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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10화 (10/70)

10화

눈을 떴을 때 없어진 그녀를 확인하고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잠깐 나간 건 아닐까, 뭐라도 남겨두지 않았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찾아다녔다. 그날 공항에서 몇 시간을 작은 여자를 찾아 헤맸는지 몰랐다.

제이든은 십 년 만에 나타난 이라를 코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물론 십 년 동안 그리워한 건 아니었다. 하루 만난 인연을 그 정도로 그리워할 만큼 그는 미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내가 당신을 꽤 오래 찾았거든.”

제이든의 말에 이라의 입이 놀라 벌어졌다. 날 찾았다고……? 왜?

“나를요?”

“정말 신데렐라처럼 사라질 줄 몰라서.”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만남이 너무 황당하지만, 그땐 더 황당했어.”

“어, 그게, 난…….”

당혹스러워하는 이라를 보며 그가 아무렴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은 많이 흘렀다.

“가끔 궁금했어. 유리구두 없는 신데렐라가.”

그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에서 잊고 있었는데, 분명 그에게 신데렐라 소리를 한 건 자신이었다. 이걸 아직까지 기억하다니.

“나도 궁금했어요. 하루 새 많은 걸 했지만, 정작 우린 서로에 대해 몰랐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밥은 사는 거로 해.”

그가 씨익 웃었다. 이라는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

그가 익숙한 주택 대문을 지나쳐 들어갔다. 꽤 자주 온 것 같았지만, 올 때마다 이곳 마당은 항상 색다르게 변했다.

“제이든.”

곧장 현관으로 향하려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마당에 잔뜩 핀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수연이 보였다. 따듯한 날씨에도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를 입고 어깨에 스카프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물뿌리개를 내려두며 그를 바라봤다.

“너, 대체……. 어제 온다고 했으면서 온다 안 온다 연락도 없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죄송해요.”

그가 낮게 웃으며 수연을 바라봤다. 젊은 나이에 그를 낳은 친모는 다른 또래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한국에서 홀로 사는 그녀를 보러 그는 잦게는 달에 한 번씩 한국을 찾았다.

그는 달라진 마당을 한 번 훑어봤다. 사람을 쓰라고 했지만, 수연은 늘 자기가 홀로 마당을 가꿨다. 힘들어 보였지만, 이게 또 그녀의 삶의 일부라는 걸 이해했다.

“더운데 같이 들어가요.”

“오늘 도착한 거야?”

“어제요. 일이 좀 있어서요.”

“어디서 잤는데?”

함께 집으로 들어오며 수연은 오랜만에 본 아들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호텔에서 잤어요.”

“늦어도 엄마 집으로 오지 그랬어.”

“주무실 것 같기도 하고, 저도 피곤해서 그냥 호텔로 갔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그는 자연스레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수연은 그 앞까지 따라오다 문가에 멈췄다.

“아직. 너 올 것 같아서 안 먹었지.”

그가 손을 씻으며 밖을 힐끔 봤다.

“혼자 계세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넓은 집을 혼자 관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고, 혼자 사는 수연이 적적할까 봐 그가 가정부를 고용했었다.

“아, 오늘 휴가 줬어. 너 어제 오는 줄 알고 오늘 같이 외식이라도 할까 했지. 아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수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그가 작게 웃으며 화장실을 나왔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아들이 사주는 거야?”

“네, 비싼 거 드세요.”

“어머, 좋아라.”

수연이 활짝 웃었다. 가끔 이럴 때 보면 아직도 소녀 같았다. 왠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연은 더 단아하고 예뻐지는 듯했다.

평소 그녀가 자주 애용하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무리 그가 돈을 잘 벌어도 그 돈을 맘껏 쓰지 않았다. 비싼 걸 먹으라고 해도 평소 좋아하는 음식을 고른 이유도 그거였다.

“더 좋은 거 사드린다니까요.”

“여기도 엄청 좋거든?”

수연이 미소 지으며 안내받은 자리로 가 앉았다. 제이든 역시 그녀의 앞에 따라 앉았다. 아들과 나오면 항상 그에게 따라붙는 시선들이 그녀를 가끔 흐뭇하게 만들곤 했다. 지금도 안내해 주던 여직원이 남모르게 슬쩍 얼굴을 붉혔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미소 짓고 있는 수연을 보며 그가 물었다. 수연은 고개를 돌려 제 아들을 빤히 바라봤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잘생기긴 했지.

“저 직원이 너 보고 얼굴 붉혔거든.”

겨우 그거 때문에 그렇게 웃고 있었나. 제이든은 황당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뿌듯하게 미소 짓는 수연을 보고선 그는 포기한 듯 피식 웃으며 음식을 주문했다.

한옥을 개조해 만든 음식점은 창밖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보였다. 평소 식물엔 관심이 없었던 그도, 꽃을 너무 좋아하는 수연 덕분에 몇 가지는 알고 있었다.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던 수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 없어?”

