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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12화 (12/70)
  • 12화

    “음, 예상외네요. 했을 것 같았는데.”

    그의 눈빛을 보고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이었다. 이라의 말에 잠깐 시선을 든 그가 피식 웃었다.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렇죠. 중요한 게 아닌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씁쓸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그가 물었다.

    “가끔 궁금했어. 그렇게 사라진 여자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

    방금 했던 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알고 있다. 과거형인걸. 그도 당시에 자신과 꽤 비슷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 곱씹을 필요는 없었다. 이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당신 생각은 꽤 많이 났어요.”

    그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예상 못 했는지 그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당신이 사줬던 그것들이 얼마나 비싼 건지 제대로 알았거든요.”

    이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내 생활이 많이 편해졌어요.”

    “팔았다는 소리로 들리네.”

    “맞아요. 난 현실로 돌아왔잖아요.”

    빙긋 웃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했다. 당장 있는 거라고는 배낭에 든 짐과 그가 사준 것들이었다. 어쩌다가 그가 사준 것들을 잡지에서 보게 됐는데, 그 값어치를 알고 난 뒤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행이네. 쓸모가 있었다니까.”

    “쓸모뿐만이 아니었어요.”

    이라가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때 당신이 준 물건이 없었으면, 난 정말 더는 살길이 없었거든요.”

    당장 전세를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구할 수조차 없던 것들은 새 상품이 아니었음에도 값비싸게 팔렸다.

    “꼭 다시 말해주고 싶었어요. 고맙다고. 살면서 당신을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요.”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이라를 보며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가 그녀에게 사준 물건이었으니 버리든 팔든 그건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당시의 그녀에게 도움이 됐다니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그럼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그의 말에 이라가 눈을 마주쳤다. 식사는 거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요.”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이 아니라고 했잖아.”

    질문의 의도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은우가 생겼거든요.”

    어쩌면 첫 남자가 그이기 때문에 환상을 가졌는지도 몰랐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 해에 대학교에 갔어요.”

    스물한 살. 제이든을 만났을 때보다는 한 살 더 많았지만, 그때의 이라 역시 세상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대학교를 처음 들어가니까 모든 게 다 신기한 거예요. 미국에서 오고 난 뒤로 죽어라 돈만 벌었거든요. 그래서 자유로운 대학생들을 보니까 저도 모르게 설렜었나 봐요.”

    신입생으로 들어갔던 날,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를 챙겨준 건 지강이었다. 재수와 군 휴학을 마친 스물다섯 살의 그는 당시 대학교 3학년으로 그녀의 선배였다.

    남자라곤 그녀의 인생에 짧게 스쳐 지나갔던 제이든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지강도 그와 비슷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몰랐다. 아주 다정하고, 좋은 사람일 거라고.

    일 년을 넘게 지강은 귀찮아질 정도로 쫓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그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학교 선배였고,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었고, 어쩌면 곁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라에게 유일한 내 편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은우를 가진 걸 알았어요. 남편은 과 선배였는데, 졸업만 남겨둔 상태였거든요.”

    세상이 무서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지 않는 생리 날짜를 세어가며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고, 시험 기간엔 밤을 지새우는 건 기본이었다. 그래서 원래도 생리가 규칙적인 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방법 따윈 없었지만, 뭘 할 수 있을 만큼의 선택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너무 늦게 알았거든요. 아이를 가진걸요.”

    이라는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빨리 알았다고 하더라도 변하진 않았을 거예요.”

    “……무섭진 않았어?”

    “매일 울었어요.”

    그의 미간이 진지하게 구겨졌다. 담담하게 말하지만, 사실 그때의 그녀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지강이 이라를 오래 쫓아다닌 건 맞았지만, 사귀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관계에서, 하룻밤의 실수였다. 거절할 수 없는 그 밤의 실수가 그녀에겐 너무나 커다란 책임감으로 돌아왔다.

    임신 사실을 알리고 나니 지강에겐 그 뒤로 며칠간 연락이 뚝 끊겼다. 그때 이라는 정말 죽고 싶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연락이 온 건 며칠 후였어요. 책임진다고 결혼하자고 하더라고요.”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었다. 오히려 학자금 대출이다 뭐다 빚만 잔뜩인 이라를 시댁에서 반길 리가 없었다. 배가 부르기 시작하는 이라는 그저 짐 덩이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밖엔 없었다.

    잠시 오래전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때 당시 느꼈던 두려움이 이제는 아주 많이 흐려졌지만, 지금도 잊을 순 없었다. 물어보는 그에게 자세히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마주친 저 녹색 눈동자에 깃든 슬픔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과거를 들춰내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배가 나왔을 때도 학교에 갔다. 그 찡그린 시선들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효자였던 건지, 예정일이 방학이었고 은우는 예정일에 딱 맞춰 태어났어요. 아이를 보니까 더 쉴 수가 없겠더라고요.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그래서 갓난아이를 시부모님께 맡기고서 악착같이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취업했다. 그 와중에도 성적을 유지했고, 미친 듯한 경쟁률을 뚫고 방송국에 입사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번 돈은 온전히 아이를 돌봐주시는 시부모님과 남편에게 향했다. 먼저 졸업한 남편은 취준생으로만 몇 년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뒤늦게 시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그 집에서 이라는 죄인이었고, 짐이었다.

