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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11화 (11/70)
  • 11화

    “응, 괜찮아요. 어제 연락했어야 했는데, 선배도 많이 놀랐죠?”

    -까무러칠 뻔했지. 어휴, 그래도 은우 많이 안 다쳤다니까 다행이다. 어쩌다 그런 거래?

    “놀이터에서 놀다가 찢어졌나 봐요.”

    -아니, 정지강 그 새끼는 대체 애를 어떻게 보길래…….

    윤진과 통화하던 이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휴대폰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죠. 나라도 연락됐으니까.”

    -그래서 은우는 어디 있어? 오늘도 너희 집에서 자? 오늘 시간 되면 내가 저녁이라도 사줄게.

    “병원 갔다가 유치원 갔어요. 저녁은 내가 사야죠. 오늘은 선약이 있고, 조만간 선배 편한 날에 연락해줘요.”

    -한이라가 웬 선약? 여튼, 알겠어. 연락할게.

    “네. 수고해요, 선배.”

    뚝. 전화를 끊은 이라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아침에 은우를 데리고 병원에 간 뒤,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그에게 연락했다. 여러 가지로 고마운 게 많으니 다른 건 못 해도 밥은 사야 할 것 같았다.

    “촬영할 때 와보긴 했는데…….”

    이라는 높은 건물을 고개를 꺾으며 바라봤다. 바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밥을 산다고 연락을 하니 그는 당일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다.

    “뭐, 실업자인 내가 걱정할 거린 아니지.”

    피식 허탈하게 웃었다. 어제 정신없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오늘부터 제대로 된 실업자였다. 조금 이른 저녁이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식사 후에 은우를 데리러 가면 딱 됐다.

    그가 정한 식사 장소는 호텔에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예전에 촬영 때문에 와 보긴 했어도, 직접 식사하러 오는 건 처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자 성함 말씀해 주시면,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괜히 주춤거리게 됐다. 하긴, 예전에 촬영할 때 가격을 본 적이 있었는데 무지 비싼 곳이었다. 그만큼 직원의 친절도도 높았고, 가격만큼 굉장히 프라이빗한 곳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해 뒀다는 문자를 생각해낸 이라가 제 이름을 말했다.

    “한이라예요.”

    “잠시만요.”

    서둘러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던 여자는 아까보다 더 친절하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간 이라는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테이블이 가득한 곳을 넘어서 더 안쪽 룸이 있는 곳까지 들어왔다.

    “식사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가는 직원의 말에 이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주문도 안 받나? 황당한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문을 달칵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널찍한 테이블이 보였고, 전체적으로 고급진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따로 화장실까지 마련된 곳은 좋은 가정집 같은 분위기도 났고, 통창으로 보이는 빌딩 숲은 더 신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이든이 보였다. 그는 먼저 도착해 있던 건지 창가에 서서 통화 중이었다. 아직 그녀가 들어온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별거 아니에요. 지금 한국에 있어요.]

    통화하던 그가 고개를 돌리다 막 들어온 이라를 발견했다. 잠깐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품었다.

    [약속이 있어서요. 이만 끊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그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의자를 뺐다.

    “앉아.”

    “아, 네.”

    의자까지 빼 준 그는 이라가 앉는 걸 확인한 뒤, 그 앞에 자리했다.

    “안 바쁜 줄 알았는데, 바빠 보이네요?”

    그녀의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아버지야.”

    “아.”

    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한국인이라 했었지. 문득 어제 들은 그의 이름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머니께서 성이 이 씨이신가요?”

    “맞아. 어머니 성이 미들 네임이야.”

    그는 혼자 온 이라를 보더니 물었다.

    “아이는?”

    “유치원에 갔죠.”

    “아아, 유치원.”

    “아, 맞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이라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뒤적였다. 어제 그가 은우에게 감싸줬던 손수건을 빨아 왔다. 아무래도 비싼 거 같아 신경이 쓰였다.

    “여기요.”

    손수건을 건네자, 그가 제 것임을 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이는 괜찮아?”

    “네, 씩씩하게 유치원에 가더라고요. 안 가도 된다니까 오늘 쿠키를 만든다나 뭐라나.”

    귀여운 은우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렸다. 다친 손으로 뭘 만들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유치원 선생님에게 잘 말했으니 별 탈은 없을 거였다.

    “쿠키 좋지.”

    “쿠키 좋아해요?”

    “아니.”

    이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여튼, 이제야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게 됐네요.”

    “잘 찾아왔네.”

    “예전에 촬영할 때 와본 적 있거든요. 여기서 밥을 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촬영?”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라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방송국 다녔거든요. 아, 지금은 잘렸어요.”

    그가 놀란 듯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당신 인생은 항상 스펙터클하네.”

    “그런가요? 뭐,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까. 곧장 잘렸으면 멘탈 회복하기에 급급했을 텐데, 3개월 정직 후에 잘리니까 뭐 나름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도 같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물이 담긴 와인잔을 들었다.

    “고기나 해물 종류 잘 먹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잘 먹나?”

    “음식 안 가리고 다 좋아해요.”

