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따사로운 여름 햇살이 가득한 오후. 아칼리무트의 별궁에는 오랜만에 젊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드디어 대망의 여름 데뷔탕트가 열린 탓이었다.
샤프롱과 함께 사교계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 영애들은 한껏 꾸민 채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 마계 문 사건으로 뒤숭숭했던 시기가 지나고 처음 있는 큰 행사였다.
우중충한 인트라비아의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역대 데뷔탕트 중 가장 화려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영애들이 잘 꾸며진 별궁을 살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듯 문가를 힐끗거렸다.
“그분도 오늘이 데뷔탕트랬죠?”
“맞아요, 저는 오늘 만나면 사인을 받을 거예요.”
“아마도 같이 오시겠죠?”
그들은 딱 짚어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로에나 하델루스.
이번 가짜 성녀 사건을 해결한 영웅이자 제국 유일의 정령사였다.
“지난번 오염 정화도 실은 그분이 하신 일이라죠.”
“간악한 가짜 성녀가 제가 한 것처럼 탈바꿈했다는 걸 알았을 땐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지난 마계 문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죠. 그중 데뷔탕트를 준비 중이던 사람도 있었고요.”
마계 문 사건이 거론되자 주변이 숙연해졌다. 여전히 그 일이 인트라비아에선 끔찍한 사건인 탓이었다.
황실은 그간의 오염과 마계의 문 개방이 가짜 성녀였던 메이벨과 흑마법사의 수장인 나탈리 후작의 소행이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들이 악룡 아델쿠스를 소환하려 했고, 이를 막은 게 대공자 부부라는 사실까지도 만천하에 공개했다.
“제국, 아니 대륙 유일의 정령사와 그녀를 지키는 남편이라니, 너무 멋있어요.”
“저는 대공자비님이 너무 아까우신 것 같아요. 원래라면 더 좋은 짝을 만났을 텐데.”
“어머, 그게 무슨 소리세요. 대공자님만큼 좋은 신랑감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그분은…… 사생아잖아요.”
대공자비가 아깝다던 영애가 ‘사생아’라는 단어를 속사포처럼 작게 내뱉고는 부채질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를 본 다른 영애가 말을 얹었다.
“그 단어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좋겠어요. 아직 소식 못 들으셨나 보네요.”
“소식이요?”
“아, 그 소식이라면 저도 들었어요. 알고 보니 대공 부부의 친아들이셨다면서요.”
“네에?!”
사생아를 거론한 영애가 두 눈을 홉뜨며 반문했다. 인트라비아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그녀에게는 금시초문인 소식인 탓이었다.
처음 그녀를 타박했던 영애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세한 내막은 정확히 모르지만 두 분의 아들이 맞대요. 황실의 친자감별사가 직접 보증했다고.”
황실의 보증이라면 거의 확실했다. 영애는 이 같은 일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럼 둘이 낳아 놓고 몰랐다는 거예요?”
“글쎄요, 그것까진 잘…….”
그렇게 대공자가 사생아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의 관심이 사그라들 무렵이었다.
“로에나 하델루스 대공자비와 아키드 하델루스 대공자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지기의 호명과 함께 거대한 문이 열렸다. 이에 모두 대화를 잊고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입장하기 전, 로에나는 대기실에서 머무르며 심호흡을 여러 차례 했다. 그녀의 샤프롱인 소피 레니아 후작 부인이 씨익 미소 지었다.
“대공자비께서도 긴장할 때가 있으시군요.”
“아무래도 정체를 밝힌 직후에 갖는 첫 사교 모임이니까요.”
그녀가 정령사라는 걸 공표한 뒤 별장에는 초대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많았지만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로에나가 그 초대장에 모두 답할 필요는 없었다. 정령사가 아니었을 때도 그녀는 대공자비였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아키드와 깨가 쏟아지는 신혼을 즐기느라 파티에 참석할 겨를조차 없었다.
“하긴 파란을 잔뜩 일으켜 놓고 별장 안에서만 머무셔서 다들 궁금해했죠.”
레니아 후작 부인의 말에 나는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야 밖에 나가면 바로 인파가 몰려드니까요.”
그녀도 이렇듯 수도에 있는 내내 별장 밖으로 나가기 어려워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앞서 몇 번 야외 데이트를 나갔다가 인파에 휩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탓이었다.
결국 강제 실내 데이트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물론 아키드와 함께라면 어디든 천국이었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얼른 데뷔탕트 마치고 북부로 돌아가고 싶어요.”
“왜요. 수도에 더 머무시지.”
“우선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요.”
로에나의 말에 후작 부인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아키드가 사생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기에 더더욱 그 말의 의미가 와닿은 탓이었다.
“하긴 하델루스 가문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지요. 이렇게 대단한 며느리와 함께이니 앞날이 기대된답니다. 북부로 돌아가셔도 저를 잊지 마시길 바라요.”
“그럼요. 제 샤프롱까지 해 주셨는데 당연하죠.”
“호호호. 듣기 좋네요.”
그때였다. 대기실 문이 열리며 아키드가 들어왔다. 오늘 로에나와 복장을 맞춘 예복이었다.
