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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4화 (4/70)
  • 4화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이건 거짓말이야. 정말 이럴 수는 없어.

    “……하.”

    한참을 기다렸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이미 안내되어 있던 번호부터, 예약했던 곳까지 전화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안 나왔다. 사기를 당해도 이런 사기를 당하냐고. 분명 리뷰도…….

    “됐다.”

    의미가 없었다. 이미 해까지 져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당장 잘 곳부터 구해야 했다. 날씨 때문에 얼어 죽거나 할 걱정은 안 해도 됐지만, 낯선 타지에서 홀로 거리에서 밤을 보내는 건 대책 없는 이라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위험했다.

    이럴 경우에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였더라. 최대한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상황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꼬르르륵.

    그 와중에 배도 고팠다. 기내식 이후론 먹은 것도 없으니 그럴만했다.

    “하아. 나 진짜 죽어야 하나.”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삶의 의욕이 없다. 아니, 조금은 숨통을 트이고자 여행을 온 거긴 했는데. 어쩐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을 오니 점점 더 그 의욕은 사그라졌다.

    무거운 배낭을 바닥에 내려두고 등을 기댔다. 흘러내리는 검은 긴 머리가 찰랑댔다. 손끝으로 결 좋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럴 거면 염색도 좀 하고, 파마도 좀 해 볼 걸 그랬나.”

    항상 돈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할아버지 보험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중간에 엄마 밑으로 들어가게 된 이라에게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은 없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돈을 벌 수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수중에 있는 돈을 아끼고 아껴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막상 지나고 보니까 후회됐다. 친구들이 열심히 꾸미며 살 때, 얼마 안 하는 틴트 하나도 손이 떨려 못 샀다. 차라리 그 돈을 모으고, 또 모았다.

    “젠장.”

    자꾸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젠 할아버지가 기억도 안 났다. 너무 많은 걸 주셨던 분이었는데, 너무 악착같이 살아가려다 보니까 그분이 잊혔다.

    무릎을 모아 그 사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아침이 오기를 기다린 다음에 티켓 날짜를 바꿔야 하나.

    꼬르르륵.

    당장 죽어도 그러려니 할 것 같긴 한데, 배는 또 고팠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벌떡 일어나 배낭을 챙겨 들었다. 밤인데도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배낭 무게가 있어서 그런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목적지도 없고, 편히 몸을 누일 곳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었다. 이 많은 지구상의 사람 중에 내 편은 한 명도 없었고,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도움을 청하거나 할 기력도 없었다.

    “죄다 난 없는 것뿐이네…….”

    작은 동양인 여자가 홀로 터벅터벅 걷고 있으니 이상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검색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서 힘없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미국 여행에 대해 알아본 것도 없이 무턱대고 온 이라가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건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래도 배터리라도 빵빵해서 다행…….”

    툭. 탕탕타앙.

    순간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저기서 굴러떨어진 게 내 휴대폰 맞는 거지?

    [이런, 죄송합니다.]

    분명 아주 가볍게 지나가는 누군가와 부딪힌 것 같았다. 그러나 힘없이 들고 있던 휴대폰은 그대로 손에서 벗어났고, 바닥으로 아주 기막히게 굴렀다. 주워 보지 않아도 이미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액정이 깨져 있었다.

    뚝. 눈물이 떨어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꿋꿋하게 마음을 다잡고 있었는데 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흐, 흐어어엉!”

    [아. 이런, 젠장. 정말 죄송합니다. 휴대폰은 물어 줄게요.]

    부딪혔던 남자가 다급히 빠른 영어를 내뱉으며 이라의 휴대폰을 주웠다. 이미 다 박살 나 버린 휴대폰이 시야로 들어왔다.

    너무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이라를 본 남자가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눈물로 시야가 뿌옇게 변한 이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족히 백구십은 될 것 같은 외국인이었다. 진한 녹색 눈동자에 구불거리는 고동색 머리카락, 곤란한 듯 찌푸려진 이목구비는 말할 것도 없이 짙었다.

    서럽게 울고 있으면서도 잘생긴 외국인의 모습에 놀랐다. 그리고 그런 외국인 앞에서 추하게 울고 있는 게 굴욕적이었다. 젠장, 왜 이리 눈물이 안 멈춰.

    “흐으윽, 흐읍.”

    [혹시 어디 다쳤나요? 휴대폰은 세 배로 물어 드릴게요.]

    “흐으윽, 아까부터 진짜 뭐라는 거야아.”

    서럽게 울며 남자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탁 잡았다. 말도 안 통하고, 그나마 남은 수단이었던 휴대폰마저 박살이 났다. 눈물을 벅벅 닦았지만, 끝없이 흘러내렸다.

    휴대폰을 가져간 이라는 코를 훌쩍이며 남자를 한 번 본 뒤 그냥 앞으로 걸었다.

    “흐윽, 흐읍.”

    “죄송합니다.”