슬쩍 꺼낸 이야기는 수연을 만날 때마다 듣는 질문이었다. 그는 여태와 같이 대답했다.

“네.”

수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낳기를 이렇게 잘생기게 낳아 놨는데 왜 여태 혼자야?”

“그러게요.”

그는 관심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수연은 그런 그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로레인이랑은 연락…….”

“안 해요.”

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그는 아까와 다를 게 없었지만,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수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로레인도 많이 반성…….”

그가 고개를 들어 수연을 바라봤다. 구겨진 그의 미간을 마주한 그녀는 입을 딱 다물었다.

“로렌하고는 완전히 끝났어요. 연락하지도, 받지도 마세요.”

“하지만…….”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겨진 미간은 풀릴 줄을 몰랐다.

“전 놓은 적 없어요.”

“알아, 알지.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잖아. 너희 아직 젊고, 로레인도 반성 많이 한 것 같고.”

“그게 반성한다고 될 일이에요?”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남을 수 없는 관계예요. 그러니까 엄마도 더는 로렌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단호한 그의 말에 더는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나니 주문했던 음식들이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바라보던 수연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세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떡갈비를 먹기 좋게 잘라 수연의 앞으로 건넸다. 괜히 그가 싫어하는 얘기를 꺼냈다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기분만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요즘 일은 잘돼?”

“아버지 일은 안 물어보세요?”

그가 고개를 들어 수연을 마주 봤다. 확실히 아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그는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수연을 바라봤다.

“아니, 뭐…….”

“가끔은 엄마가 와주세요. 아버지 바쁘신 거 아시잖아요.”

수연은 괜히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한 태도에 그는 피식 웃을 뿐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와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라 기분이 좋았다.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창밖을 응시하던 수연이 어느 한 곳을 보더니 멍하니 멈췄다. 의아한 마음에 그 역시 그녀가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녀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아이는 부모의 양손을 꼭 잡은 채 함박웃음을 지으며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보기 좋은 세 가족의 모습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소를 머금은 채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던 그녀는 놀란 듯 멈췄다.

단란한 세 가족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한결같았으나, 짙은 녹색 눈동자에는 어렴풋이 슬픈 빛이 감돌았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도 식사에 마저 집중했다.

후식으로는 따듯한 커피와 다식이 준비돼 나왔다.

“맞다. 2층 거실에 등 나갔어.”

“제가 가서 갈게요.”

“그래 줄래? 아줌마랑 둘이 있으려니까 갈 수가 없더라고.”

“그런 일 있으면 사람 좀 부르세요.”

그가 구박하자, 수연은 다식을 한입 베어 물며 어깨를 으쓱였다.

“2층은 너 올 때만 쓰는걸?”

“집에서 혼자 위험한 일 하지 마세요.”

“알았어, 잔소리는.”

툴툴거리는 수연을 보며 그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를 마시려고 손을 뻗는데, 그의 주머니에서 지이잉 진동이 울렸다.

“내 건 아닌데?”

“제 거예요.”

그가 휴대폰을 꺼냈다.

“일 전화? 길게 통화해야 해?”

“아.”

그가 화면을 확인하더니 수연을 바라봤다.

“아뇨, 문자.”

그는 다시 시선을 내려 휴대폰을 바라봤다. 문자를 확인하는 그의 입가에 어렴풋이 미소가 떠올랐다. 물끄러미 아들을 보고 있던 수연은 그 미소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아예 피식 웃기까지 했다.

“제이든?”

“아, 죄송해요.”

그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 수연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요.”

“여자?”

수연의 눈이 기대로 빛났다. 그는 잠깐 고민하듯 눈썹을 찡그렸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얼굴에 완전 꽃 폈는데.”

수연의 말에 그가 큰 손으로 제 얼굴을 스윽 매만졌다.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다. 괜히 허탈하게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되게 신기한 사람이라서요. 십 년 만에 우연히 마주쳤거든요.”

“십 년? 외국인?”

“한국인이요.”

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한국인 여자와 접점이 있다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더 놀라웠다.

“십 년 만에 만났는데 알아봤어?”

“네, 뭐. 사실 많이 변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똑같더라고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반가웠어?”

그는 방금 온 이라의 연락을 떠올렸다.

<밥 살게요. 시간이랑 날짜는 당신이 편한 날로 해요.>

그가 다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자꾸 웃음이 나왔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녀와 만났던 모든 순간이 말도 안 되게 전부 다 황당했다. 그래서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더 반갑더라고요.”

“네가 그런 사람도 다 있고 신기하네.”

“그냥 어디선가 잘살고 있겠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잘살고 있는 것 같아?”

잘 산다라. 문득 엉엉 울다가도 이라를 보며 활짝 웃는 은우가 떠올랐다. 그는 피식 웃었다.

“생각한 것과는 좀 달랐지만, 나름 그런 것 같아요.”

한이라, 서른 살, 한 아이의 엄마. 그가 그토록 궁금했었던 그녀의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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