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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15화 (15/70)
  • 15화

    털썩. 책상 앞에 앉은 제이든은 피곤한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책이 빼곡하게 쌓여 있는 그의 서재는 늘 깨끗했다. 달에 한 번은 오려고 노력하는 그를 위해 수연이 마련한 장소였다.

    아직도 이라를 만난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우연이 반복된다는 것도 황당할 정도로 놀랐고. 그리고 십 년 만에 만난 그녀의 상황이 신경 쓰였다.

    “……은우.”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남자의 품에 있던 이라와 은우.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저는 가져본 적도, 가질 수도 없는.

    어두운 시선으로 그는 책상 위에 있던 지갑을 들었다. 때 타지 않은 고급스러운 지갑을 펼치자, 카드 몇 개와 현금이 보였다. 그리고 더 안쪽에, 늘 지갑이 바뀔 때마다 있는 사진 하나를 꺼내 들었다.

    툭. 지갑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그는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길고 수려한 손가락 사이로 들린 사진을 빤히 바라봤다. 검은 배경에 언뜻언뜻 뭉쳐 있는 것만 같은, 초음파 사진이었다.

    눈코입까지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그가 검지로 조심스럽게 만졌다. 꽉 말아쥔 주먹과 어렴풋이 웃는 것 같은 입매는 여전히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

    은우의 또래 정도 됐을까. 지켰다면, 그랬다면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나의 일과처럼 자리 잡은 습관에 그는 오늘도 마른 눈으로 사진을 봤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서재 밖으로 노크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제이든, 여기 있니? 방에 없어서.”

    수연이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로 보이는 책상 위치에 그에게 다가오려던 수연은 잠시 그의 손에 들린 사진을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걸어와 손에 들린 사진을 빼앗았다.

    그는 애초에 힘을 주지 않고 들고 있었는지 사진은 쉽게 수연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녀가 가져갔음에도 그는 별다른 저항도 없었다.

    “보지 말랬잖아. 제이든, 우리 아들.”

    메말랐던 그의 눈에 수연이 들어왔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힘없이 피식 웃었다.

    “안 주무셨어요.”

    “너도 안 잘 거 같아서. 이 밤에 왜 이러고 있어.”

    “……그냥.”

    그는 웃으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다부진 그의 체격이 어쩐지 그녀의 눈에는 어리고 여렸던 20대로 돌아간 것 같이 느껴졌다.

    “주무세요.”

    미소 지으며 그가 서재를 나갔다. 수연은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려고 아직도 이리 아파하는지.

    “널 어쩌면 좋니.”

    사진을 보는 그녀의 시선도 애틋해졌다. 아팠고 쓸쓸했다.

    ***

    -당분간 일할 곳 구했다고?

    “당분간일지는 모르죠. 지금은 좀 막막해서.”

    -어딘데?

    수화기 너머로 윤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라는 보고 있던 구직 사이트에 보이는 글자를 읽었다.

    “카페요.”

    -카페? 아, 너 취업하기 전에 카페 알바했었다고 했지.

    “네, 개인 카펜데 시급이 높아서 지원했어요.”

    -돈 더 주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늘 있다고, 한이라 네가 더 잘 알 거고. 은우는?

    “내가 데리고 있어요. 여기 카페 지원한 이유도 은우 유치원 등하원 시간 전후로 여유가 있어서예요. 선배, 나 이제 면접 때문에 나가야 해요.”

    -아, 그래. 조만간 보자, 연락할게.

    서둘러 일어나던 이라는 잠시 멈춰선 아직 끊기지 않은 휴대폰을 바라봤다. 나직하게 한숨을 흘리던 이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나 신경 써 줘서.”

    -야, 무슨. 당연히 너 복직하게 할 거니까, 내가 무슨 방법이라도 찾는다고 했잖아.

    “그니까 그런 거 고맙다고요. 오늘도 수고해요.”

    걱정하지 말라는 윤진의 말 몇 마디 뒤로 전화가 끊겼다. 끊긴 전화를 보던 이라는 잠시 지친 눈으로 시선을 떨궜다.

    “아니, 아니지.”

    휙휙 고개를 저었다. 지칠 시간이 어딨어. 곧장 작은 원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어디 가세요?”

    다 마신 커피잔을 들고 내려오던 제이든이 외출 준비를 마친 수연을 바라봤다. 수연은 제가 좋아하는 긴 카디건을 걸치고 단정하게 묶은 머리를 몇 번 더 만졌다.

    “카페, 같이 갈래?”

    내려오던 그를 본 가정부가 빈 잔을 받아들었다. 손이 빈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연을 바라봤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국에 홀로 있는 수연이 심심할까 카페를 하나 차려준 지 벌써 몇 년이 됐다. 정말 돈 벌 목적은 아니었고.

    수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카페는 나름 즐거웠지만, 매일 출근은 하지 않았다. 보증금이나 임대료 같은 건 걱정도 없었으니까, 적자나 흑자도 딱히 그녀의 고민거리는 아니었다.

    “알바생 뽑으려고. 안 그래도 너무 닫아놓은 것 같아서.”

    “매니저 있잖아요.”

    “관둔 지가 언젠데.”

