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으으음.”
몸을 뒤척이니 포근한 이불이 감싸왔다. 침구의 따듯함과 에어컨의 시원함이 섞여 딱 좋았다. 몇 번 더 몸을 웅크리길 반복하던 이라의 눈이 일순간 번쩍 떠졌다.
놀란 얼굴로 양옆을 휙휙 바라봤다. 그러니까 여긴……. 낯선 방이었다. 왼쪽엔 전면 창으로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왔고, 반대로는 깨끗한 흰 벽지와 장식품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뚱하게 놓여 있는 제 배낭이 보였다.
벌떡. 배낭을 보니 전부 떠올랐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이라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후다닥 침대를 벗어났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시계를 찾았다.
“이 미친……!”
시계는 애석하게도 이미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거야?”
분명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방법을 강구해 보려고 했건만. 내가 나를 너무 믿었던 걸까? 아니면 내겐 내일이 없는 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쿵쿵 발을 굴렀다.
똑똑.
그때 들리는 노크 소리에 우뚝 행동을 멈췄다.
“안에서 난리가 난 것 같은데, 깼으면 나와.”
아.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어제저녁이 어떻게 끝난 건지 생각났다. 나 취했지. 젠장.
“네에…….”
최대한 빠르게 씻고 나온 이라는 머리카락 물기만 털고선 후다닥 거실로 나갔다. 이미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던 그는 정신없어 보이는 이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아침부터 쓸데없이 잘생겼다.
“잘 잔 것 같네.”
“죄, 죄송해요. 저 진짜, 아니, 정말……, 죄송합니다.”
이라가 죄인처럼 고개를 푸욱 숙였다. 밥까지 얻어먹은 주제에 잠까지 잘도 퍼질러 잤다.
“저 지금 짐 싸서 금방 나갈게요! 진짜 재워주셔서 너무 감사…….”
“티켓 왕복으로 끊었나?”
말이 뚝 끊긴 이라는 스윽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표정이 좋아 보이는 그는 신문을 접으며 이라를 바라봤다.
“네? 네, 왕복으로…….”
우선 물으니 대답은 했다. 지금 이 상황에 누가 봐도 을의 처지라 이라는 조심스러웠다. 왜 물어보지? 아, 티켓 바꾸는 방법 알려주려나?
“여행 왔다고 했잖아.”
그가 미소 지었다.
“가고 싶었던 곳은 보고 가야지 않아?”
“네?”
“구경시켜줄게. 이왕 여행 온 거.”
이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 이라를 본 그는 그저 아침 햇살처럼 눈 부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와아아아!”
시원한 바람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오픈카에 앉아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 이미 긴 머리가 나풀거리며 바람에 빠르게 날렸지만, 이라는 그런 것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부와아앙-
스포츠카의 배기음 끝내주게 좋았다. 해변 도로를 빠르게 질주하는 차 안에서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잔뜩 들뜬 얼굴로 환하게 웃던 이라는 운전석에 앉은 그를 바라봤다. 진한 녹색 눈동자는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고동색 머리카락도 바람 탓에 시원하게 흩날렸다.
오후가 지나 일어난 이라에게 남자는 꿈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미 자유여행이란 건 머릿속에서 훨훨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었다. 여행 첫날부터 파사삭 부서진 희망이었는데, 그것들을 그가 다시 일깨워줬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어제 처음 본 남자는 나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풀까. 설마 다른 목적이 있나. 반신반의하며 환하게 웃는 그를 봤었다. 그러나 이라의 이성은 거기서 이미 뚝 끊겼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온 여행이었다.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삶의 의욕도 그만큼 없었다. 그저 살고 있으니 살아가고 있던 거였다. 그런 이라에게 처음으로 호의를 보인 남자에겐 이미 경계 따윈 허물어졌다.
당장 그가 지독한 범죄자라고 해도 이라는 이 순간을 즐길 것만 같았다. 그냥 지금 당장은 다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라를 데리고 그녀가 생전 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게 해 줬다. 살면서 누군가의 차를 타 볼 기회도 없었고, 택시도 정말 손꼽았다. 그런 이라가 처음 탄 건 억 소리 나는 스포츠카였다. 그것도 짱짱하게 위가 벗겨지는 오픈카였다.
난생처음으로 드라이브라는 것도 해봤고, 해변에 있는 레스토랑을 가 정말 신선하고 맛있는 해산물도 먹어봤다. 그 뒤에는 관광객들이 자주 가는 곳을 코스별로 돌며 구경했고, 간간이 그는 추억이 될만한 것들을 이라의 손에 쥐여주곤 했다.
“자.”
환하게 웃으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데, 그가 이번에도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니 젤라또였다.
“와, 아이스크림!”
아이처럼 기뻐하며 두 손으로 받은 이라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어? 조심……!”
잔뜩 들뜬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받은 이라가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 코앞으로 걸어오던 사람과 그대로 부딪혀 순간 중심을 잃었다.
탁.
“괜찮아?”
넘어지기 직전 그가 넓은 품으로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시선이 축축해진 곳으로 점점 내려갔다. 이럴 수가. 그 덕분에 넘어지는 건 피했어도,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옷에 처박았다.
“아……, 이거.”
한 입도 못 먹어봤는데. 아쉬운 얼굴을 하니 그가 이라를 바라보며 다행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다치진 않았나 보네.”
“아까워요.”
“당신 옷 좀 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손과 옷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았다. 못 먹게 된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그는 이라의 손을 탁 잡고 걸었다. 얼떨결에 손이 붙잡힌 이라는 빠른 걸음으로 넓은 보폭의 그를 따라갔다.
