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아키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그윽한 빛을 띠었다. 새 시작을 알리는 그의 말이 내 마음을 울렸다.
“아키, 난…….”
“우린 분명 처음보다 잘할 겁니다. 서툴렀던 만큼 좀 더 확실하게 말이죠.”
아키드가 씨익 웃으며 내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새롭게 결혼을 맹세하는 듯한 행위에 열이 확 올랐다.
기억이 있든 없든, 그 사실은 더 이상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서로를 바라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사랑해요.”
“……!”
“사랑해요, 아키드.”
나의 고백에 아키드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느덧 그의 눈가가 기쁨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언어의 힘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니 그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으니까.
나와 아키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허리를 붙든 손이 뜨거웠다.
나는 아키드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그와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 새로 서로의 숨결이 오고 갔다.
그가 성급하게 내 머리칼을 지분대고 허리에 힘을 주었다. 틈 하나 없이 꽉 맞닿은 품은 뜨거웠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그의 귓불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쩐지 사랑스러워 한 행동에 아키드가 반응했다. 그가 얕은 신음을 내뱉는가 싶더니 나를 떨어뜨렸다.
“아키드?”
“로네.”
아키드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는 듯했다. 나를 붙든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간 채였다.
그가 나를 홀리듯 올려다보며 말했다.
“역시 안 되겠습니다.”
“네?”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재촉하지 말라고 했는데 실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그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제가 로네를 재촉하고 싶었습니다.”
“…….”
“안 됩니까?”
목덜미에 닿은 입술이 뜨겁고 축축했다. 애원하듯 입술을 지분대자 절로 목이 말랐다.
무엇을 허락해 달라는지는 분명했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제 서약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이전 삶까지 더하면 참을 만큼 참은 우리 두 사람이었다.
“돼요.”
“…….”
“허락할…… 앗.”
내 입에서 하락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이었다. 아키드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가 성급하게 제 침실로 향했다. 아마도 내 침실엔 키나가 있어 피하는 것 같았다.
“푸흣.”
그 행동이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가는 길도 아쉽다는 듯 그의 이마며 눈이며 코며 입술이며 할 것 없이 입을 맞추었다.
어느 곳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모든 게 다 사랑스럽고 벅차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침대로 향하는 길이 이토록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아키드가 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더 이상의 자제력을 갖기 어려운지 아키드가 성급하게 입을 맞춰 왔다.
숨 쉴 틈 없이 들이닥친 입맞춤에 정신이 몽롱해지는 듯했다.
옷가지가 풀어지고 구겨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곧이어 내 머릿속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사라졌다. 아키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에 집중했다.
* * *
캐서린과 메이벨을 연결하던 아티팩트를 완전히 해제하는 날.
에셀 공작은 에드워드와 함께 하델루스 별장을 찾아왔다. 에셀 공작이 캐서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조심하거라.”
“네, 아버지.”
캐서린이 맑게 웃으며 손에 깍지를 꼈다.
그러자 에드워드도 덩달아 캐서린의 반대편 손에 깍지를 꼈다. 그가 힘이 바짝 든 목소리로 선포했다.
“누가 뭐래도 내 여동생은 너야. 태어날 때부터 지켜본 건 너니까.”
제법 듬직한 위로에 캐서린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오라버니뿐이야.”
손까지 흔들어 안심시키니 에드워드가 코를 찡그리며 쑥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내심 안도했다. 앞서 가족과 대화가 잘 풀린 모양이었다.
메이벨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에셀 공작이 잠깐 그녀를 힐끗했으나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타인을 보는 듯한 태도는 그가 누구를 딸로 여기는지 분명하게 했다.
‘하긴 기억도 없는 딸보단 당장 눈앞에 있는 딸이 더 소중하지.’
게다가 메이벨은 캐서린을 죽이려 한 사람이었다. 에셀 공작과 에드워드가 좋게 볼 리 없었다.
“시작합니다.”
코비슈타인의 안내에 캐서린이 메이벨의 옆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해제 마도구가 가동되자 비가시 모드이던 구속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속구는 메이벨과 캐서린을 연결하고 있었다. 해제 마도구가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구속구를 끊어 내기 시작했다.
