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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18화 (18/70)

18화

제이든의 등장에 순간 모두가 벙어리가 된 듯 입을 열지 않았다. 놀란 침묵을 깬 건 얼굴이 달아올랐던 여자였다.

“누, 누구세요?”

이라와 은우를 품에 넣으며 당당하게 서 있는 남자. 그것도 녹색 눈에 족히 백구십은 될 것 같은 다부진 체격의 외국인이었다. 차는 물론이고 걸친 옷부터 허접한 게 단 하나도 없는. 남자에게서 나오는 위압감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라를 향해 위협적으로 서 있던 남자의 기세도 조금 죽었다. 어찌나 목소리가 크던지, 차 안에서도 다 들릴 정도였다. 여자가 해대는 개소리부터, 아이가 빽빽 우기는 소리까지. 제이든은 시선을 내려 그들을 힐끗 바라본 다음 은우와 이라를 바라봤다.

앞서 나서서 가려줄 가림막 하나 없이 작은 몸으로 꿋꿋하게 서 있던 그녀의 등을 보고 있자니,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그가 나오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음에도.

짧게 고민했으나, 이미 나온 거 어쩔 수 없었다. 상의하지 않은 이라에겐 미안할지 모르겠지만, 은우가 저렇게 상처받은 얼굴로 숨어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무슨 일이죠. 문제가 있다면 저와 대화하시죠.”

놀라울 만큼 유창한 한국어에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제이든은 특히 이라의 앞에 끼어들듯 다가온 남자를 찍어 누르듯 바라봤다. 덩치가 그때 봤던 그녀의 전남편보다도 못했다. 기가 차네.

“몸으로 들이미는 건 아이들이 보기엔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 저는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서요. 집사람이 워낙 다혈질이라.”

더듬거리는 남자의 말에 여자가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봤으나, 남자는 서둘러 해찬을 품에 안았다. 꽁무니 빼려는 모습에 제이든은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좋은 날인데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가죠.”

“네네, 실례했습니다. 자, 가자. 당신도 빨리 와!”

남자가 휙 뒤돌아 가자, 여자는 씩씩대며 남자를 쫓아갔다. 멀리서 짜증이 섞인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저게 나한테 하는 말 못 들었어?!”

“씁, 조용히 해. 허구한 날 소리만 빽빽 질러대니, 창피해서 원.”

“뭐라고?! 당신 지금 나한테 한 소리야?”

멀어지는 그들의 대화 소리에 곁에 있던 유치원 선생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선생까지 들어가고 주위에 있던 이들도 한둘 사라졌다.

“미안.”

“……왜요. 도와준 거잖아요.”

힘없이 이라가 웃자, 제이든은 품에 안았던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어. 엄마처럼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이 있다면, 그걸 배워야 하는 미성숙한, 그러니까 더 커야 하는 어른도 있는 거야.”

“해찬이네 엄마처럼요?”

“음, 그래. 은우가 그런 것도 이해해줄 수 있는 멋진 어른으로 자라야겠지?”

“형아처럼? 제이든 형아처럼 자라요? 이해해주면?”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제이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은우가 활짝 웃으며 작은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응! 나 꼭 형아처럼 멋진 어른이 될 거예요! 다 이해해!”

“은우 먼저 차에 탈래?”

“네!”

은우를 차에 태우고 돌아온 제이든은 표정이 좋지 못한 이라의 앞에 섰다. 억지로 옅게 웃으며 올려다보는 이라의 모습에 그의 얼굴엔 걱정이 깃들었다.

“당신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뭐, 그냥 조금 창피하네요.”

하하, 옅게 웃은 이라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유치원에서 장난으로 아이들이 툭툭 내뱉은 말에 계속 상처받고 있었겠죠? 애들은 너무 어리니까.”

조금 더 커도 부모의 이혼은 충격일 텐데, 그보다도 어린 은우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문제였다. 아무리 사랑을 마음껏 주고 싶어도,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도, 그녀가 처한 이 현실은 너무 고달팠다.

“은우한테도, 당신한테도 미안해요.”

“나도 아주 어릴 땐 어머니랑 둘이 살았어. 그땐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어. 여러모로 나는 많이 상처받았지만, 당신은 적어도 은우는 제대로 지켰잖아. 은우는 상처받지 않게 하면 돼.”

씨익 웃은 그는 고개를 까닥이며 차를 가리켰다.

“그럼 이제 갈까?”

뒤돌아 차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러모로 나는 많이 상처받았지만.’

왜 그 말이 어쩐지 아프게 들렸다. 모른 척하고 싶었으나, 다시 만난 그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슬픔이 생겼다. 여태 보듬어줄 사람이 없었을까, 아니면 그러한 사람이 준 슬픔일까.

“엄마!”

“아, 응. 갈게.”

창문을 내리고 활짝 웃는 모습에 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다음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

“미국은 어린이날이 없구나. 처음 알았어요.”

“어린이는 특별한 날뿐만 아니라 늘 보호하고 행복해야 할 존재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면 더 편해.”

저녁은 은우가 먹고 싶다던 레스토랑으로 왔다. 다들 무난하게 먹는 메뉴였고, 특히 피자를 먹고 싶다던 은우에게 제이든은 많은 선택지를 줬다.