    “방송국이라는 게 그래요. 원래 내 시간 없이 일하고, 열정도 있어야 하고, 몸도 정신도 많이 망가지고. 근데 또 이 길로만 가야 했어요. 당장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내가 여유롭지 못했어요. 그냥 할 수 있는 거라곤 악착같이 버티는 거였어요.”

    그랬는데……. 그렇게 열심히 살았었는데…….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대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매일 이른 아침에 들어와 잠든 아이의 얼굴만 바라보다 다시 출근하길 반복했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은 한 푼도 빼지 않고 전부 시어머니 손에 넘어갔다. 어떤 폭언을 들어도, 폭력을 당해도 이라는 그저 참았다. 은우 때문에 바보같이 참고만 살았다. 아이를 속수무책으로 빼앗길 것도 모르고.

    뒷이야기는 의미가 없었다. 근래 일어났던 모든 일이 비현실적이고 억울했지만, 그걸 털어놓을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이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더 열심히 살았어야 했나 봐요. 그랬으면 어제처럼 은우가 혼자 나와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당신은 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이라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왜 이 남자는 또 이렇게 내게 다정할까. 그가 해 준 다정한 말 몇 마디로 살아갔지만, 그 몇 마디의 미련이 얼마나 컸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건 위로였고 응원이었지만, 아주 강력한 독이었다.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당신한테 인사는 하고 가야겠어요.”

    “했는데 내가 못 들은 거라며?”

    “속으로는 했죠.”

    어깨를 으쓱이며 뻔뻔하게 웃는 이라였다. 제이든은 피식 웃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저쪽이야.”

    화장실로 가는 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제 건 잠잠한 걸 보아선, 그녀의 것인 듯싶었다.

    “이만 갈까요?”

    맞춰 나온 이라가 웃으며 물었다. 그는 여전히 울리는 휴대폰을 가리켰다.

    “당신 거 같은데.”

    “아, 잠시만요.”

    가방 속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은우의 유치원이었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네, 은우 어머님. 오늘 은우 하원은 어디로 하면 될까요? 아침에 들은 것 같은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은우 손은 괜찮나요?”

    -말렸는데도 굳이 쿠키를 만들어야겠다고 해서요. 붕대에 반죽이 좀 묻어서 새 걸로 갈긴 했는데, 아무래도 병원 다시 가야겠죠?

    아. 곤란함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늘 아침에 다녀왔는데, 또 병원에 가야 했다. 아침만 해도 택시비에 병원비에, 지금은……. 그를 힐끔 바라봤다.

    “네, 선생님. 우선 제가 은우 곧 데리러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전화를 끊은 이라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그 역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일어섰다.

    “어디로 가지? 데려다줄게.”

    당연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이 데리러 가는 거잖아. 태워다줄게.”

    “안 그래도…….”

    거절하려는 이라를 보고 그가 낮게 피식 웃었다.

    “아이 괜찮나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래.”

    “정말 고마운데요, 이러면 내가 또 부담되잖아요.”

    “또 밥 사달라고 할까 봐?”

    그가 큭큭 웃으며 문으로 향했다. 이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둘러 가방을 들고 따라나섰다.

    “정확히는 당신이 사달라곤 안 했죠. 내가 사준다고 한 거지.”

    함께 입구로 향하니 직원들이 웃으며 다가왔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아, 잠시만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나가려는 제이든을 보고 이라가 서둘러 가방을 열었다. 그런 이라를 보며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계산은 미리 하셨습니다.”

    멈칫. 지갑을 꺼내던 이라가 놀라 휙 제이든을 바라봤다. 그는 다른 직원에게 차 키를 건네받고 있었다.

    “어, 언제요?”

    “식사 주문하시면서 하셨습니다.”

    직원들이 고개를 숙여 가는 길을 배웅하자, 이라는 놀란 얼굴로 빠르게 그에게 향했다. 키를 받은 그가 먼저 음식점을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간 이라가 미간을 구기며 그를 바라봤다.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인상 좀 풀지? 밥 사준 사람한테.”

    “그러니까요. 왜 당신이 사요? 내가 오늘 사주려고 한 건데.”

    “다음에 사.”

    그의 말에 이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음이라고?

    “왜 굳이…….”

    “글쎄, 얻어먹기로 하고 멋대로 주문하는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 안 했거든요.”

    “누가 계산한 게 뭐가 중요해?”

    “나한테는 중요해요.”

    미간을 찌푸렸다. 돈 한 푼 없어 당장 쩔쩔매더라도, 그에게는 좋은 걸 대접하고 싶었다. 은인이었으니까. 고마운 사람이니까.

    “나한테도 좀 보답할 기회를 줘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니까 완전 고양이 같았다. 나름 진지하게 얘기하는 이라 앞에서 생각나는 게 고양이라니.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우선 가지. 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데.”

    그가 힐끔 음식점 안을 바라봤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아직 직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이라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자, 그는 웃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먼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보던 이라는 하아, 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멋대로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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