메이벨의 마지막이었다. 원작과의 고리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구속구 해제 후 에셀 성으로 돌아가는 캐서린의 가족을 배웅했다. 셋이서 돌아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 * *
데미안은 초조한 얼굴로 우왕좌왕하며 한자리를 거듭 서성거렸다.
아실로부터 엘레나가 이혼을 준비 중인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한 탓이었다.
최근에 황궁까지 다녀왔다는 걸 보면 확실했다.
‘이젠 아프다는 핑계도 더는 무리인데.’
이미 캐서린 에셀에게 치료받은 후라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데미안은 차리라 아픈 채로 있는 게 불쌍해라도 보였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안에 있죠?”
“……?!”
데미안은 엘레나의 목소리를 듣고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녀가 침실에 직접 찾아온 게 오랜만인 탓이었다.
아팠을 적에도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던 그녀인지라 데미안은 심장이 철렁해졌다.
‘이렇게 빨리……?’
워낙 이미 결정한 일엔 불도저처럼 구는 엘레나라는 걸 잘 알기에 더더욱 겁이 났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들어오시죠.”
데미안은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 엘레나를 맞았다. 엘레나는 바깥에 다녀왔는지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면 요 며칠 나가는 횟수가 제법 늘어 있었다. 아마도 이혼 후 어떻게 생활할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무 자르듯이 갈라서는 건…….’
데미안은 엘레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그녀를 설득해 본 적이 드물었고.
하여 이런 얼빠진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데미안이 말했다.
“나갔다 온 모양입니다.”
엘레나는 말해 무엇하냐는 듯이 소파로 가 앉아 턱짓했다. 앞에 앉아서 얘기 좀 하자는 몸짓이었다.
데미안이 느릿느릿하게 맞은편에 앉았다. 좌불안석으로 있던 중 다짜고짜 서류를 꺼내는 엘레나에 두 눈을 홉떴다.
데미안이 서류를 외면하며 손을 뻗어 거부했다.
“자, 잠깐만요. 아직 저한테는 생각할 시간이…….”
“제가 뭘 꺼낼 줄 알고 그렇게 놀라요?”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이미 이혼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모를 리가 없다.
특히 엘레나가 제 침실을 찾아올 때면 늘 나쁜 소식이 함께였으니까.
데미안은 그녀의 얼굴이 밝으면 밝을수록 그게 더 나쁜 일이란 걸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요 며칠 엘레나의 표정은 몹시 좋았다. 마치 서신을 나누는 존재가 로에나인 줄 모르고 질투했던 때처럼 말이다.
데미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엘레나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래요. 뭐, 알 수도 있겠네요.”
엘레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확인해 봐요. 혹시 내가 빠뜨린 게 있을 수도 있고…….”
데미안은 대뜸 위자료를 이야기하는 것에 울컥해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의 눈가가 촉촉해지려 했다.
엘레나의 환한 미소가 이혼 서류 때문이란 사실에 비통해진 탓이었다.
“그래도 함께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구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음?”
“물론 그간의 제 태도가 부인을 몹시 불쾌하게 했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저도 해명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데미안은 몸져누워 있을 당시 제 삶을 되돌아봤다. 생각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였다.
특히 엘레나가 화를 내며 돌아서는 장면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회귀 후 자신의 행동이 엘레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했을지도 이해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또다시 흔들릴까 봐 무서워 일부러 첩을 들이는 척 행세해 그녀가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게 그녀가 혐오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다른 방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아는 엘레나라면 어떻게든 부부 관계를 좋게 해 보려 노력하려 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는 보기 좋게 또 넘어갈 테니까.
데미안은 울컥했다. 이렇게 이혼당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되돌린 시간들인데, 그녀를 허무하게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데미안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면 엘레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보기로 했다.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라는 남자가 너무 나쁘게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이기적이게도 말이다.
데미안이 비통한 음성을 토하듯 그녀의 손을 다잡았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엘라. 내가 병신 같고 싫겠지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하지만 엘레나는 데미안이 매달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손을 떨치며 말했다.
“아까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정말 알고 있는 거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