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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2화 (2/70)
  • 2화

    심장이 아직도 쿵쾅댔다. 은우를 보기 직전까지 온몸이 달달 떨렸다.

    “엄마! 나 형아가 이거 해줬어!”

    손을 감싼 검은색 손수건이 멋있는지 은우는 연신 손을 흔들었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당연히 해야 했을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 남자를 바라봤다.

    “정말 감사드…….”

    심장이 따끔했다.

    남자를 보는 이라의 시선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 굳어 있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던 사람.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모르는 낯선 타지의 땅에서 그것도 십 년 전에 만났던 남자.

    ‘나는 고아였어요.’

    처음으로 내가 아닌 타인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았던 날. 그리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달콤한 추억을 내게 새겨준 사람.

    그와의 시간은 곧 터져 없어질 물거품 같은 시간이었다. 함께 했던 그 시간이 너무나 짧아, 아직도 그 단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정은우 환자 보호자 되세요?”

    서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때, 간호사가 다가왔다. 그제야 이라가 정신을 차리며 먼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네, 제가 엄마예요.”

    “엑스레이 먼저 찍어볼게요.”

    “아, 네!”

    서둘러 은우를 데리고 가면서도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정신이 없었다. 촬영실로 아이를 들여보내고 나서야 손이 바르르 떨렸다.

    “말도 안 돼…….”

    정말 그라고? 십 년이 지났잖아. 이렇게 바로 알아볼 리가 없는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은우가 다쳤잖아. 뼈라도 크게 다친 거면 어떡하려고 엄마가 돼선…….

    몇 가지 검사를 더 한 뒤에야 다른 이상이 없다는 소견이 나왔다. 봉합하는 동안 잠시 응급실을 나왔다.

    “하…….”

    나오자마자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괜찮아?”

    주저앉은 앞으로 사이즈가 큰 신발이 보였다. 다정한 저음에 이라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 걸까. 우연한 만남을 상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허나 그건 십 년 전이었다. 상상마저도 십 년 전에 끝났다. 그는 그녀에게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감히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

    “…….”

    “다른 의미는 없어. 실례가 됐다면 사과할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한 녹색 눈동자에 고동색 머리카락, 시원하게 찢어진 눈매와 높은 콧대, 날카롭게 각진 턱과 립스틱이라도 바른 듯 붉은 입술까지. 십 년 전보다 더 성숙해졌지만, 그가 맞았다.

    시선이 거칠게 흔들렸다. 실제로 만났지만, 환상 속에 있는 존재와 같았다.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런 사람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래 보여. 의자에 가 앉는 게 어때.”

    그가 주저앉은 이라에게 손을 뻗었다. 크고 보기 좋은 선을 가진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는 어려움 없이 이라를 일으켜 푹신한 의자에 앉혔다.

    “아, 정신이 너무 없었네요. 고마워요. 우리 은우 챙겨줘서…….”

    피가 철철 나는 아까의 상황이 다시 생각났다. 생각만으로 끔찍해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만약 그가 아니었더라면 찻길에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진짜 너무너무 고마워요.”

    “당연한 일이야.”

    이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내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게 있었다.

    “왜 아이가 혼자 도로에 있던 거야?”

    그의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건 자신이 더 알고 싶었다.

    “정은우 환자 보호자님?”

    그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 이라가 벌떡 일어나자, 의사가 다가왔다.

    “열 바늘 정도 꿰맸습니다. 상처가 아주 깊지 않아서 다행이었어요.”

    “하아, 감사합니다.”

    “한 시간 정도면 일어날 거예요. 너무 울어서 탈수 증세도 보이니까 수액 다 맞으면 가셔도 됩니다.”

    의사가 들어간 후에야 이라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다행이네.”

    뒤에서 들리는 그의 말에 이라가 서둘러 몸을 틀어 바라봤다.

    “진짜 미안하고, 고마워요. 바쁜 사람 계속 잡아두고 있었네요. 아, 제가 사례라도…….”

    말이 횡설수설 나왔다. 다시 차분하게 한숨을 내쉰 이라가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안 믿겨요. 한국계 혼혈인 건 알았는데, 한국에 사는 거였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살진 않지만, 자주 와. 그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십 년 전이에요. 다 기억할 리가 없잖아요.”

    잊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자신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그는 반박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 깨어나면 데려다줄게.”

    “네?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순…….”

    이라의 말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라는 잠깐 떠오른 기억에 피식 웃었다.

    “맞네요. 당신 만날 때마다 난 항상 과도한 신세를 지게 되네요.”

    “생각났다니 다행이야. 진 김에 더 지어도 돼.”

    “정말 괜찮아요.”

    “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아빠가 오나?”

    아. 순간 이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지금 그를 만나 추억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휴대폰을 꺼낸 그녀가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통화 좀 할게요.”

    그가 그러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이미 전화가 먼저 왔어도 한참은 전에 왔어야 했다.

