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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17화 (17/70)
  • 17화

    무난한 청바지에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조금 추우려나, 아직 5월 초니까. 근데 이거 말고는 옷을 안 챙겼는데. 잠시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이라 씨?”

    “아, 다 갈아입었어요!”

    탈의실 밖에서 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하느라 갈아입었던 옷과 앞치마는 단정하게 걸어놨다. 모자 때문에 눌렸던 머리도 몇 번 손가락으로 슥슥 빗었다.

    “하하, 죄송해요.”

    “응? 아니에요.”

    오늘은 어린이날이라 일부러 이라를 일찍 퇴근시켰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린 아들이 있다는 걸 들으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 한창 예쁠 나이에 꾸미니까 더 예쁘네요. 데이트 잘하고 와요, 아들이랑.”

    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오늘 사람 많을 텐데…….”

    “괜찮아요. 힘들면 일찍 닫지 뭐. 나도 아들이랑 데이트하고 싶었는데, 어린이날 챙기기엔 내 아들은 너무 커.”

    수연은 아쉽다는 듯 코를 찡긋거렸다. 어서 가라고 등을 떠미는 바람에 제대로 마무리도 못 하고 얼떨결에 카페를 나와야 했다.

    어린이날 기념 행사가 있어서 원하는 아이들만 등원하는 날이었다. 일을 뺄 수 없는 이라는 어쩔 수 없이 은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이든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5시였다. 유치원에는 4시 반까지 은우를 데리러 간다고 얘기했고, 지금은 4시였다. 원래는 2시간은 더 뒤에 잡았던 일정이었는데 수연의 배려 덕분에 앞당길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마침 그에게 전화가 왔다.

    “응? 무슨 일이지.”

    혹시 일이 생겼나 싶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동시에 코앞으로 타야 할 버스가 쌩 지나갔다.

    “아!”

    -전화를 희한하게 받는군.

    이런. 지나간 버스 꽁무니를 아쉽게 바라보며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미안해요. 버스를 놓쳐서.”

    -버스?

    “이제 막 퇴근해서 은우 데리러 가려고요.”

    잠시 그가 대답이 없었다. 버스 노선을 확인하며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릴 때야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복직? 아니면 취직?

    “참, 말을 안 했네요. 복직은 아니고 어쨌든 돈은 벌어야 하니까 잠시 일 좀 구했어요.”

    -그래서 저녁에 보자 한 거였군.

    “이래저래, 은우 유치원도 있고요.”

    -전화하길 잘했네.

    의아한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요?”

    -데리러 가던 참이었어. 주소 알려줘.

    “그럴 필요 없어요. 만나기로 했던…….”

    -내가 차가 있는데 굳이 당신이랑 은우를 남의 차 태울 이유는 딱히 없지 않나.

    “…….”

    -어디야.

    반박할 말 대신 이라는 순순히 있는 곳을 불었다. 의외로 근처라며 그는 5분도 안 돼 버스 정류장 앞으로 그의 차가 도착했다.

    “진짜 일찍 왔네요.”

    조수석으로 올라타던 이라는 핸들을 붙잡은 채 씩 웃는 그의 모습에 멈칫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지만, 깊은 아이홀 밑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녹색 눈동자에 순간 숨을 확 들이켰다. 잘생긴 건 알고 있었는데, 왜 오늘따라 더…….

    “집이 가깝거든. 정말로.”

    “……아, 네.”

    “Seat belt…… 어, 안전벨트 해야지.”

    하필이면 영어 발음도 섹시하게 들릴 게 뭐람.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영어에 그가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라는 안전벨트를 끌며 힐끗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구불거렸던 고동색 머리카락은 반 정도 그의 이마를 가렸다. 자연스럽게 손질한 머리카락 밑으로 짙고 결 좋은 눈썹과 깊은 아이홀, 녹색 눈동자를 덮고 있는 긴 속눈썹까지 하나같이 정성껏 빚어 놓은 듯 이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잘생겼다. 그보다도 더 좋은 단어, 예를 들면……, 귀하다?

    “귀해…….”

    “응?”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은 말에 화들짝 놀랐다.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출발한 제이든은 피식 웃었다.

    “은우 유치원 길은 알아.”

    “아, 네네.”

    “대충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골라보긴 했는데 말이야. 영화 같은 건 시간이 아깝고, 볼거리로는…….”

    오늘 일정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귀하게 생길 수가 있지? 저 얼굴로 대체…….

    “……이라, 한이라.”

    “네?!”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침 신호를 받아 서 있던 건지 그는 아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던 그는 한쪽 입꼬리를 시원하게 피식 올렸다.

    “귀한 얼굴 구경하는 건 알겠지만, 혼자 떠드니까 심심하거든.”

    “뭐, 뭐, 무슨!”

    언제 들은 거야? 아니, 것보다 그걸 그렇게 바로 이해한다고? 황당해 바라보니,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하며 신호에 맞춰 출발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그래.”

    이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본인이 잘생긴 거 아주 잘 알고 있죠?”

    “응.”

    말을 말자. 곧장 포기한 이라는 고개를 휙 돌려 정면을 주시했다. 하긴 저렇게 생겼는데 잘생겼다는 말에 민망해하며 겸손한 태도가 더 웃기지.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웃어?”

    “우리 은우도 당신처럼 자존감 높았으면 좋겠네요. 겁도 좀 없었으면 하고.”

    “겁이 많나?”

    “음, 글쎄요.”

    지금보다는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젊은 나이에 낳아, 빨리 이혼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아이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시선을 받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씩씩했으면 좋겠는데, 당신처럼 당당하고.

