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카페는 사진으로 봤던 것처럼 깔끔하고 모던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으나 테이블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라는 문을 여는 수연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내부를 구경했다.
“아직 머신이나 이런 걸 다 꺼둬서 아쉽게도 오늘은 커피를 못 주겠네요.”
“아, 괜찮습니다.”
“여기 앉아요. 쿠키 같은 건 있을 텐데.”
카운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간 수연은 손에 이것저것 챙겨 나왔다. 대충 봤을 때 마흔 후반, 어쩌면 그보다도 더 젊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선이 여리고 살집이 없어 체구가 더 작아 보였다.
쿠키를 가지고 돌아온 수연은 이라의 앞에 앉으며 생긋 웃었다. 이력서로 본 사진보다 훨씬 예뻤다. 서른이라고 했는데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려 보이기도 했다. 수연은 쿠키와 함께 가져온 콜드브루 커피를 건넸다.
“이건 원액만 타면 되는 거라서…… 아, 경력 있으니 알고 있겠네요.”
“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수연은 예의 있게 받는 이라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경력이 없어도 이미 뽑고 싶은 태도였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강단 있는 눈도 마음에 들었다.
“난 이수연이에요. 알다시피 여기 사장이고, 지금 일하는 사람은 보다시피 없고요.”
아무리 바쁘지 않더라도 번화가에 있는 카페에 혼자 일하긴 쉽지 않아 보였다. 동그란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하하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오픈을 잘 안 했어요. 해도 가끔…… 앞으로는 자주 영업하려고요. 이런 개인 카페 해 본 적도 있어요?”
“네, 프랜차이즈랑 개인 카페도 다 해 봤습니다.”
“음, 좋네요. 머신이나 그라인더는 다 만질 줄 알겠고, 메뉴가 다양하지 않아서 디저트류는 할 필요 없고요. 청소는 마감할 때 여유롭게 해 주면 돼요. 영업을 잘 안 해서 손님도 그렇게 많진 않아요. 단골도 없고.”
설명을 해 주니 막상 듣고는 있는데 듣다 보니 이상했다. 그럼 굳이 영업하는 이유가 뭘까 싶었다. 돈 받고 일하는 입장에 굳이 생각해 보진 않아도 될 문제긴 하다만, 이 좋은 자리에 이 정도 크기면 그냥 술술 나가는 돈도 꽤 될 텐데.
이라는 힐끔 수연이 기분 나쁘지 않게 그녀를 바라봤다. 잘은 모르지만, 외모부터 그녀가 걸친 모든 게 고급스러워 보이긴 했다. 그러니까 카페는…….
“취미예요. 이런 말 민망하지만.”
“아.”
부자구나. 옅게 웃는 수연의 미소가 너무 예뻐서 이라는 따라 웃었다. 수연은 정말 민망한지 사족을 붙였다.
“아들이 외국에 사는데, 남편도 그렇고 그래서 이런 거라도 하면서 시간 보내라고. 하하, 민망하네요. 사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책임감 없게 운영한 거 아닌가 해서요. 아깝기도 하고. 저도 많이 나올 건데,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전적으로 웬만한 건 이라 씨 능력 안에서 해결하면 돼요. 빈 시간 있으면 개인적으로 써도 괜찮고요. 저도 딱히 터치하지 않을 거고요.”
이라의 눈이 아까보다 더 동그래졌다. 그러니까 지금 합격이란 소린가? 눈을 깜빡이자, 수연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사실 이라 입장에서는 흔히들 말하는 꿀알바였다. 터치 없고, 손님 없고, 여유롭고, 시급 세고. 심지어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반가워요. 잘 부탁해요.”
***
“아들이 있어요?”
“네, 일곱 살이에요.”
배시시 웃은 이라는 방금 막 뽑은 샷을 뜨거운 물이 담긴 머그잔에 부었다.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만들고선 수연에게 건넸다.
“귀엽겠다. 이라 씨 일하면 아이는 누가 봐요?”
“유치원에 가요. 아이 데려다주고 출근해서, 퇴근하고 데리고 오면 딱 시간이 맞거든요.”
“그렇구나, 일곱 살이면 엄청 어리네요…….”
이라는 별생각 없이 그렇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긴 해도 또래보다 성숙한 면이 있는 것도 같고. 은우의 생각으로 흐뭇하게 웃는데,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멍해 보이는 수연이 눈에 들어왔다.
수연이 갑자기 무척이나 씁쓸해 보였다. 어쩐지 상처가 가득한 눈으로 멍하니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보고 있었다. 이라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무언가 잘못 말을 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은 아들 하나이신가요? 아직 학생이겠어요.”
많이 줘도 수연은 사십 후반이었으니, 일찍 낳았다고 쳐도 대학생 전후가 아닐까 싶었다. 이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아들은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이라의 작은 한숨에 수연이 멍했던 시선을 고치며 부드럽게 웃었다.
“학생은요, 이라 씨 아들만 한 자식이 있고도 남을 나이예요. 왜 결혼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이라의 눈이 진심으로 놀라 커졌다. 수연은 따듯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잘 내렸다.
“일 중독인지, 여튼 그래요.”
“그런 아들을 두시기엔 사장님이 너무 젊으신데요?”
“음, 아이를 일찍 낳기도 했지만, 오십팔인걸요.”