    -……어.

    “정지강.”

    속에서부터 분노가 들끓었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간 이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전남편이자, 은우의 아빠였다.

    -너…… 은우랑 같이 있어?

    “지금 그거 알고도…… 하.”

    -잠깐 놀이터 나가 놀겠거니 했어. 그새 너한테 전화를 한 거야?

    평소에 모자가 만나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그래서 은우에게도 엄마에게 전화하지 말라며 몇 번을 혼났다고 들었다. 그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던 건, 그가 은우를 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여 아이가 더 상처받을까 애써 참았다.

    “은우 지금 응급실에 있어.”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애 손이 찢어져서 열 방이나 꿰맸어. 혼자 차가 쌩쌩 다니는 찻길에 있었다고!”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네가 그러고도 아이 아빠야?!”

    -이라야, 우선 너 진정하고…….

    “봐! 애가 다쳤다는데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잖아!”

    -다 치료했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런 자식도 아빠라고 애를 빼앗긴 게 너무 분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을 능력도 없는 엄마가 자신이라는 게 미치도록 속이 상했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던 이라는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참아냈다. 울음 섞인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더 차분히 말했다.

    “며칠 은우 내가 데리고 있을게.”

    -하아. 또 엄마 난리 치실 거 뻔해. 안 돼.

    “넌 사람 새끼도 아니야, 알아서 데려다줄 테니까 연락하지 마.”

    뚝.

    전화를 끊고 그대로 전원을 꺼버렸다.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몇 번을 더 심호흡한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꽤 언성이 높았는지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그 역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창피했다. 그는 그새 더 근사하고 멋있어졌는데, 자신만 초라해진 것 같았다.

    “미안해요.”

    “왜 사과해.”

    “아이 챙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 밥이라도…….”

    그러고 보니까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침 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입꼬리가 시원하게 피식 올라갔다.

    “뭘 먼저 물어야 하나. 이름? 나이? 연락처?”

    “한이라예요.”

    “음.”

    예쁜 이름이네.

    “풀네임이라면.”

    그가 악수하듯 손을 뻗었다.

    “제이든 리 에반스야.”

    이라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허탈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어요. 한국에서 살았다고 해서요.”

    “기억하네.”

    “다는 못 한다고 한 거죠.”

    짧게 악수를 끝냈다. 그는 한 손에 들어오고도 남는 작은 그녀의 손 느낌을 기억하며 웃었다. 이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십 년 만에 통성명하네요.”

    “할 거 다 하고 말이야.”

    그의 말에 이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얘긴 안 꺼낼 줄 알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상하게 모든 게 잘 맞았던 남자였다. 곤란한 상황에 있던 그녀를 도와줬고, 그녀의 속사정을 들어줬고, 위로해 줬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고, 첫 키스와 첫 경험의 상대였다. 아주 어린 스무 살에 겪었던 남자치고는 너무 화려했고 멋있었다.

    놀란 이라의 눈을 보던 그가 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유부녀한테 실례였네. 지금 보니까 생각보다 더 어렸나? 동양인들은 동안이라 잘 모르겠네.”

    이라는 피식 웃었다.

    “어린 나이긴 했지만, 할 거 다 해도 되는 나이였어요. 유부녀는 과거형이라서, 딱히 실례는 아니고요.”

    제이든의 눈이 놀란 듯 이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혼했거든요.”

    “아.”

    “원래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도 아니어서, 이렇게 될 게 뻔했죠.”

    은우가 생겨서 결혼했고, 은우 때문에 함께 살았다. 이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이가 우선 행복해야 하니까.”

    그녀의 말에 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내 행복이 먼저잖아!’

    떠오르는 한 목소리에 그의 눈이 슬픈 빛을 띠며 웃었다. 잊고 싶은데,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잠깐 어두워진 그의 표정에 이라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표정을 고쳤다.

    “아이는 몇 살이지?”

    “올해 일곱 살이에요. 전 서른이고요.”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서른?”

    “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여자를 훑어보던 제이든은 고개를 내저었다.

    “십 년 전과 똑같은 얼굴로 서른이라니.”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러는 당신은요?”

    “한국 나이로 서른여섯이야.”

    “그땐 스물여섯이었구나.”

    이라가 생긋 웃었다. 잠깐 그 웃음에 그가 멈췄다. 응급실 문이 오가는 사람들 탓에 여닫길 반복했다.

    “은우한테 가 봐야겠어요. 연락처 알려주면 꼭 밥 살게요.”

    휴대폰을 건네자, 그가 피식 웃었다. 이라가 의아해하다가 아, 하며 깨달았다.

    “전원을 껐지. 한국엔 얼마나 있어요? 시간은 돼요?”

    홧김에 꺼둔 전원을 켜고 다시 건넸다. 그는 엉뚱한 그녀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길게 머무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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