    떠들다 보니까 유치원이 보였다. 어린이날이라 그런지 일찍 데리러 온 부모들이 꽤 있었다. 한편에 차를 주차했다. 이라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은우 데리고 올게요.”

    “차 조심해. 차가 많네.”

    “그럴게요.”

    씩 웃은 이라가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서 선생과 하원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이라가 차에서 내리자 몇몇 시선이 달라붙었다. 오가며 몇 번 얼굴을 본 엄마들이 알은체했다.

    “어머, 은우 엄마.”

    “아, 안녕하세요.”

    “은우도 오늘 일찍 데리러 왔나 봐요. 우리 해찬이도 오늘 일찍 하원 해. 어찌나 놀러 가자고 조르던지.”

    보통 이라보다 열 살은 많은 엄마들이었다. 초반에는 일찍 애를 낳은 이라의 기를 꺾으려고도 했고, 단체 연락망이나, 여러 모임도 주선했다. 그러나 바쁜 이라가 못 나가니 점점 그 기세도 시들어졌다.

    이라를 본 선생이 은우를 데리고 나온다며 들어갔다. 잠시 엄마들 사이에 뻘쭘하게 서 있는데, 아까 본 해찬 엄마가 이라가 온 방향을 힐끗 바라봤다. 주차된 차 중에서도 가장 좋은 차였지만, 그냥 차 자체도 억 소리 나는 고급 세단이었다.

    “은우 아빠, 는 아닐 테고…….”

    힐끗거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준 이라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선팅이 짙게 돼 있어 다행이었다. 괜히 제이든을 보면 유치원 내에서 또 소문이 이상하게 돌 게 뻔했으니까.

    “남자?”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이라를 쳐다봤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이혼한 사실은 모두가 암암리에 알고 있는 듯했다.

    “엄마!”

    말을 돌리려던 찰나에 은우가 활짝 웃으며 나왔다. 작은 유치원 가방을 메고 폴짝폴짝 뛰어오며 이라의 품에 폭 안겼다.

    “응, 은우야. 아, 여긴 해찬이네 어머니야. 인사드려야지.”

    “……해찬이? 안녕하세요.”

    갑자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하던 은우는 이라의 뒤쪽으로 슬금슬금 피했다. 그때 뒤에서 은우만 한 남자애가 뛰어나왔다.

    “엄마! 엄마!”

    “우리 아들!”

    이라는 은우 뒤로 나오던 해찬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남들 말로 은우는 곱상하게 생겼다면, 해찬은 개구진 그 나이대 남자애처럼 생겼다. 키는 은우가 더 컸어도, 덩치는 해찬이 더 다부졌다.

    “어?! 정은우 아줌마네?”

    “엄마, 가자.”

    은우가 이라의 손을 꼭 쥐었다. 아까부터 이상했지만,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인사하려 했을 때였다. 우렁찬 해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줌마, 아줌마 이혼했져?!”

    “……뭐?”

    “다들 그러던데? 그래서 정은우 어린이날에 엄마 아빠 다 안 온다고. 응? 엄마가 그랬잖아!”

    해찬의 우렁찬 소리에 아이 엄마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당황한 듯 아이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다급했다.

    “어, 어머. 얘가 엄마가 언제?”

    “아니, 맞잖아. 나는 아빠도 왔고, 엄마도 왔는데. 얘는 엄마만 있잖아.”

    이라의 흔들리는 시선이 휙 아래로 향했다. 다리 뒤에 꼭 붙어 있던 은우는 푹 고개를 숙인 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라의 손만 꾹 붙잡고 있었다.

    나 때문에 은우가. 그래서 아까부터 얼른 가자고…….

    “해찬아, 가자, 가자.”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몸을 돌리는 이들을 보며 이라가 고개를 휙 들었다. 분노로 이가 갈리고 속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럼에도 최대한 누르고 눌렀다.

    “해찬이 어머니.”

    “큼큼, 왜요?”

    “어린아이들 앞에서 말조심해 주세요. 일곱 살이면 알 거 다 알고, 아이들도 마음 다쳐요. 재미로 해찬이가 던진 말에, 우리 은우 맞아서 아파요.”

    여기까지만 하려고 했다. 사과만 받고 돌아서려고 했으나, 앞에 있던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변하며 버럭 소리쳤다.

    “뭐? 말조심?! 너 나 가르치니?!”

    “무슨…….”

    “새파랗게 어린 게 어디서 훈계질이야?”

    놀라 입이 벌어졌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 전에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고, 어머님들. 두 분 다 진정하시고…….”

    곁에 있던 유치원 선생이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여자는 얼굴이 시뻘게져 빽 소리쳤다.

    “네가 그러니까 네 새끼가 못 배워먹지! 애들한테 좋은 것만 보여줘도 모자란데!”

    “여보! 뭐야, 무슨 일이야?”

    뒤에 차에서 기다리던 여자의 남편이 나왔다. 분위기에 놀란 해찬이 제 아빠에게로 뛰어가고, 여자와 이라가 서로 노려봤다.

    “잠깐만요, 이게 무슨 상황이야? 여보.”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여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라를 내려다봤다. 뒤에 있던 은우가 놀라 더욱 움츠러들었다. 덜덜 작은 손이 떨렸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뒤를 돌아 아이를 안아주려던 순간, 잡고 있던 은우의 손 높이가 휙 올라갔다.

    “……형아.”

    동시에 뒤돈 이라는 자연스럽게 제이든 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 팔로는 가벼이 은우를 안은 채 다른 한 팔로는 이라를 품에 넣었다.

    홀로 여유롭게 웃는 그를 모두가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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