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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8화 (8/70)

8화

부드럽게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이라의 입술 가운데를 핥았다. 훅 달아오르는 열기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리자, 난생처음 타인의 것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몸속 모든 열기가 머리와 아랫배로 훅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달아올랐고, 머리는 새하얘졌다. 그의 말캉한 혀가 입속을 헤집어 놓으면 놓을수록 정신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하아.”

잠깐 떨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가볍게 입술을 지분거리다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입속을 혀로 유린하듯 부드럽게 굴리던 그가 그녀의 말캉한 혀를 찾았다.

“아.”

강하게 혀를 빨아들이며 큰 그의 손이 이라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목 아래로 절대 내려가지 않았지만, 스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바짝 솟는 것 같았다. 이상하고 야릇하게 소름이 쫙 돋았다.

키스가 길어지고, 이라의 호흡이 가빠질 무렵에서야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가까이서 가볍게 입술을 부딪치며 몇 번 더 지분거렸던 그가, 그녀의 입술을 핥더니 완전히 떨어졌다.

스르륵. 그가 떨어지고 나자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갔다. 시야가 몽롱했다. 아직도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있는 그가 현실적이지 않았다.

잠깐 멍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엄지로 번진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닦았다. 몸이 밀착해 닿을 정도로 가깝지도 않았는데, 쿵쿵 거세게 뛰는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전부 들렸다.

“그…….”

당황한 이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내가 키스해 달라고 한 건가?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머리가 복잡했다. 근데도 방금의 여운이 너무 길게 남았다. 몸을 여전히 달아올랐고, 멀어지는 그를 더 붙잡고 싶었다. 나 미쳤나?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보며 그가 다시 손을 올려 조심히 상처가 나지 않게 잇새 사이에서 뺐다. 당황한 그녀가 귀여웠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관능적이었다. 계속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돼 그가 시선을 떼며 정면을 바라봤다.

“호텔 근처에 레스토랑이 있어. 아니면 한식이 필요한가?”

방금 그렇게 뜨겁게 키스한 게 거짓말처럼 그는 차분했다. 혼자 잔뜩 당황하고 붉어진 자신만 이상해 보였다. 서둘러 휙 고개를 돌린 이라가 괜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다 좋아요. 한식이든, 양식이든…….”

“그럼 안전벨트 해.”

그가 씨익 웃으며 차를 출발했다. 도로를 달리면서도 이라의 심장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키스하고 끝인가? 정말? 아니, 그럼 뭘 더 해야 하는 거야?

“으으.”

괜히 속으로만 잔뜩 고민하던 이라는 아예 창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혼자 끙끙 앓는 여자를 보며 제이든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가 데려온 곳은 아주 고급진 레스토랑이었다. 그와 다니면서 자꾸 따라붙는 시선들이 온종일 불편했는데,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해 그런 것 따윈 생각도 안 들었다.

전망이 아주 좋은 자리에 앉으니 코스 요리가 차례대로 나왔다. 아름다운 풍경과 요리를 바라보자니 어느새 복잡했던 머리는 말끔해졌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화사하게 웃는 이라를 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아침에도 예뻤는데, 차려입은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함께 보이는 전경 때문인지, 아까의 뜨거웠던 키스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그녀가 너무 예뻐서인지.

“이게 뭐예요?”

우물우물 씹으며 눈을 빛내는 여자를 보며, 그는 와인 대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음, 그게 한국어로 관자였나?”

“이건요?”

“캐비아.”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면 그는 친절히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줬다. 어쩐지 그와 있으면 자꾸만 편해졌다. 고작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말이다.

메인 요리까지 먹은 후에 후식이 나왔다. 예쁜 크리스털 잔에 담겨 나온 젤라또를 본 이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까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버렸던 젤라또가 생각났다.

“아까웠다며.”

아까 직원을 불러 뭐라고 얘기하던 게 이거였나. 그가 해준 모든 것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이었지만, 이런 세세한 것들은 심장이 아릴 정도로 떨렸다.

“진짜……, 복권 당첨된 것 같아요.”

그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갑자기 이 상황에 복권이 웬 말인가.

“단 거 좋아하나?”

“잘 모르겠어요.”

어쩐지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취향도 모를 만큼 열심히 산 기억밖에는 없다. 내가 단 걸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는 나조차도 모를 만큼.

제이든은 어두워진 이라의 표정을 읽은 듯 잠시 말을 아꼈다. 얼굴만 보면 곱게 자란 아가씨 같았지만, 속내는 또 그렇지 않은 게 그의 마음을 자꾸 건드렸다.

달콤하고 쫀득한 젤라또를 다 먹은 이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로 옆의 야경을 내다봤다. 정말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당장 눈을 뜨면, 사기당했던 게스트하우스 앞에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꿈이라면 좋았다. 잊히지만 않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고마워요.”

이라의 나직한 말에 그의 시선이 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본 채 중얼거리듯 입을 달싹였다.

“여러 가지로 당신한테는 신세를 많이 진 날이지만, 나한테는 잊을 수 없는 날이에요.”

그는 낮게 웃었다.

“다행이네.”

“내일 가야겠어요.”

잠시 그의 눈이 들렸다. 앞에 앉은 이라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턴가 그를 보고 있던 건지, 그녀의 눈에는 야경이 아닌 그의 녹색 눈동자가 비쳤다.

