을 꺼내 카드를 건넸다. 은우와 함께 뒤따라오던 제이든은 계산하던 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녀가 들고 있는 지갑으로 시선이 향했다.

    “영수증 드릴까요?”

    “아뇨,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계산을 마치고 뒤를 돌아 제이든과 은우를 바라봤다. 어쩐지 그의 시선이 손에 꽂힌 것 같아 이라도 시선을 함께 내렸다.

    “아.”

    지갑. 잠깐 손으로 매만졌던 이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건 다 팔았는데, 지갑은 계속 쓰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해서요.”

    그가 십 년 전 사줬던 지갑이었다. 사실은 그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팔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이라는 현실적인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그랬군.”

    그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의아하게 보던 이라는 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 화장실만 금방 갔다 올게요.”

    “응, 기다릴게.”

    이라가 사라지고 나서야 제이든은 은우의 손을 꼭 잡은 채 입구 앞에 섰다. 아이는 피규어에 정신이 팔렸고, 그는 아까 본 이라의 지갑에 생각에 잠겼다.

    꽤 낡았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십 년이나 바꾸지 않고 썼다니. 가방보다 손이 더 많이 타는 지갑인데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쓰고 있었다. 그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다른 건 직원에게 맡겼어도, 지갑만큼은 손수 그가 골랐으니까.

    보통 지갑을 십 년씩 쓰던가.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섰다. 그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자, 이십 대로 보이는 여자 둘이 놀라 입을 가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저, 저기. 혹시…….”

    “헉, 어떡해. 맞는 것 같은데?”

    “제, 제이든 리 에반스…… 아닌가요? 아, 어떡해! 네가 영어로 해 봐!”

    발을 동동 구르는 그들을 보며 제이든은 힐끗 화장실 쪽을 봤다. 아직 이라는 안 나왔다. 그는 잠시 시선을 여자들에게 돌렸다. 대답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네, 맞아요.]

    “헉, 맞대! 와! 하, 하이!”

    [반가워요.]

    씨익 웃자, 여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손까지 덜덜 떠는 걸 보니 꽤 그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귀찮아서 일부러 말 안 통하는 영어로 하려고 했는데, 그냥 빨리 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한국말도 할 줄 알아요.”

    “팬이에요! 으으! 어떡해! 한국에서 제이든을……!”

    여자는 손에 휴대폰을 꾹 쥔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잔뜩 들뜬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진 한 번만 찍어도 되나요? 사인도…….”

    “사진은 안 되고, 사인 해 드릴게요.”

    “우와, 감사합니다! 종이, 종이.”

    서둘러 수첩과 펜을 꺼내 건네는 걸 받았다. 그는 익숙하게 이름을 묻고 사인 두 장을 해줬다.

    “다음 작품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고마워요.”

    “혹시 영화는 이제…… 아, 아니에요. 정말 잘생기셨어요! 그리고 한국말도 엄청 잘하시고!”

    들뜬 여자들의 눈이 이제는 그에게서 손을 잡고 있는 은우에게로 향했다. 대체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는 미소만 지은 채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웃는 그를 보기만 하고선 아쉽게 뒤돌아 나갔다.

    “형아, 형아.”

    은우는 이 상황이 신기한지 제이든을 불러 큰 눈을 깜빡였다.

    “형아 연예인이에요?”

    똘망똘망한 눈이 귀여워서 제이든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야. 작가라고 해.”

    “우와…… 우리 엄마는 TV 만들어요! 멋있어요! 형도 엄마도.”

    방송국에서 일했었다고 했나. 방송을 제작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나 보네. 은우와 짧게 대화를 나누는데, 어느새 이라가 나왔다.

    “미안해요. 사람이 많아서 기다리느라.”

    “괜찮아, 가자.”

    ***

    “으, 힘들죠? 미안해요.”