“엄마, 나 화장실 갈래.”

“혼자 갈 수 있겠어?”

“응!”

힐끗 테이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라면 가능했을 텐데, 오늘은 어린이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이라는 미안한 듯 웃으며 제이든을 바라봤다.

“은우 화장실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올게요.”

“내가 갈게.”

그가 선뜻 일어났다. 괜찮다며 고개를 젓는데, 그는 씩 웃으며 은우의 손을 잡았다.

“나도 가려던 참이었어. 먹고 있어.”

“응! 형아랑 다녀올게!”

두 남정네는 말리기도 전에 홀랑 손잡고 가버렸다. 뒷모습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보통 성인 남성보다도 키가 큰 그는 은우에게 맞춰 허리를 굽혀 손을 잡았고, 은우는 그런 그와 손을 잡기 위해 팔을 평소보다 더 위로 뻗었다.

“이런 모습을 볼 줄이야.”

화장실로 걸어가는 둘을 보며 문득 아빠와 아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어. 무슨 생각을…….”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 둘을 보며 이라는 표정이 굳었다. 기억도 잘 안 나는 지강과 셋이 외출했을 때가 있었다. 그땐 당연히 아이의 뒤치다꺼리는 이라 몫이었다. 방금도 지강이었다면 밥이나 먹고 있었겠지.

이렇게 비교해서 좋은 거야 없지만, 너무 다정한 그를 보자니 더 속이 상했다. 아까 유치원에서 일도 있었고. 손도 슬슬 낫기 시작하니 다시 지강에게 보내야 하는데…….

양육권을 다시 가져오고, 아이를 데리고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여건이 안 됐다. 매달 보내는 양육비에도 허덕이고 있는데, 양육은 무슨. 당장 아르바이트나 하는 신세니까 더 그랬다. 윤진의 말대로 복직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된 직장을 다시 구해야 하는데.

“하아.”

복잡한 현실에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이를 키우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힘든 일조차 손 뻗어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미치도록 한심했다.

-이것이 맥주다! 시원하게…….

가게 내부에 달린 TV가 광고를 틀었다. 무심결에 시선이 돌아갔던 이라의 표정이 사납게 굳었다. 스크린 안에서 시원한 맥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여배우.

“배소라.”

나직하게 흘러나온 이름에 미간은 더욱 굳어졌다. 내 인생은 한순간에 이렇게 바닥을 쳤는데…….

“엄마, 이거 봐! 형아가 이거 사줬어!”

멀리서 오던 은우의 목소리에 서둘러 표정을 풀었다. 은우의 손에는 캐릭터 피규어 같은 게 들려 있었다. 제이든과 함께 자리에 앉은 아이는 신이 나서 피규어를 이라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부웅! 이거 부웅이야, 저기 애들이 다 갖고 싶다고 했어!”

“응?”

은우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가게 입구에 쭉 나열된 아크릴판 속 피규어가 보였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구경하거나 사달라고 떼쓰고 있었다. 하도 화려해 이라도 들어오며 봤었다.

“이거…….”

얼마냐고 놀라 물으려던 걸 너무 좋아하는 은우 때문에 하다 말았다. 제일 크고 화려한 거니까 오만 원은 그냥 넘던데. 곤란한 듯 찌푸려진 미간에 제이든이 신경 쓰지 말라며 웃었다.

“쿠키에 대한 보답이야. 나와 은우 사이의 거래니까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허, 저기요.”

“이봐, 저기, 당신. 언제까지 날 그렇게 부를 거지?”

제이든이 미간을 슬쩍 구겼다.

“내 이름이 남들과 다르게 길어서 헷갈리나? 내 나라에선 그리 긴 이름도 아닌데 말이야.”

“네? 그건, 당신도 날 그렇게 부르니까…….”

“이라.”

제이든이 씨익 웃었다. 그의 미소에 이라는 홀린 듯 멍하니 바라봤다. 녹색 눈동자가 미소로 반쯤 가려졌다.

“자, 이라 네 차례야.”

“뭐, 뭐라고 불러요.”

“부르는 건 당신 마음이지.”

부르는 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는 불러줄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라는 슬쩍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반스 씨?”

“What the……. 하!”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한이라가 얼마나 황당한 여잔지. 하마터면 은우 앞에서 거친 말을 쓸 뻔했군. 그는 다시 억지로 미소를 머금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Zayden.”

“……한국에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이름 안 불러요.”

“난 한국인 아니야.”

“부르는 건 내 마음이라고 방금 불과 몇 초 전에 누가 말하지 않았나요?”

“누군지 모르겠군. 제이든이라고 불러.”

“부르는 거에 왜 이렇게 집착해요?”

“저기, 당신 다음에는 그쪽이 될까 봐. 우리 이젠 서로 이름도 아는데, 이름 부를 사이 정돈되지 않나.”

이라가 눈을 굴리자, 제이든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살짝 턱을 치켜든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다보듯 깔렸다. 그 모습에 다시 시선을 빼앗겼고, 동시에 붉은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 정도는 하고 싶은데. 이라 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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