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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마세요-1화 (1/70)
  • 1화

    인생이 이렇게 갑자기 바닥으로 처박힐 수가 있나.

    “잘 알아들었지? 내가 뭐 해줄 말이 없다. 한이라, 너도 딱하다. 입봉 앞두고서.”

    “선배! 징계해고라뇨? 이래도 되는 거예요? 이라 잘못 아니잖아요!”

    함께 듣고 있던 윤진이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제 일처럼 윤진이 울분을 터뜨렸다.

    “야, 나도 전달하는 처지인데 뭐 어쩌냐.”

    “그래도 그렇지! 3개월 정직도 어이가 없었는데!”

    윤진의 목소리가 마치 이명처럼 윙윙 울렸다. 멍하니 서 있던 이라는 두 눈을 천천히 두어 번 깜빡였다.

    입봉이 바로 코앞이었다. 이제 진짜 PD라 불릴 일만 기대하며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한 세월이 6년이었다. 그 6년이 단 3개월 만에 와르르 무너졌다.

    이라는 멍청하게 서 있다가 넋이 나간 얼굴로 피식 웃었다.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네. 내 인생에 지금 당장 안 웃어줄 수가 없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야, 이라야…….”

    윤진이 옆에서 걱정스럽게 불렀다. 대학교 선배이자, 회사에선 상사이기도 한 그녀는 시청률 잘 나오는 방송의 PD였다. 분명 얼마 전까지 닮고자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라는 천천히 손으로 이마를 잡았다.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에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저 갈게요.”

    “이라야!”

    마지막 인사고 뭐고 그딴 건 남지도 않았다. 곧장 몸을 틀어 회사를 나갔다. 6년간 미친 듯이 일했던 회사를 빠르게 나가는 동안, 의문을 품은 눈동자들이 따라붙었다.

    회사를 나오자 차가운 바깥 공기가 폐부로 훅 들어왔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겨우겨우 참아냈다.

    “야, 한이라! 걸음이 왜 이렇게 빨라!”

    뒤에서 윤진이 붙잡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보니 나오면서 이라의 짐과 함께 자신의 짐도 챙겨 나온 건지 양손이 가득했다. 윤진은 숨을 헐떡이며 이라에게 가방을 건넸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

    “선배는 일해야죠. 내가 잘렸지, 선배가 잘렸어요?”

    “아오, 방송국 놈들.”

    윤진은 고개를 휙 돌려 회사 건물을 매섭게 노려봤다.

    “너 예쁘다고 방송 타서 좋아할 땐 언제고, 이렇게 버리냐.”

    씩씩거리던 윤진은 이라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내가 어떻게든 얘기해 볼게. 그러니까 몇 개월 좀 더 쉰다고 생각해.”

    쉰다고? 머릿속에서 통장 잔액이 떠올랐다. 당장 이번 달을 버티기도 어려웠다. 나가는 돈은 많은데, 들어오는 수입은 없었으니.

    이라의 어두운 표정을 본 윤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진은 이라를 끌고 술집으로 향했다.

    “비싼 거 먹어. 내가 살게.”

    그저 피식 웃기만 하는 이라를 걱정스럽게 보던 윤진은 제가 술을 시켰다. 이 업계가 얼마나 버티기 힘든 곳인지 잘 안다. 그래서 악착같이 버티던 이라가 더 안쓰러웠다.

    멍하니 갈색 술이 든 크리스털 잔을 바라보던 이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근래 나한테 일어난 일이 얼마나 되는 거지?

    ‘이혼하자.’

    이혼을 당했고,

    ‘은우는 내가 데려갈 거야.’

    아이를 빼앗겼고,

    ‘합의 안 보면 고소 취하 안 한다더라.’

    남은 돈을 탈탈 털어 합의금을 마련했고,

    ‘너도 딱하다.’

    3개월 정직 처분 끝의 결과는 해고였다.

    쓴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식도가 타들어 갈 정도의 도수가 센 술이었다. 하지만 얼굴 하나 찌푸려지지 않았다. 이 술이 쓰기에는, 이미 온몸이 썼다.

    “선배.”

    이라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인생이 원래 이래요?”

    누가 스포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그럼 더 노력이라도 안 하게.

    “네 인생이 유독 쓰다.”

    “선배가 보기에도 그래요?”

    “그래도 지나면 좋은 일 있지 않겠냐?”

    평소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윤진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윤진은 말을 덧붙였다.

    “어린 나이에 임신했어도 지금 은우 보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프잖아. 그 말도 안 되는 경쟁률 단번에 뚫고 들어와서 지금까지 잘 버텼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도 뺏기고, 잘 버텼던 직장도 잘렸는데요.”

    피식.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그때 휴대폰이 지이잉 울렸다. 광고 전화겠지, 하며 무심한 눈으로 화면을 보는데, 보이는 이름에 이라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여보세요?”

    -어, 엄마아…….

    “응, 은우야. 무슨 일이야?”

    울먹이는 아이의 목소리에 이라가 벌떡 일어났다. 은우를 부르는 말에 윤진도 덩달아 놀랐다.

    -흐윽, 엄마. 나, 나 아파. 아파아.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이라의 몸은 이미 밖으로 뛰쳐나갔다.

    ***

    빠앙-

    서울의 교통체증은 언제 겪어도 짜증이 났다. 제이든은 얼굴을 구기며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턱을 쓸었다. 안 그래도 오랜 비행으로 피곤한데 숨 막히는 도로를 보니 피로가 급증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차는 많고, 신호는 짧고, 속은 탔다.