“엥?”
그와 함께 도착한 곳은 옷가게였다. 매장으로 들어간 그는 직원에게 영어로 뭐라 떠들더니 다시 이라에게 돌아왔다.
“원래 이런 옷들이 취향이야?”
그가 이라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녀는 매장 안에 있는 전신 거울로 저를 바라봤다. 아주 평범한 옷이었다. 흰 티에 청반바지. 사실 예쁜 옷을 사 입은 적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적밖엔 없었다. 그것들은 이미 몸이 다 커버려 입지 못했고.
이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예쁜 옷을 사고 싶었어도, 돈이 아까웠다. 만 원 한 장의 티를 살 바에는, 만 원에 세 장 주는 무지 티를 사는 경우가 늘어났다. 운동화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아무래도 티는 사야겠죠?”
배시시 웃으며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꺼냈다. 아니, 꺼내려고 했다. 더듬더듬. 아무리 뒤적여도 지갑은커녕 엉덩잇살만 만져졌다.
“어?”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분명 지갑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녀의 반응에 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지갑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은지 그는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는 치안이 그렇게 좋지 않아. 가방에 있는 지갑도 다 털리는데, 주머니에 넣어 놨어?”
“어, 어떡…….”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휙 올려다봤다. 지갑을 대체 어떻게 찾아야 하지. 질린 이라의 얼굴을 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부터 참 덜렁인다 싶었다.
“여권은 가방에 있지?”
“네…….”
“카드는 카드사에 전화해서 정지해.”
그가 제 휴대폰을 내밀었지만, 이라는 받지 않았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잔뜩 근심이 서린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카드에 어차피 돈 없어서 괜찮아요.”
“뭐?”
“신용카드도 없고, 현금으로만 들고 왔거든요.”
“지갑에 있던 게 다고? 얼마 있었는데?”
“백만 원 조금 안 됐던 것 같은데…….”
그가 황당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왕 잃어버린 거, 잊어.”
“네? 어떻게 그래요?”
“그럼 하나 사.”
아니, 돈이 없다니까. 이라가 할 말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직원을 불렀다. 그가 직원과 대화하는 걸 기다리며 이라는 매장 내부를 둘러봤다.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옷가게인 것 같은데, 가방도 있고 신발도 있고 심지어 지갑도 있었다. 영어를 읽어보려고 해도 브랜드를 모르니 무용지물이었다.
얌전히 앉아 있자 갑자기 직원들이 이라에게 다가왔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매장 소파에 대충 편하게 앉았다.
“갔다 와.”
“네?”
“따라가면 돼.”
“예? 저기요? 저, 저기?”
그의 손짓 한 번에 이라는 직원들에게 이끌려 어느 한 곳으로 끌려들어 갔다. 혼자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니, 그들은 매우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사, 사이즈?”
건진 단어는 겨우 하나였다. 이라가 당황해했지만, 직원들은 미소 지은 채 그녀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그 뒤로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촤악-
촤라라락-
탁-
순간 옷부터 가방, 신발까지 수많은 제품이 그녀의 앞으로 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옷을 입고 나오라고 해 갈아입고 나온 순간, 그에 맞는 가방과 신발이 몸을 거치고 지나갔다.
한 삼십 분이 좀 흘렀을까. 그동안 폭삭 늙은 것 같은 기분으로 이라가 털썩 주저앉았다. 몇 벌째 입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다 됐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블랙 오프숄더 원피스에, 붉은색 힐과, 작은 핸드백이 몸에 있었다. 직원이 이끄는 대로 전신 거울 앞으로 향했다. 구두가 어색해 걷기가 어려워 어정쩡하게 걸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블랙 원피스는 매끈한 어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가슴골이 파여 평소 보일 일 없던 봉긋한 가슴이 더 탱글탱글해 보였고, 짧은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늘씬한 다리는 높은 힐 덕분에 더 길어 보였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옆에서 직원들이 칭찬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알아듣진 못했어도 뉘앙스가 그래 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거울로 자신을 바라봤다. 붉은 힐을 아찔해 보였지만, 그만큼 더 성숙해 보이게 했다. 그리고 작은 핸드백은 정점을 찍는 듯 이라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두근두근.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꾸민 것도 처음이지만, 이렇게나……. 멍하니 있으니 직원들이 서둘러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손짓했다. 이라는 어색한 걸음으로 나갔다.
빨리 끝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다. 제이든은 그동안 그녀에게 줄 지갑을 느긋하게 골랐다.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은 알아서 어울리는 거로 하라고 했으니, 지갑이나 그녀의 취향에 맞춰 사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맞는 지갑을 찾은 그가 물건을 꺼내라고 지시한 순간, 매장 한편이 웅성거렸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순간 멍청하게 굳어버렸다.
“……어때요?”
민망한 듯 그에게로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에 그는 잠시 넋이 나갔다. 처음 볼 때부터 꽤 어리다고만 생각했다. 물론 계속 눈이 가는 얼굴이었고, 사실은 꽤 취향이기도 했지만. 그저 신기하고 또 잠시 복잡한 생각을 지워내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나왔었다.
작고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그녀가 옷차림 하나로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생각보다 육감적인 몸매는 망할 흰 티셔츠와 청반바지에 가려졌던 거였다. 하얗게 나온 그녀의 매끈한 다리로 시선이 내려가는 걸 느끼자마자 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이건 좀 위험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