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잘못 듣지 않았을까. 그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봤다.
“하루면 돼요! 돈 안 받을게요.”
Oh My God. 아주 좋은 청력을 가졌으나, 혹시나 그 기능이 잠깐 퇴화했길 바랐다. 그러나 이 작은 여자는 확인 사살까지 했다.
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번지는 동안, 이라의 얼굴은 방법을 찾은 듯 희망으로 번졌다.
“휴대폰값 주시는 것보다 그냥 하루만 재워주시면 안 돼요? 그럼 돈도 안 들고 좋잖아요. 저 진짜 죽은 듯이 있다가 아침 되면 나갈게요.”
이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하지만 그의 미간은 단호하게 구겨졌다.
“그냥 돈 받으세요. 세 배 줄 테니까.”
“아뇨, 그냥 휴대폰값 이렇게 물어주시는 거로 하면 안 돼요?”
“안 돼요. 묵을 곳이 필요한 거면, 차라리 호텔 방 하나를 잡아줄게요. 됐죠?”
당돌하다 못해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어디가 좀 모자란 건지.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이라는 순간 다급해졌다. 물론 남자가 호텔 방을 잡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너무 좋았다. 불편하거나 위험함을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그러면 더는 부탁할 수가 없었다. 엄청난 민폐인 건 알았지만, 적어도 내일 공항까지 갈 수 있는 교통편이라도 부탁하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저 그냥 여기서 자게 해 주세요! 네?”
“이봐.”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휙 뒤돌았다. 첫인상도 순해 보이진 않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인상을 굳히니 순간 겁이 덜컥 났다. 덩치도 키도 큰 외국인이 한국말을 능숙하게 한다고 갑자기 친근해 보이긴 했지만, 이건 좀……. 무서웠다.
“어, 그게…….”
“수작 부리려는 게 아닌 건 알겠어. 근데 돈을 주겠다는데도 거절하고, 묵을 곳이 필요하다 해서 해 주겠다는데도 거절하고. 굳이 내가 있는 이곳에서 같이 자자고?”
“같이 자자는 건 아니었는…….”
“하아.”
당최 말이 통하는 여자인 건지부터 고민했어야 했나. 제이든은 얼굴을 굳히며 나가려던 방향을 틀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여행객이지, 당신.”
여자가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잘 곳이 없어서, 낯선 남자한테 재워달라고 하는 건데? 대체 몇 살이길래……, 아니 됐고.”
그는 머리를 휙 쓸어넘기며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여자를 내려다봤다.
“불법체류자야?”
“아니요!”
“그럼, 대체, 왜.”
무거운 배낭끈을 두 주먹이 하얘질 때까지 꾹 쥐고 있던 여자가 입술을 그러모았다.
“여행을 왔는데요…….”
“근데.”
“그게 도착해서 보니까 예약했던 게스트하우스가……, 아무도 없어서, 그냥 제가 사기를 당한 것 같고…….”
“말 좀 똑바로 해.”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구기자, 여자는 순간 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제이든의 얼굴이 이제는 허탈하게 변했다. 애도 아니고 좀 다그쳤다고 우는 거야?
저도 모르게 다시 눈물이 나와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거웠던 배낭이 위로 쑥 들렸다. 그가 한 손으로 가볍게 배낭을 벗긴 후에 대충 소파 위로 올렸다.
“여행 왔는데 게스트하우스 사기를 당했다는 거지.”
“흡, 네.”
“그러다가 나랑 부딪혀서 휴대폰까지 고장 났고.”
“흐어엉, 네에.”
고개까지 아주 열심히 흔들며 울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성년자야?”
“아니요…….”
“성인인데 그 정도 일도 제대로 확인 못 해? 뭐든 알아보고 왔을 거 아니야.”
“……진짜 갑자기 온 거라서요.”
코를 훌쩍이자, 그는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건넸다. 대충 이해는 갔다. 성인이라지만 해 봤자 이십 대 초반이나 중반일 터였고, 꼴을 보니 외국은 또 처음인 것 같았다. 당연히 먼 타지까지 왔는데 숙소 사기부터 당하면 멘탈이 털리고도 남지.
그는 침착하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그 상황에 나 때문에 휴대폰이 부서졌다. 당장 새 휴대폰을 사준다거나, 돈을 줘서 회복될 멘탈이 아닌 건 알겠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우는 여자를 보니 자꾸만 과거에 한 여자가 떠올랐다. 젊은 나이에 타지로 와 마음고생이 심했던, 제 엄마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마음 약해지는 건 딱 질색인데. 잠깐 고민하듯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팔짱을 풀며 여자를 바라봤다.
“딱 보니까 혼자 온 것 같은데, 도움 청할 사람은?”
“……없어요.”
“그럼…….”
꼬르르륵.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여자의 배에서 나오는 소리에 제이든은 말을 멈췄다. 순간 화아악 달아오른 여자는 황급히 소리를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다시 한번 연속으로 배는 꼬르륵을 외쳤다.
제이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대체 이렇게 대책 없는 여행을 왜 온 거지. 그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눈치만 살피는 여자를 보며 그는 인터폰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디론가 향하는 그를 보며 눈을 굴리고 있는데, 그가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했다. 갑자기 뭐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이라는 머리 굴리기 바빴다.
탁. 인터폰을 내려둔 그가 이라를 보며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방 써.”