“오늘만 또 재워줘요.”

그녀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큰 눈이 반달로 접히며 예쁘게 짓는 저 미소가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쿵 내리찍는 것만 같았다. 잠시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느꼈던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

호텔로 돌아온 이라는 곧장 씻고 나와 짐을 쌌다. 돌아오자마자 비행기 표를 바꿨고, 그가 빌려준 노트북 덕분에 가는 길과 부가적인 정보를 검색했다.

“무지 비싼 거겠지.”

오늘 그가 사줬던 옷과 액세서리를 침대 위로 올려놨다. 무려 신발도 두 켤레나 받았다. 그의 겉모습이나 묵는 숙소만 봐도 돈이 여간 많은 게 아니라는 건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똑똑.

괜히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할 것도 없이 그인 걸 알아 이라는 방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달칵-

문고리를 돌려 여니 그는 가벼운 홈웨어 차림으로 서 있었다. 힐끔 방 안을 본 그가 피식 웃었다. 저 작은 배낭 하나만 가지고 왔다니.

“벗어 놓고 감상 중이었나?”

그의 말에 이라가 고개를 돌려 침대를 바라봤다. 펼쳐 놓은 옷과 액세서리를 얘기하는 건가 싶어 피식 웃었다.

“예뻐서요. 아깝기도 하고.”

그가 눈썹을 위로 올렸다.

“당신 건데, 뭐가 아까워?”

“네?”

“설마 저것만 허물처럼 놓고 가려던 건 아니겠지? 당신이 가지고 있으면 옷이겠지만, 나한텐 그저 비싼 쓰레기야.”

“근데 난 이제 저런 비싼 옷 입을 일이 없는데요.”

“그럼 난 있게?”

제이든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내가 저거 입고 나가면 내일 아침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거야. 그건 사양할게.”

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연예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내 얼굴 보면 그 정도는 떠오르지 않나?”

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잘생긴 얼굴에 이라는 괜히 눈을 돌렸다. 얼굴이야 무진장 잘났지, 알고말고. 아마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코앞에서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근데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문가에 기대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잠깐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들고 있던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건네받은 이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예요?”

“휴대폰. 공기계야.”

이걸 왜.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당신이 쓰던 휴대폰 기종은 잘 몰라서.”

“이미 휴대폰보다 더 값진 걸 많이 받았어요.”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쇼핑백을 다시 돌려줬다. 이미 갚을 수도 없을 만큼 비싸고 좋은 것들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더불어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의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까지 만들어줬다. 줄 거라고는 없으면서 그에게 너무 많은 걸 받았다.

“나 못 갚아요.”

“갚으라고 주는 거 아니야.”

그는 이라가 건넨 쇼핑백을 받지 않았다. 제게 남겨진 쇼핑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라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불쌍해요……?”

이제 슬슬 잘 자라는 말을 하려던 그가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라는 눈을 바닥으로 내리 깐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제이든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면 원래 사람들은 이런 게 당연한 건가요?”

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혼란을 담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기껏 호의를 보여준 당신 기분 나빠지라고 한 말은 절대 아니에요. 그냥……. 그냥 당신이 나한테 너무 잘해주니까. 난 줄 것도 없고, 당신은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냥 잘해주니까.”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고작 하루였다. 고작 하루일 뿐인데……. 복잡한 이라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제이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얇은 손목을 잡고선 거실 소파에 그녀를 앉혔다. 그 역시 그녀 옆에 앉아 시선을 맞췄다.

“이유가 필요한 거야?”

“네……?”

“내가 당신한테 잘해주는 이유 말이야. 그래야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

이라의 큰 눈이 평소보다 더 크게 떠졌다. 가까이 있는 그에게는 좋은 보디 향이 났다. 향수 냄새인 건지, 아니면 그에게 배어 있는 원래의 향인 건지. 코끝에서 좋은 냄새가 맴돌았다.

그는 눈을 맞춘 상태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는 여자였다. 남들에게 받는 호의가 익숙하지 않은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걸 이 여자가 알았으면 좋겠다.

“이유라면 만족할 때까지 만들어줄 수야 있겠지만, 한 가지는 기억했으면 해. 당신은 이런 호의를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 말이야.”

“정말 내가 그래요……?”

“응. 안타까울 정도로 자신의 값어치를 모르지.”

“하지만 한 번도 없었어요.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도 나한테 오래 남은 적이 없어요. 그냥 나는 사랑받는 거랑은 거리가 먼 사람 같아요.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 같아요.”

씁쓸한 듯 미소 짓는 여자의 웃음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신은 좀 당당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어.”

그가 손을 뻗어 이라의 부드러운 뺨을 매만졌다.

“하루 만에 나한테 이런 호의를 받을 정도면 당신은 그래도 돼.”

그가 멋들어지게 씨익 웃었다. 어쩐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의 위로에 이라 역시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진짜…….”

“기분이니까, 듣고 싶은 말 있으면 말해 봐. 오늘 내가 다 해줄게.”

이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남자는 원래 다정한 사람인 걸까. 남을 위로해 주는 게 익숙한 사람인 걸까. 문득 몇 시간 전에 그와 했던 뜨거운 키스가 생각났다. 그냥 어쩌면…….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만 날 사랑해줄래요?”

그는 그래 줄 것만 같아서. 다정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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