로에나가 아키드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아키!”
두 눈이 초롱초롱한 게 레니아 후작 부인과 있을 적과는 딴판이었다. 레니아 후작 부인은 깨가 쏟아지는 부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키드가 로에나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오늘도 예쁘네요.”
“아키도 멋있어요. 아마 내일은 더 멋지겠죠?”
“콜록!”
레니아 후작 부인이 물을 마시다 로에나의 주접에 사레가 들렸다. 로에나는 그제야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미 아키드에게 덕밍아웃을 한 상황이라 그만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
“아, 레니아 후작 부인. 제가 방금 한 말은…….”
“이건 정말 예상 못 한 일이네요. 호호호.”
레니아 후작 부인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희대의 닭살 커플이 탄생한 것 같군’ 하고 말이다.
물론 그 희대의 닭살 커플 후보는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의외의 커플이 최근 기세를 높이는 중이었으니까. 마침 그 부부가 등장했다.
“오늘은 너희가 제일 빛날 거란다.”
“아무렴. 누구 아들이고 누구 며느리인데.”
뒤따라 들어온 엘레나와 데미안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로에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쵸. 저희처럼 금실 좋은 부부는 없죠.”
“그건 동의할 수 없군. 나와 엘라야말로 매일 붙어 있을 만큼 사이가 좋…….”
“그 입 좀 다물어, 디안.”
엘레나가 황급히 데미안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한 수 위였다.
그가 제 입을 막은 엘레나의 손을 붙들어 깊게 입을 맞춘 탓이었다. 레니아 후작 부인은 또다시 사레들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정말이지 의외였다.
“컥, 콜록! 캑!”
“괜찮으세요, 후작 부인?”
로에나가 등을 두들기자 레니아 후작 부인이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사실 대공자 부부보다 대공 부부의 모습이 더 충격이었다. 그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어느 틈에 저렇게 꿀이 떨어지게 된 건지 모르겠다.
물론 여전히 자주 티격태격했지만 그게 애정을 기반한다는 점에서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까스로 기침을 멈춘 후작 부인이 말했다.
“비법이 있다면 알려 주시죠, 대공비님.”
“그런 거 없는데.”
레니아 후작 부인의 너스레에 엘레나가 새초롬히 대답하며 데미안을 째려보았다.
“바깥에서 이러지 말라니까.”
“그럼 안에 있을 때 만족하게 해 주든가요.”
“아닛, 그렇게 해 놓고……! 진짜……!”
엘레나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부채질하며 타는 속을 잠재웠다. 오기 전에도 한차례 시달리고 와 지각할 뻔한 게 생각난 탓이었다.
‘확실히 달라졌어. 흠.’
레니아 후작 부인이 네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질색하는 부인에게 거듭 질척거리는 대공과 그런 둘을 말리는 며느리, 그리고 무엇보다 제 부인에게만 관심 있는 대공자까지.
이런 분위기의 대공가는 몹시 생경하면서도 색달라 자연히 눈길을 끌었다. 그간 악명 높았던 가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란해서 특히나.
“자, 이제 갈 시간이에요.”
레니아 후작 부인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로에나에게 연회장으로 갈 것을 권했다.
로에나는 아키드와 손을 잡고 레니아 후작 부인을 따라 데뷔탕트 홀로 향했다.
엘레나와 데미안은 여전히 티격태격하면서 그들 뒤를 따랐다. 로에나는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아키드에게 말했다.
“두 분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에요.”
“이게 다 로네 덕분입니다.”
“제가 한 게 있나요?”
“물론이죠.”
문 앞에서 멈춘 아키드가 로에나를 돌아보았다. 앞머리를 반만 깐 채로 풀 세팅된 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로에나가 그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키드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도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로네 없는 하델루스는 크림 없는 크림파스타이니까요.”
“어쩜.”
로에나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아키드를 따라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어쩐지 제 주접을 점점 닮아 가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기특해하는 듯한 어투에 아키드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가 그녀의 손등을 쓸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놀라시면 곤란한데요.”
뒤이어 싱긋 미소 지은 그가 귓가에 대고 마저 속삭였다.
“실은 저도 시크릿 존을 만들까 싶거든요.”
“세상에.”
로에나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아키드에게 덕질 선언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덕후 선배로서 조언해줄 겸 진지하게 말했다.
“제 시크릿 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어요. 생각한 것보다 더할 거거든요.”
“이번에 돌아가면 보여 주는 겁니까?”
“으음, 아키 하는 거 봐서요.”
“보여 주시죠.”
“글쎄에.”
로에나는 아키드의 말에 짓궂게 반응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입장하기 전 뒤에 선 대공 부부를 힐끗했다. 그들이 로에나에게 손을 들어 웃어 주었다.
마냥 어렵기만 했던 시부모님이 더는 어렵지 않았다. 무뚝뚝해 보이던 남편도 실은 무척이나 다정했고.
로에나는 이 기적 같은 변화에 감회가 새로워졌다. 예전이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오늘.
로에나는 아키드의 아내이자 하델루스의 며느리가 되어 행복했다.
만약 누군가 지금의 로에나에게 시집살이가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하고 말이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