    어느새 은우는 제이든의 넓은 등에 기대 잠들었다. 저녁을 먹고 어린이날 기념으로 선물을 잔뜩 꺼내 둔 백화점에 갔다. 로봇 같은 장난감이나 하나 사주려고 생각했던 이라와는 다르게, 제이든은 은우에게 비싸고 좋은 장난감을 선물했다.

    “힘들긴.”

    힐끗 시선을 돌려 잠든 은우를 바라봤다. 색색 잠든 아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머물렀다. 기분 좋은 듯 웃는 그를 보며 이라는 제 손에 들린 큰 장난감 박스를 바라봤다.

    “은우가 가지고 놀기에는 너무 고가 장난감 아닌가 싶어요.”

    안 그래도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 오늘도 음식점에서 하나, 백화점에서 하나. 그리고 자잘하게 은우의 눈길이 가는 것들에 그는 웃으며 지갑을 열었다.

    “덕분에 은우에게는 잊을 수 없는 어린이날이 될 거예요. 고마워요.”

    “그거면 됐어.”

    백화점 근처로 아이들이 구경하기 좋은 시설을 마련해 놔서 멀리 주차한 뒤에 돌아다녔다. 중간에 피곤한 은우가 먼저 잠들어 그대로 주차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 들어갈 남자아이를 업고 있는데도 그는 힘들거나 피곤한 기색도 없었다. 그와 함께 걸어가며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라는 저도 모르게 그들을 마주 힐끔거렸다.

    저들의 눈에는 우리가 어떤 사이로 보일까. 아이를 업고 있는 제이든을 아이의 아빠라고 보려나. 문득 여러 생각에 이라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잠잠한 휴대폰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이날이 다 지나가는데 지강에게는 전화 한 통 없었다. 어린 아들에게 어린이날 정도엔 다정하게 전화는 해 주지.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가끔 당신은 늘 복잡해 보여.”

    갑작스러운 말에 이라가 고개를 들어 제이든을 바라봤다. 그는 슬쩍 시선을 내려 이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신만 보면 챙겨주고 싶어.”

    그는 별 뜻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어머니가 떠오르거든. 뭐가 그렇게 슬프고 복잡한지. 당신처럼 말이야.”

    “당신도요.”

    이라의 말에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런 그녀도 따라 멈추며 그를 또렷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쇼핑백을 잡은 손에 꾹 힘을 줬다.

    “뭐가 그렇게 슬프고 복잡한 건지, 당신도 아파 보여요.”

    “…….”

    “그냥 그렇다고요. 다들 각자 아픔이 있잖아요. 당신도 나도, 모두가.”

    이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십 년 전이랑은 제이든 분위기가 달라졌으니까.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 같아요.”

    그의 입술이 자각하지 못한 채 조금 벌어졌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옅게 좌우로 흔들렸다. 그의 반응에 이라가 눈을 깜빡였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인데…….

    당황한 듯, 어쩌면 무언가 정곡을 찔린 듯 그는 놀라 보였다. 무슨 일인지 알 순 없었지만, 그저 위로를 조금 해 주고 싶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니 오히려 제가 더 당황했다.

    허공에서 눈을 마주친 채 서로 멈췄다. 찰나의 부딪혔던 시선을 먼저 돌린 건 제이든이었다. 그는 잠시 복잡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각자의 삶을 살다가 아주 잠깐 다시 만난 거니까.”

    장난감을 들었던 이라의 손이 움찔 떨렸다. 순간 그와의 사이에 차갑고 두꺼운 벽이 세워진 기분이었다. 선을 넘었던 걸까, 처음으로 그가 차갑고 멀게 느껴졌다. 대뜸, 생각도 전에 말이 튀어 나갔다.

    “……미안해요.”

    “뭐?”

    이라의 사과에 제이든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이라는 당황했다. 왜, 나 왜 사과했지? 자신도 놀라자, 제이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라, 사과할 일은 아니었어.”

    “아, 나도 모르게…….”

    그는 피식 웃으며 짧게 어서 가지, 라며 다시 걷던 길을 걸었다. 문득 멈춰 서서 뒷모습을 보던 이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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