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정지강이 여길 왜. 생각도 못 한 그의 등장에 이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은우가 한 말이 이상해서 대화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만날 줄이야.
“아.”
이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미 말리기도 전에 제이든과 지강의 시선이 부딪혔다. 지강도 어디 가서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 제이든과 함께 있으니 확연히 작아 보였다.
지강을 잠시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제이든은 시선을 돌려 이라를 바라봤다. 이라와 은우의 표정이 좋지 못한 걸 봐서는 그들과 관련된 남자인 건 알겠다. 뭐, 굳이 더 생각해 보자면 아이의 아빠이자, 그녀의 전남편 정도 되려나.
제이든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두 남자 사이에 낀 이라는 서둘러 은우를 챙겼다.
“오늘 고마웠…….”
“누구야?”
이라의 말을 끊은 건 지강이었다. 지강은 이라와 은우에게 가까이 다가와 경계 가득한 눈으로 제이든을 바라봤다.
동양에선 이라와 은우의 뒤에 있는 저 남자가 어떨지 몰라도, 제이든이 살던 곳에서는 왜소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저 작아 보이는 몸이 두 사람을 감싸듯 가까이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거북했다.
“신경 쓸 거 없어. 대체 왜 왔어? 연락도 없이.”
“연락을 안 받은 건 너잖아. 우리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은우도 그렇고…….”
뒷말을 흐린 지강은 차를 중심으로 건너편에 서 있는 제이든을 바라봤다. 이라는 한숨을 내쉬며 은우의 손을 잡고는 보닛을 돌았다.
제 앞으로 온 이라를 제이든이 내려다봤다. 그의 큰 키에 묻힌 이라는 지강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했겠지만, 은우 친아빠예요.”
지강에게 설명은 안 하더라도, 제이든에게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실제로 만날 거라 생각도 못 하고 오늘 지강에 대해 다 얘기했던 참이었다. 지강에겐 제이든과의 추억을 단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지만. 이라의 말에 제이든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여.”
“오늘 고마웠어요.”
아까 다 못한 말을 했다. 그에게는 늘 고마운 것들만 가득하니까.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심히 가라며 말을 꺼내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은우가 작은 손을 펴 제이든의 긴 손가락 하나를 꽉 잡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이라에게서 더 내려가 아이에게 향했다. 은우는 흔들리는 눈으로 고개를 한참이나 꺾어 제이든을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작은 손에는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형아…….”
차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조잘조잘 잘 떠들기만 하던 아이가 갑자기 위축된 게 이상했다. 이유는 굳이 찾지 않아도 저 건너에 있는 남자 때문이란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아이 아빠라고 하지 않았나.
“응.”
제이든은 저를 잡은 아이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무릎을 굽혔다. 높은 곳에 있던 그가 훅 내려오자 아이의 고개도 편안하게 돌아왔다.
“……가면 언제 와요?”
불안한 듯 낮아진 목소리에 이라는 휙 고개를 돌려 지강을 바라봤다. 상황을 묻기도 전에 화부터 났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은우가 이러는 건지 꼭 따져 물어야 했다.
“금방 올게.”
낮고 단정한 제이든의 목소리에 이라가 놀란 듯 그를 내려다봤다. 아이에게 시선을 맞춘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은우는 아까처럼 밝게 미소 지었다.
“오늘 은우가 준 쿠키가 너무 맛있어서 금방 은우 보러 또 와야겠어.”
“진짜?”
“응, 진짜.”
“와!”
해맑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이라가 어렴풋이 따라 웃을 때였다. 건너편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지강이 성큼성큼 차를 돌아와 은우를 채 가듯 번쩍 안아 올렸다.
몸이 순간 붕 뜨자 놀란 은우가 소리도 못 내고 굳었다. 돌발적인 행동에 이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휙 지강을 바라봤다. 주저앉아 있던 제이든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족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가주셔야겠습니다.”
“야, 정지강!”
무례한 발언에 이라가 놀라 지강을 쳐다봤다. 그런데도 지강은 제이든만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이든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은우의 머리를 두어 번 더 쓰다듬었다. 놀란 아이의 표정이 덕분에 조금 풀렸다. 그는 이라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그의 말에 지강의 얼굴이 왁 일그러졌다.
“이봐요, 그게 지금 무슨……!”
“그만해.”
인상을 팍 찌푸린 이라가 지강을 말렸다. 서둘러 제이든을 향해 보자, 그는 괜찮다는 듯 피식 웃었다.
“미안해요. 바쁜 사람 붙잡고, 늦었는데 조심히 들어가요.”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 올랐다. 지강은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이라를 봤지만, 그녀의 시선은 차가 떠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너 왜 왔어?”
제이든의 차가 사라지고 나서야 이라가 지강을 제대로 바라봤다.
