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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7화 (7/70)

7화

휙 시선을 피한 그를 보며 이라가 제 모습을 내려다봤다. 역시 너무 어른 흉내 내는 것 같나? 그것보다 이거 엄청 비싸 보이는데. 오늘 그에게 빚졌던 걸 어떻게 갚나 생각 중이었는데, 이런 건 너무 과했다.

이라의 생각이 복잡해지는 동안 그는 다가온 직원에게 말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힐끗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젠장. 왜 저렇게 예쁜 거야?

“으, 역시 안 되겠어요.”

낯선 직원들과 있는 게 어색했는지 이라가 종종걸음으로 제이든에게 다가왔다.

“이상하죠? 그냥 티셔츠 하나만 사면 됐는데 이거를…….”

“이미 계산했어.”

“네?”

동그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그는 손에 들려 있던 지갑을 건넸다.

“지갑. 당신 취향일 것 같은 거로 골랐어.”

얼떨결에 지갑을 받았다. 지갑은 명품 로고가 턱 하니 박혀 있었다. 물론 이라는 이게 뭔지 전부 몰랐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얼굴은 꽤 취향이라 생각은 했었다. 그의 기준으로 좀 앳돼 보여 그렇지만. 그런데 이렇게 꾸며 놓으니 마냥 어려 보이지만은 않았다. 자꾸만 향하는 시선을 아예 차단한 그가 가게 밖으로 향했다.

“그냥 가는 거예요?”

놀란 이라가 높은 힐로 아슬아슬하게 쫓아왔다. 괜히 저 걸음이 신경 쓰여 그가 보폭을 줄였다.

“휴대폰값이라고 생각해.”

“네?”

“세 배로 준다고 했잖아.”

“이미 받았는데요? 그리고 세 배라고 하면 이게 다 얼만 거예요?”

최신 휴대폰 가격이라고 쳐도 어마어마했다. 그녀의 눈이 확장되는 걸 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아마 가격으로 치면 그 휴대폰 열 배는 그냥 우습게 넘겼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차로 올라탄 제이든은 힐이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 이라를 보다가 다시 내렸다.

“잠깐 기다려.”

“어디 가요?”

그는 다시 가게 안으로 사라지더니,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아 다시 나왔다. 손에는 가게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들고선.

다시 차에 올라탄 그가 쇼핑백에 있는 박스를 아무렇게나 꺼내 내용물만 꺼낸 뒤 필요 없는 것들은 뒷좌석에 던져버렸다. 이라는 그의 손에 들린 로퍼를 바라봤다. 신발?

“계속 신고 있기엔 불편하잖아. 그거.”

그는 좌석 밑으로 로퍼를 내려둔 뒤에 차를 출발했다. 물끄러미 로퍼를 바라보던 이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슴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했다. 누군가 깃털로 쿡쿡 건드리는 것처럼 마음이 이상했다.

힐끗. 운전하는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어쩐지 가끔 보이지 않는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데, 또 그게 좋았다. 너무 위험하리만큼 이질적인 이 모든 상황에서 저 남자의 녹안만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앞으로 불행 따윈 없을 것처럼.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에 그는 경치가 좋은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 곧 있으면 멋진 야경이 나오는 이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행을 왜 왔어?”

나직한 그의 말에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여행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어쩐지 대책 없더라.”

“그랬나요?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긴 해요.”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죽어도 거기서 죽긴 싫더라고요. 차라리 객사가 낫겠다 싶어서요.”

선글라스를 벗은 그의 짙은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이라는 여전히 앞만 바라본 채였다.

“나는 고아였어요.”

바람 냄새가 어쩐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아니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저 시선이 그럴지도 몰랐다.

“엄마는 사고 쳐서 가진 날 버렸고, 나중에 새 가정을 꾸렸을 때 그걸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대요. 보육원에서 할아버지 손잡고 나왔던 게 아직도 생생해요.”

보육원. 그 단어에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그곳을 나온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냥 그때부터 모든 게 다 행복할 줄 알았어요. 할아버지는 엄마와 연을 끊으면서까지 날 키우셨거든요. 그땐 나도 엄청 많이 사랑받았어요.”

이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말이 전부 과거형인 게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중학교 입학할 무렵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위암 말기셨대요. 뭐, 보험금 때문인지 연락 한번 없던 엄마는 그제야 연락이 됐어요. 그렇게 이상하고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한 채,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돈과 집에서 생활했죠. 근데 성인이 되니까 다 놓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한 번도 엄마라고 불러본 적도 없는 그저 남보다 못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냥 다 버리고 나왔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대학도 가기 전에 휴학하고 돈부터 벌었는데, 문득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자신이 생각해도 참 대책 없긴 했다. 옆에서 보는 그는 얼마나 더 어이가 없을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근데 막상 여행을 오니까 그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숙소 사기부터 당했죠.”

이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휴대폰도 박살 나고요.”

“그래서 그렇게 울었군.”

어깨를 으쓱였다.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잖아요. 와, 나 이제 진짜 객사하는 건가, 싶었다고요.”