    “그럴 것 같아서 내가 미리 시켰어.”

    “어쩐지 여긴 주문도 안 받고 음식 준비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을 한 모금 머금은 그는 이라를 빤히 바라봤다. 어제 정신이 없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그녀를 제대로 보니 어제보다 더 신기했다.

    “아이가 당신을 많이 닮았더라.”

    이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은우와 함께 다니면 많이 듣는 소리였다. 예전에는 이렇게 아빠를 안 닮을 수도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제는 저를 더 닮은 게 좋았다.

    “성격도 비슷해요.”

    “잘 우나?”

    “이봐요. 나 원래 잘 안 울어요.”

    이라가 눈을 흘기며 바라보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과 첫 만남이 펑펑 울던 거라 잘 모르겠네.”

    그때 당시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울긴 했다. 뭐가 그리 서러웠던 건지, 많이 울었지.

    “남 앞에서 그렇게 운 건 처음이에요. 그 뒤로도 그렇게 울어본 적 없고요.”

    피식 웃은 이라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테이블 위로 턱을 괬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때 왜 인사도 없이 갔지?”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눈이 추억에 잠겼다. 새벽빛이 어슴푸레 들던 그 호텔 방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따듯하고 단단한 품 안에서 잠에서 깬 자신은 저도 모르게 뚝뚝 눈물을 흘렸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긴가민가했던 감정을 그때 제대로 깨달았다. 나 이 남자한테 한눈에 반했구나. 근데 마음을 깨닫는 순간 슬프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어느 여자라도 한눈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곧장 그 품을 벗어나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 그 눈동자를 다시 마주하면, 울며불며 매달릴까 봐. 그래서 결국 그 눈동자가 차가워질까 봐.

    추억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추억으로. 삶의 원동력으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던 이라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 속 그때처럼 그는 멋있었다. 아니, 훨씬 더 멋있어졌다. 어쩐지 왜 인사도 없이 갔냐는 그의 말에 아쉬움이 깃든 것 같아 좋았다.

    이라가 옅게 웃었다.

    “인사했어요. 당신이 자느라 못 들은 거지.”

    그가 황당하다는 듯 하,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도 못 한 대답이네.”

    “그간 잘 살았어요? 뭐, 당연히 잘 살았을 것 같긴 하지만요.”

    “보다시피.”

    어깨를 으쓱이는 그를 보며 이라는 그저 미소로 대신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도망치듯 갔어야만 했는지, 그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또 스쳐 지나갈 남자이고, 또 좋은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준비됐다. 먹음직스러운 것들이 세팅되는데, 이라의 눈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그가 말했다.

    “아이도 함께 오는 줄 알아서.”

    아이용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그녀는 생각도 못 한 그의 배려에 잠깐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아깝네요. 맛있어 보이는데. 당신이라도 맛있게 먹어요.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그는 그저 피식 웃었다. 사실은 이렇게까지 비싼 음식을 생각하진 못했지만, 그에게 대접하는 거라면 빚을 내서라도 사야 했다. 그는 여러 가지로 항상 도움을 준 사람이니까.

    앞에 나온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던 이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어쩐지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어 그런지 무표정한 그는 조금 낯설었다. 누가 봐도 그는 다정함보다는 매서움이 더 걸맞은 남자였다.

    지금 보면 그때 자신이 왜 이 남자를 그렇게 의지했는지 몰랐다. 타지에서 말이 통한다고 선뜻 손을 뻗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신기해요.”

    이라의 말에 그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스테이크를 썰며 낮게 웃었다.

    “왜 내가 그때 당신한테 재워달라고 했을까요? 당신은 그런 날 또 왜 재워주고, 도와줬을까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잊을 수가 없는 특별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우린 왜 매번 황당한 사건 속에서 만나는 걸까요?”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바라봤다. 재워주고, 도와주고, 호의를 표하고. 왜 그랬는지 저도 이해를 못 했다. 그냥 그땐 그러고 싶었다. 뭐, 정확히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가능했다.

    제이든은 스테이크를 씹는 이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

    이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나답지 않은 행동을 했어.”

    “문득 궁금한 게 있어요.”

    그가 말하라는 듯 이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앞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셔 입안을 비웠다.

    “결혼했어요?”

    다른 의도가 있는 질문이 아님을 그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저 궁금했다. 여섯 살 차이가 나는 그는 그때엔 젊었지만,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서른여섯인 지금은 충분히 가정이 있을 수 있는 남자였다.

    그는 점심에 수연과 함께 봤던 단란한 세 가족이 떠올랐다. 사실은 그건 제 미래였다. 자신이 현재 간절히 원하는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라는 지켰고, 자신은 지키지 못했으니.

    “아니.”

    시선을 내려 식사하는 그의 눈빛에서 아주 잠깐의 슬픔을 봤다. 금세 없어졌지만, 그건 옅어서가 아니라 아주 오래 품고 있어 스며든 것 같았다. 첫 만남 때는 없었던, 그의 녹안에 배인 그 깊은 슬픔에 그녀는 왜냐고 되물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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