“누군 줄 알고 이렇게 예의 없이 대해? 그리고 뭐? 가족?”
은우 앞이어서 참고 또 참았다. 이라는 손을 뻗어 지강의 품에 안긴 은우를 데리고 왔다.
“너, 여기서 기다려.”
“뭐? 한이라!”
지강을 뒤로 하고 이라는 서둘러 집으로 걸었다. 숨이 차는 걸 무시하고 들어가 은우를 원룸 안에 내렸다. 아이가 눈썹을 시옷으로 모으며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빠랑 엄마 얘기하고 올게. 은우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지?”
“……아빠도 와?”
잠시 표정이 굳었던 이라는 고개를 저으며 상체를 숙였다.
“오늘은 엄마랑 있을 거야.”
“진짜?”
“응.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려 줘?”
생긋 웃어주니 그제야 은우의 표정이 풀렸다.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밖으로 나갔다. 1층으로 내려가니 지강은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나오는 이라를 본 건지 지강은 대뜸 다시 얼굴을 구겼다.
“너 아까 그 남자 뭐야?”
어이가 없어서 이제는 대화하는 것도 지쳤다. 이라는 매캐한 담배 연기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기침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말했다.
“은우 나을 때까지 내가 데리고 있을 거야.”
“무슨…… 엄마 노발대발하시는 거 듣고 싶어?”
“그리고.”
지강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다.
“이혼하면서 했던 말 지켜.”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속에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이혼을 왜 해줬는데, 내가 은우 양육권을 왜 줬는데! 나보다는 네가 더 부모 노릇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말 때문이었어. 결혼도 이혼도 다 너 사랑해서 한 거 아닌 거, 당사자인 네가 더 잘 알잖아.”
분노 섞인 이라의 말에 지강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알고는 있었으나, 직접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라에게 반했고, 사랑했고 그래서 원했다. 아이는 그녀에게 가는 수단이었고, 때때론 우리가 하나였다는 증거였다.
지강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엄마의 성화도 있었지만, 이혼은 최후의 카드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라를 옆에 둘 수 있을 거란 착각의 카드. 그리고 그녀는 그의 옆자리에는 미련이 없다는 듯 돌아섰다.
“알지, 내가 그걸 어떻게 몰라.”
“내가 말했잖아. 남편 노릇 됐으니까, 아빠 노릇이나 제대로 해 달라고.”
하. 지강의 입에서 한숨과도 같은 숨이 터져 나왔다. 이라를 보려면 은우는 제게 있어야 했다. 뜨거웠던 감정은 사라지고, 매달렸던 그때의 기억만 남았을지라도 이라는 지강에게 있어 평생 지우지 못할 여자였다.
타들어 간 담뱃재가 툭 떨어졌다. 지강이 나지막이 입을 달싹였다.
“이라 너, 내가 왜 이혼하자 한 줄은 알아?”
이라가 멈칫했다. 찌푸린 미간 밑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지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 이혼한 지 반년은 됐나? 난 이혼하고 나서야 너랑 이렇게 마주해.”
“……그게 지금 무슨 소린데.”
“소리 없이 아침에 들어와서 은우 얼굴만 보고 나가고,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집에 없었으니까.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거? 그래, 맞아. 그게 이혼 사유이기도 했지만, 나 좀 봐 달라는 거였어. 내 사랑에 한 번을 대답하지 않은 네가 미워서, 후회하라고.”
“너…….”
이라가 설마, 하는 눈으로 지강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그는 부정할 생각도 없다는 듯 말했다.
“은우가 네 전부잖아.”
“그래서, 그래서 양육권 고집했던 거야? 정지강,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알아?”
분노로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혼도, 나한테서 은우를 빼앗아 간 것도 전부…….
“네 감정에 장단 맞춰주지 않아서라고……? 너 그거 알아? 나 임신하고서부터 단 하루도 편히 쉰 적이 없어. 매일 집에 없었다고? 퇴근하고 조금 쉬려고만 해도 난리 치던 네 엄마는 기억 안 나? 사랑이라니. 내가 널 만나고 사랑할 시간이 어딨었어.”
“하.”
헛웃음을 내뱉은 지강은 그나마 남아 있던 담배를 땅으로 떨궜다. 떨어진 꽁초를 치이익, 지져 밟던 그가 고개를 들어 이라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나랑 이혼하니까 사랑할 시간이 생겼어?”
“뭐……?”
“아까 그 새끼 누구야. 나 너랑 9년을 알았어. 너한테 남자 없는 거 뻔히 아는데, 그것도 외국인? 고작 반년이야, 한이라.”
이렇게 들으니 다시 실감이 났다. 9년, 그래. 제이든을 만나고 9년을 넘게 버텼구나, 이런 자식 옆에서.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선을 들어 지강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넌 남자로서도 아빠로서도 최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