이라는 큭큭 웃음을 터트리며 푹신한 시트에 등을 기댔다.

“근데 웬걸, 말이 통하는 외국인이 딱! 지금도 너무 신기해요. 아, 근데 한국말을 왜 이렇게 잘해요?”

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예 본토 발음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처럼 시트에 등을 기댔다.

“한국계 혼혈이거든. 아, 그렇다고 혼혈들이 전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우와, 혼혈이었어요?”

“응. 어머니가 한국인이거든. 그리고 태어나길 한국에서 태어났어. 국적은 한국이 아니지만.”

갑자기 뭔가 더 그가 친근해졌다. 이라가 눈을 빛내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신기해?”

“네! 완전!”

“어릴 때 이민 와서 쭉 살고 있긴 하지만, 종종 한국에 가.”

“왜요?”

“어머니가 한국에 계시거든. 당신처럼 멋모르고 낯선 타지에 왔다가 적응을 못 했지.”

아. 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낯선 타지가 주는 익숙함도 있는 것 같아요.”

“말에 모순이 있는데.”

“큭큭. 맞아요. 근데 진짜 그래요. 저 고아라고 누구한테도 얘기한 적 없거든요. 근데 처음 보는 당신한테는 다 술술 나와요.”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졌다. 이라는 알 수 없는 만족감에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던 그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라 그래. 원래 모르는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기 좋거든.”

“맞아요.”

눈을 마주친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라는 멋진 야경을 구경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에요. 살면서 정말 이런 거 처음이거든요.”

“글쎄, 당신이 신데렐라가 되기엔 부족한 것들이 있지.”

미소를 머금은 그의 말에 이라가 그를 바라봤다. 그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구두가 아니잖아. 그리고 당신은 12시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지.”

“사라질 수도 있죠. 여긴 내 나라가 아니니까.”

“그렇지. 근데 당장 비행기 표랑 여권도 없는 당신이 어디서 사라지게?”

그의 말에 이라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감성에 좀 젖겠다는데 왜 이렇게 현실적이에요? 당신 창작은 영 빛을 발하지 못하겠네요.”

이번에는 제이든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의 폭소에 이라가 갸우뚱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긴 포인트였어요?”

“그냥.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 재밌네.”

“이상해요.”

“당신의 이상함을 따라잡진 못하지.”

그는 시트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물끄러미 그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이라의 눈에 충동적으로 촉촉해 보이는 그의 입술이 들어왔다.

“……!”

나 지금 어딜 본 거야. 미친 거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서둘러 고개를 빳빳하게 앞으로 돌렸다. 지금 난생처음 키스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첫 키스도 안 해본 주제에. 한이라, 너 제정신이야? 너무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그에게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그가 너무 잘생겨서 그랬다. 그것도 지금 너무 큰 호의를 보이는 그가, 너무너무 잘생겨서.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저녁은 뭐가 좋겠어. 신데렐라가 되고 싶다면 저녁까지 근사해야지.”

쿵쿵 뛰는 심장 때문에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괜히 땀이 잔뜩 밴 손으로 원피스 끝자락을 꾹 잡았다.

“응?”

대답 없는 이라가 이상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어두웠지만 발그레해진 두 뺨과 앙다물고 있는 입술, 꽉 쥔 작은 두 주먹, 긴장한 듯 동그랗게 깜빡이는 두 눈. 순간 그의 시선이 짙어졌다.

그가 되묻자, 이라는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거쳤다. 아무렇지 않게, 아까처럼 보는 거야.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다.

후우. 깊게 숨을 내뱉은 이라가 웃음을 머금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녁은…….”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연기처럼 흐리게 사라졌다. 고개를 돌린 순간 마주친 짙은 시선에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어두웠지만, 그래도 확실히 보이는 그의 녹안에 이라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이 다시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로 내려갔다.

여자보다 더 탱탱하고 붉어 보였다. 주름 없이 매끈한 입술은 촉촉해 보였고, 좋은 향이 날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달싹였다.

“먹고 싶은 건 따로 있는 것 같네.”

“네?!”

이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무슨……!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시 시선을 마주친 그는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키스해도 되나?”

이라의 두 동공이 미친 듯이 확장됐다. 그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심장을, 아니 온몸을 왕왕 울리는 것 같았다. 잔잔했던 마음속 호수에 그가 돌을 던졌다.

“저녁을 먹으러 가도 되고.”

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싫으면 거절하라는 듯 그가 빤히 바라봤다. 거절해도 전혀 어색해지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 놓은 듯 그는 여유로웠다.

서로 눈이 마주친 그 시간이 억겁 같았다. 고작 몇 초 지났을 뿐인데도. 잔뜩 긴장한 이라의 입술이 끝내 열렸다.

“둘 다……, 하면 안 되나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크고 따듯한 손이 목덜미와 얼굴을 부드럽게 잡으며 비스듬히 돌렸다.

쿵쾅쿵쾅. 아주 가까이 다가온 그와 겹친 입술을 바라보던 이라는 결국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느릿하게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미소 지으며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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