    “하.”

    탄식을 내뱉은 그는 신호에 맞춰 차를 정차했다. 물끄러미 습관처럼 창밖을 내다봤다. 대학로는 무리 지어 걸어가는 여대생들이 바글댔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였어요.’

    잊고 살았는데, 가끔 비슷한 나이대의 동양인을 보면 떠올랐다. 10년 전이었으니까, 지금은 또 많이 달라졌으려나.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몰랐다. 그저 잠깐 닿았다가 스쳐 지나갔던 여자. 한국말을 하는 거로 보아 한국인이라 미루어 짐작했던.

    몇 개월은 그 여자를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것 같다. 아주 짧았던 시간에 비해, 꽤 길고 깊게 추억에 젖어 살았다. 결국은 끝내 찾지 못하고 점점 기억에서 희미해졌지만, 가끔 이렇게 한국에 올 때 생각났다.

    궁금하긴 했으나, 그때처럼 애를 쓸 정도는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기억 속의 그녀도 그간의 세월을 겪었을 테니까. 그저 마음이 복잡할 때 잠깐 꺼내 보는 위로의 추억 정도였다.

    신호가 바뀌었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그 순간이었다.

    “으아앙!”

    차들이 쌩쌩 지나는 도로 가운데에 아이가 서 있었다.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채로 아주 서럽게 울면서.

    생각이 마치기도 전에 이미 몸은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꺄악! 저기 아이 있어요!”

    “어떡해!”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시민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땐 이미 그가 쌩쌩 달리는 차들을 다급하게 세우며 아이에게 도달했을 때였다.

    “으아아앙!”

    서럽게 우는 아이의 곁으로 차 한 대가 쌩 지나갔다. 제이든은 넓은 품으로 아이를 채 가듯 안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의 다급한 시선이 아이의 손을 향했다.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으아아앙, 아파아!”

    손을 잡으려니 아이가 품에서 발버둥 쳤다. 그사이 신호가 바뀌었고, 안전한 인도로 향한 그는 아이를 내려뒀다.

    “부모님은 어디 있어?”

    침착한 그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자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머,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떤 여자가 다가와 묻자, 아이는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파아!”

    자세히 보니 날카로운 것에 찢긴 듯 손등이 찢어져 있었다. 손수건을 꺼내 지혈을 시도하는 그의 시선에 아이의 휴대폰이 들어왔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아직도 부모가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아이 혼자 나온 것 같았다.

    손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감싸 묶었다. 부모고 뭐고 병원부터 가야 할 정도로 피가 많이 났다.

    “흐으윽, 아파아. 아파요.”

    “이름이 뭐야?”

    목에 걸려 있는 아이의 휴대폰을 잡으며 그가 물었다.

    “으누…….”

    “은우?”

    끄덕끄덕.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이 눈물로 가득 젖어 있었다. 그가 옆에 선 여자를 바라봤다.

    “잠깐만 아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차를 엉망으로 세워놔서.”

    그가 도로를 가리키며 말하자, 여자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로 향하며 아이의 휴대폰에 있는 최근 연락처로 들어갔다. 다행히 ‘엄마’라고 저장된 번호가 있었다. 그는 전화를 연결하며 차를 갓길에 세웠다.

    -여보세요?!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가 멈칫했다.

    -은우야? 은우 어디 있어?!

    여자는 호흡이 엉망이었다. 반쯤 울고 있는 건지 울음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차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은우 어머니 되십니까?”

    -……누, 누구세요? 제가 은우 엄마예요. 지금 은우랑 같이 계시나요?

    “아이가 혼자 찻길에 있어서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근데 손을 많이 다친 것 같아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어디 십니까?”

    다시 은우에게로 돌아온 그가 자세를 낮췄다. 여자에겐 전화로 근처 병원을 가겠다고 전했다.

    “엄마랑 통화해. 아저씨가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아이에게 휴대폰을 넘기고선, 한쪽 팔로 가볍게 아이를 안았다.

    “아기 엄마랑 연락되셨어요?”

    옆에 있던 여자의 말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아, 혹시 모르니까 저도 병원에…….”

    여자의 표정이 일순간 들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을 읽어낸 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괜찮습니다.”

    깔끔히 거절한 그는 서둘러 말을 더 붙이려는 여자를 무시하고는 아이를 차에 태웠다. 출발하며 아이를 바라보니, 엄마랑 통화하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무구한 아이의 웃음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꽤 아플 만도 한데 잘 참네.

    “형아, 형아.”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형이라니.

    “형아가 엄마한테 데려다주는 거야?”

    “응. 은우 엄마 만나러 가는 거야.”

    “엄마가 울지 말고 기다리래.”

    금세 또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가 귀여웠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아이를 안고선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

    “보호자는 곧 올 겁니다.”

    “어?! 엄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가 한쪽을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이미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한데도 웃는 아이를 보며 제이든 역시 고개를 돌렸다.

    “은우야!”

    황급히 응급실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여자는 미끄러지듯 아이의 앞에 주저앉았다. 서둘러 이곳저곳 아이를 살피고선 다친 손을 보며 울먹였다.

    “…….”

    서 있는 상태로 여자를 내려다보던 그는 얼기라도 한 듯 딱딱히 굳었다. 그의 동공이 믿을 수 없는 듯 거칠게 흔들렸다.

    십 년이 흘렀으니 많이 변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기억 속 그때 그대로 한없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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