    우뚝. 혼자 질질 짜며 걷는데 익숙한 한국말에 걸음이 멈춰졌다. 분명 같은 목소리인데. 이라가 휙 뒤를 돌아보자, 아까 부딪혔던 외국인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네……?”

    “휴대폰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한국말을 나보다 잘해……. 너무 놀라 울음이 뚝 그쳤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에 곤란한 듯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냥 웬만하면 현금이나 주고 끝내고 싶었다. 사실 휴대폰을 떨어트릴 만큼 세게 부딪친 것도 아니고, 먼저 부딪친 거로 따지자면 저 조그마한 여자가 먼저와 부딪쳤다. 하지만 잘잘못 따져 가며 길 한복판에 서 있고 싶진 않았다. 그까짓 돈 몇 푼 더 주고 끝내면 됐는데…….

    “제가 지금 지갑이 없습니다.”

    제 말에 여자의 눈이 더 동그랗게 변했다. 대체 몇 살인지 가늠도 안 가는 앳된 얼굴이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 같고, 한국말을 하는 걸 보아 한국인인 것 같았다. 짐도 큰 걸 보니 여행을 온 것 같았고.

    지이잉.

    마침 제 전화가 울렸다.

    “잠시만요.”

    작은 여자를 힐긋 본 뒤에 전화를 받았다.

    [네.]

    -[그새를 못 참고 결국 간 거니? 제이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익숙한 중후한 목소리에 제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되는 일이 없었다.

    [지금 급한 일이 있어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이든.]

    [끊습니다.]

    뚝.

    일말의 미련도 없이 전화를 끊은 그는 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 휴대폰 좀 깨졌다고 저렇게 울 거까지 있나? 황당함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꾹 참았다.

    “여기서 조금만 걸으면 제가 묵는 호텔이 있습니다.”

    “……호텔이요?”

    여자의 눈에 언뜻 두려움이 스쳤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건지.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폰 변상 안 해줘도 됩니까? 그럼 전 바빠서 먼저 가고 싶은데요.”

    “아, 아니…….”

    이라는 코를 훌쩍였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라면 어쩔 수 없었지만, 한국말을 이렇게나 잘하는 외국인이라면 말이 달랐다. 그리고 그것도 변상이라니!

    “해, 해 주세요.”

    말이 다급하게 나왔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구세주 같았다. 물론 내 휴대폰이 박살 나긴 했지만.

    “저……, 반만이라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기소침한 여자를 한 번 스윽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5분만 더 걸으면 됩니다.”

    먼저 쭉쭉 앞으로 걸으니, 뒤에서 총총걸음으로 이라가 따라갔다.

    단 한마디의 대화 없이 호텔까지 쭉 직진한 그는 로비에 멈춰 섰다.

    “기다리세요.”

    “네?”

    이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남자가 갔다가 다시 안 오면 어떡하지. 사실 이렇게 변상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당장 정말 고마운 일이긴 했지만……. 사람이란 게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건지, 그의 얼굴에는 대놓고 짜증이 섞였다.

    “그럼 같이 올라가요.”

    휙. 할 말만 내뱉은 후 먼저 가버리자, 다시 이라가 총총 따라갔다. 낯선 남자 호텔 방에 따라가는 게 정말 괜찮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라는 엘리베이터에 타 층수를 바라봤다. 끝없이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띵, 하고 맑은소리에 그를 따라 내렸다.

    “헉.”

    아무리 영어를 못 하는 자신이라도 이곳이 최고로 좋은 룸이라는 건 알 것 같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긴 다리로 휙휙 가더니 호텔 방 문을 어려움 없이 벌컥 열었다.

    “지갑만 가지고 나올…….”

    “저기요……!”

    이라가 다급하게 남자의 말을 끊었다. 돈을 받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 뒤에는? 당장 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고작 스무 살의 이라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의 부름에 그가 말을 멈춘 채 바라봤다. 여전히 문을 잡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은 채였다.

    이라는 우물쭈물 입술을 짓씹다가 그를 올려다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그게…….”

    하지만 막상 부탁하기가 힘들었다. 평생을 남에게 부탁해 본 적이 없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꾹 참아냈고, 혼자 힘으로 해결했다. 그게 결국은 터져 이런 말도 안 되는 여행을 강행한 거지만.

    뭔가 굉장히 할 말이 많은 듯한 여자를 보던 제이든은 멀리서 띵, 하고 울리는 엘리베이터 음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남들이 보면 귀찮아질 법도 했다.

    “우선 들어와요.”

    이게 맞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는 문을 열었다. 여자는 우물쭈물하다가 그걸 또 따라 들어왔다. 막상 들어오라고 문을 연 건 자신이었지만, 들어오는 여자를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탁.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러나 닫힌 것보다도 앞에 펼쳐진 풍경에 이라는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런 호텔이 존재했다니. 그저 놀라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호텔과는 차원이 달랐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구경하던 그녀의 앞으로 그는 손가락을 이용해 딱, 하고 핑거 스냅을 쳤다.

    “아까 나한테 할 말…….”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What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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