    생긋 웃은 수연을 보던 제이든은 잠시 제 일정을 생각했다. 집에서 카페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일부러 오가기 편하게 가까운 곳에 건물을 샀기 때문이기도 하고. 수연 앞으로 건물을 한 채 사고, 일 층에 카페를 차려줬다.

    “모셔다드릴게요. 이따 화상 회의가 있어서 같이 있진 못해요.”

    “바쁘면 그냥 있어도 돼. 걸어가도 금방인데, 뭘.”

    “모셔다드리는 건 할 수 있어요.”

    그가 피식 웃으며 키를 가지러 올라갔다. 수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내려오길 기다리는데 가방 안에 넣어놨던 휴대폰이 지이잉, 울렸다. 의아한 눈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Robert. 로버트.

    발신인에 수연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언제 내려온 건지 제이든이 그녀의 옆에 서서 화면을 힐끔 봤다.

    “아버지네요.”

    “아, 깜짝…….”

    “또 안 받으시면 저한테 하실걸요.”

    그가 아직은 잠잠한 제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제발 좀 받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수연에게 잔뜩 줬다.

    큼큼, 괜히 딴짓하던 수연은 여전히 끊기질 않는 전화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뱉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기쁘군, 당신이 전화를 받아서.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의 유창한 한국어에 제이든은 슬쩍 눈썹을 올렸다. 그는 수연을 향해 바깥을 가리켰다.

    “먼저 차에 가 있을게요. 통화하고 오세요.”

    그가 성큼성큼 먼저 가버렸다.

    -제이디야?

    다들 제이든을 그런 애칭으로 불렀다. 엄마인 자신만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름을 불렀지만. 딱히 제이든이 그런 걸 신경 쓰는 눈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들을 때마다 그들과는 철저히 다른 세계에 산다는 걸 느꼈다.

    “한국에 왔거든요.”

    느릿하게 열리는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버트는 그런 수연의 반응에도 실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알고 있지. 궁금한 건 왜 아직도 거기 있는 건지야.

    “무슨 말이에요?”

    수연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거실 창으로는 그가 차고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 런칭을 앞두고 바쁘던데 말이야. 나흘 정도 있다가 올 거라 했지.

    “나흘…….”

    짧아도 일주일 정도는 늘 있어 주던 그였다. 물론 못 올 때도 많긴 했지만……. 말은 없어도 아쉬워하는 수연을 아는 것처럼 다정한 로버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나흘은 이미 지났으니, 제이디의 속은 모르겠어. 이번 기회에 함께 오는 건 어때? 물론 알다시피 강요는 아니야.

    “……다음에요.”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에 로버트는 옅은 웃음소리를 냈다.

    -최대한 휴가를 내야겠어. 이대론 당신 얼굴을 까먹기 직전이야.

    “저녁 시간이죠? 먹었어요?”

    -응. 당신은 점심이 지났을 테니, 제이디와 먹었나?

    일부로 말을 피하는 걸 알 텐데도 그는 모른 척 넘어갔다. 전화하는 시간만 봐도 늘 수연이 편한 시간대였다. 시차가 다른 그에게는 그것 또한 신경 쓰고 계산해야 할 문제였고.

    “응, 잔치국수 먹었어요.”

    -당신이 저번에 해 준 그거지. 멸치로 육수를 낸다 했었나? 맛있었어.

    “오늘은 카페에 가기로 했어요. 이제 출발해야 해요.”

    곧장 대답해 오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수연 혼자만 느끼는 짧은 어색한 시간 뒤로 로버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I love you.

    “…….”

    -Bye.

    잠깐의 텀을 두고 전화는 끊겼다. 어두운 시선으로 검은 화면을 바라보던 수연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

    밖으로 나오니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제이든이 보였다. 차에 올라타자, 그는 익숙하게 출발하며 물었다.

    “통화는 잘하셨어요?”

    “……응, 뭐.”

    “아버지 한국어 나날이 느시죠. 저번에 사무실 가서 보니까 여전히 공부하고 계시더라고요.”

    수연이 아니면 로버트도 제이든도 한국어를 쓸 일이 없으니 잊지 않으려면 둘 다 늘 공부해야 했다. 그나마 제이든은 이래저래 쓸 일이 생긴다지만, 로버트는 아니었으니까.

    흐린 미소만 지은 채 더는 말을 잇지 않는 수연을 보고선 제이든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가족의 형태, 그게 무엇인지 그는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알 기회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서로 다가가지 않으니 형태는 허물어지고 있었으니까.

    어렴풋이 이라와 은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남자, 정지강이라고 했던가. 그들의 형태는 허물어지는 중인 건지, 다시 만들어져 가는 중인 건지.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갈 땐 걸을 겸 혼자 갈게. 괜히 나오지 마.”

    카페 앞에 도착하자 수연은 내리며 말했다. 그는 봐서요, 라며 피식 웃고 말았다. 힐끗 오랜만에 보는 카페를 봤다. 60평가량의 카페는 조명도 꺼둬서 어두웠다.

    “어머, 왔나 보네.”

    수연이 카페 입구를 보며 말하자, 제이든은 수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요.”

    “응. 운전 조심하고.”

    차가 출발하고 수연은 입구로 걸었다. 마침 서서 기다리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연이 방긋 웃었다.

    “한이라 씨?”

    이라는 저를 아는 목소리에 서둘러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면접 보러 오라고 연락해 주신 한이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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