이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제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우선 씻을 거면 씻고, 20분 뒤에 나와. 화장실은 방 안에 있어.”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튀어나왔다. 누군가에게 부탁해 본 것도 처음이지만, 이렇게 호의를 받는 건 더더욱 처음이었다. 눈망울이 촉촉해진 이라는 무작정 허리부터 구십 도로 굽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시간 맞춰 나오기나 해.”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후다닥 배낭을 든 채 달려갔다. 얼굴에서 걱정을 한시름 던 것 같은 여자를 보며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뭐 하는 건지.]
방으로 사라진 여자를 보며 그는 제가 쓰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씻었다. 사실은 오늘 본가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얼떨결에 더 머물게 됐다.
젖은 머리를 털며 금방 씻고 나온 그는 가운을 걸친 채 거실로 나갔다. 마침 도착한 디너 룸서비스를 받은 후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달칵. 정확히 20분이 지나고 여자가 나왔다. 씻은 건지 더 말랑해진 얼굴로 나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와.”
“넵.”
그의 말에 쪼르르 테이블 앞에 착석한 이라는 눈앞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자연스럽게 다시 배에서 미친 듯이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이 상황이 나도 진짜 어이가 없는데, 우선 먹고 생각해.”
“먹어도 돼요……?”
“그쪽 먹으라고 시킨 거야.”
그의 말에 놀란 듯 여자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제이든은 함께 온 와인을 따며 여자를 바라봤다. 먹으라니까 먹진 않고 감상이나 하고 있네.
“와인 먹나?”
이라는 촉촉해진 눈으로 그가 들고 있는 와인잔을 바라봤다. 술은 한 번도 안 마셔봤다. 그러나 이미 고개는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레드 와인을 따라 이라의 앞에 놓아줬다. 제 몫도 챙긴 그는 피식 웃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라의 잔에 잔을 부딪쳤다. 챙, 하는 맑은소리가 울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이없는 날이야.”
“……죄송해요.”
“뭐, 이해해.”
그는 힐긋 이라를 바라보며 와인을 비워냈다.
“낯선 땅에서 말 통하는 사람 만나는 게 쉽진 않지.”
“네…….”
“구경하라고 시켜준 거 아니야. 먹어, 식겠네.”
포크와 나이프, 움푹 팬 숟가락. 식기마저도 모든 게 낯설었다. 이라는 울음을 꾹 참은 채 다양한 요리 중 제일 익숙해 보이는 감자튀김을 포크로 푹 찍어 먹었다.
우물거리며 씹는 이라를 보며 그는 앞에 놓인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었다.
그러고는 먹기 좋게 썰은 스테이크를 이라의 앞으로 밀어줬다.
“그 와인이랑 잘 어울려.”
그가 다시 와인을 따라 마셨다. 이라는 제 앞에 놓인 와인을 한 모금 마셔봤다.
“으.”
떫고 냄새도 이상했다. 색은 포도 주스 같았는데. 인상을 쓰는 이라를 보며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성인 맞아? 술 처음 먹어보는 것 같은데.”
“맞거든요…….”
잠깐 와인잔을 노려보던 이라가 벌컥벌컥 마셨다. 떫은맛은 여전했지만, 빠르게 삼키니 덜 느껴졌다. 서둘러 고기 몇 점을 와구와구 넣어 씹는 이라를 보며 그가 웃긴지 작게 키득거렸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아까보다 조금 경계심이 풀린 듯 그의 표정은 편해 보였다. 고기를 씹어 삼킨 이라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더 도와달라는 말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는 알아서 더 도와줄 것처럼 미리 말했다.
이라는 눈을 깜빡이다가 앞에 놓인 수프를 숟가락으로 휘적였다. 이상했다. 이 남자는 불청객 같은 나한테 왜 호의를 보여주지? 사실 재워달라고 했을 때 신고하면 어쩌나 엄청나게 걱정했었다.
“저기…….”
“응?”
“원래 남들한테 친절해요?”
동그랗게 뜬 눈과 마주치자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나 진짜 모르나 보네.”
“네?”
“안 친절해. 남한테 친절할 이유 없잖아.”
그는 와인을 다시 비워냈다. 그냥 그가 마시는 모습을 보니 더 마시고 싶어졌다. 이라가 슥 잔을 내밀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말없이 잔을 채워줬다.
몇 잔 더 마시니 금방 취기가 올랐다. 주량도 모르고 연속으로 마시니까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배고파서 이것저것 막 집어 먹으니 배도 금방 찼다.
“저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봐요.”
그의 눈썹 한쪽이 휙 올라갔다. 다양하게 시키긴 했으나, 보통 사람들이 자주 먹는 음식들이었다.
“저도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신기하고, 어이없고 그런데요…….”
조금 발그레해진 뺨으로 이라가 그와 눈을 맞추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내일까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아.”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여자를 보며, 그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와인 몇 잔에 이렇게까지 취하는 게 귀엽기도 했고, 남의 호의가 익숙해 보이지 않는 게 조금은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다.
몇 번 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리던 여자는 그대로 테이블에 스르륵 엎드려 잠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다시 한번 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큰일 날 여자네.”
발그레해진 뺨 사이 오뚝한 콧날이 살짝 찌푸려지다가 곧 표정이 편하게 풀어졌다. 어쩐지 자꾸만 눈이 가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