이런. 이건 정말 의외다. 여전히 놀란 이라의 모습에 수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게 봐줘서 고마워요. 음, 생각해 보니까 이라 씨랑 비슷한 나이에 낳은 것 같네요.”
신기했다. 은우를 낳은 뒤로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럴까. 대부분 그때 동기나 친구들은 학생이었다. 물론 지금도 싱글인 사람들이 더 많았고.
문득 수연을 보니 제 미래가 궁금해졌다. 수연 정도의 나이가 됐을 땐, 은우가 결혼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컸다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아이의 성장한 모습이 설렘을 자극했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수연은 며칠 전 봤던 제이든이 떠올랐다. 그 초음파 사진. 그것만 생각하면 입이 썼다. 그렇게 오래 아파하는 게 결국은 다 제 잘못 같아서, 아니 나 때문이라서. 수연의 입이 느리게 달싹였다.
“어릴 때 트라우마는 더 오래가겠죠……?”
트라우마? 이라는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아까부터 수연이 멍해 보였다. 대화에 문제가 있나 싶어 갸우뚱거리는데, 수연은 혼잣말이었다는 듯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어, 손님 오시네요.”
마침 가게 문이 열리고 수연은 자리를 옮기며 이라에게서 멀어졌다. 멀뚱히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라는 서둘러 정신 차렸다.
“어서 오세요.”
***
“엄마!”
은우가 환하게 웃으며 이라에게 뛰어왔다. 아이의 손에는 여전히 커 보이는 밴드가 붙어 있었지만, 곧 있으면 실밥도 뽑고 일상으로 돌아올 터였다.
뛰어오는 은우를 품으로 가득 안으며 입술을 이리저리 쪽쪽 댔다.
“우리 아들 오늘도 잘했어? 오늘은 손 안 풀렸네. 잘했어, 잘했어.”
“응! 이거 봐, 나 카네이션도 만들었어!”
불쑥, 눈앞으로 붉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종이로 잘 접은 카네이션이 든 카드였다. 삐뚤빼뚤했지만 정성 가득해 보였다.
“……이거 엄마 거야?”
“응!”
은우의 작은 손에서 카드를 건네받은 이라는 멍하니 붉은 종이 카네이션을 바라봤다. 작년까지만 해도 평일, 주말할 것 없이 바쁘게 지낸 터라 은우가 만든 카네이션을 직접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엄마 꼭 주고 싶었어. 이것 봐, 여기 엄마 닮은 토끼랑 고양이도 있어!”
토끼를 닮았다는 건지, 고양이를 닮았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어떤 거라도 좋았다. 가슴이 벅차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작년의 어버이날이 떠올랐다.
이라에게는 초등학교 이후로 어버이날이란 게 없었다. 사실 어버이날을 포함한 무수한 기념일은 이라와 관련 없는 것들이었다. 함께 챙기며 웃고 떠들 가족이 없었고, 사정과 여건이 안 됐다. 그래서 아이를 낳은 이후로도 쭉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당연히 작년 어버이날의 이라는 한창 일하고 있었고, 그다음 날 새벽에 들어가니 울다 지쳐 잠든 은우를 봤다. 엄마를 꼭 줄 거라면서 한참 손에 쥐고 있던 카네이션은 눈물과 콧물에 범벅돼 아이의 손까지 붉게 물들였다. 그럼에도 잠든 은우는 그것을 놓지 않고 꼭 쥐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울어? 울어요?”
맑은 눈물방울이 툭 땅으로 떨어졌다. 당황한 이라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정말 미안하고 감동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아니야, 은우가 이거 엄마 줘서 너무 좋아서 그래.”
“울지 마, 이거 매일 줄 수 있어. 더 예쁘게 만들어 줄게, 엄마 울지 마.”
은우의 큰 눈망울이 울상으로 변했다. 이라의 눈물에 저도 속상한지 작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오늘이…….”
5월 8일이었던가. 번뜩, 눈이 커졌다. 그럼 어린이날이 지났나?
“오늘이……!”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동시에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4일이구나. 그러고 보니까 8일은 일요일이고, 6일은 유치원이 쉬는 날이고, 5일은 어린이날이니까 미리 어버이날을 챙긴 듯싶었다.
잠깐, 그럼 내일이 어린이날이잖아? 어쩐지 오늘따라 은우의 눈이 반짝반짝한 게…….
“엄마! 내일은 우리 제이든 형아 보면 안 돼?”
“어?”
갑자기 생각도 못 한 이름에 이라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은우는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었던 듯 맑게 웃으며 방방 뛰었다.
“형아랑 놀래! 형아가 또 온다고 했잖아, 응? 이제 안 와?”
아……, 그랬지. 그렇게 집 앞에서 헤어지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 연락을 못 했다. 사실 하고 싶었지만, 딱히 먼저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떡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손에 잡고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어?!”
먼저 글자를 본 아이가 활짝 웃었다. 이라는 액정에 뜬 발신자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귀신이야, 뭐야.
“여보세요?”
-어린이날이라길래. 은우에게 약속한 것도 있고.
뭐야, 뭔데. 대뜸 며칠 만에 전화한 제이든은 제가 할 말을 그가 해댔다. 잠시 당황해 대답이 없자,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미국엔 그런 날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 내일 볼 수 있을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