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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73)화 (173/177)
  • #173.

    한편 엘레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키드에 당황한 빛을 띠었다. 사실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던 차라 불편하기도 했다.

    “네가 어쩐 일이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키드가 다소 결연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엘레나는 조금 피로해 가볍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혹시 급한 일이니? 그런 게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하고 싶구나.”

    사실 데미안의 일로 엘레나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그가 쓰러지기 전 했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였다.

    다시금 데미안의 목소리가 잔상처럼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제발 나 계속 미워해도 좋으니까. 이혼하자는 말만은 하지 말아 줘, 엘레나.’

    ‘아이를 낳자는 말도 제발 하지 말고. 그건 나보고 널 두 번 죽이라는 말이잖아.’

    ‘내가 어떻게 그래. 여기서 더 널 상처 주란 말은 하지 마, 엘라. 이미 많이 받았잖아.’

    다른 말은 차치하더라도 두 번 죽이는 거라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치 그 자신이 가해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그 말이 자꾸 맘에 걸렸다.

    그간 로에나가 실종 상태라 그와의 문제를 미뤄 둘 수 있었지만 로에나까지 안전하게 돌아오고 나니 다시 데미안의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게 엘레나를 몹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미 그녀는 데미안과 갈라서기로 마음먹은 탓이었다.

    그때 아키드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었다.

    “이혼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벌써 너에게도 들어갔나 보구나.”

    그렇게 입조심을 시켰는데도 새어 나간 모양이었다. 엘레나가 곤란한 얼굴로 아키드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는 이혼하지 않도록 설득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는 이미 데미안과 끝났단다. 번복할 일은 없으니 설득하려 들지 말거라.”

    “…….”

    “이혼하더라도 너와 로에나와는 자주 만날 생각이란다. 어쨌든 마지막까지 어미 노릇을 해 주지 못한 건 미안하고…….”

    사실 이혼을 망설이게 된 건 순전히 아들 내외 때문이었다. 그간 정을 많이 주었는데 이대로 떠나기 아쉬워졌으니까.

    어차피 데미안과는 이렇다 할 감정 교류를 제대로 못 했었다. 최근에 와서야 조금 달라졌지만 그것도 진실을 아는 순간 끝이었다.

    엘레나는 데미안의 곁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자카리가 협박해서였다 한들 그가 사생아를 만든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자신과 상의라도 했다면 이렇게 비참하진 않을 텐데.

    그간 아무것도 모른 채 자카리를 만나 왔다는 사실이 엘레나를 슬프게 했다.

    그때 아키드가 말했다.

    “혹시 아버지의 사생활 때문이신 거라면 해명…….”

    “내가 아이를 못 낳아.”

    엘레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내었다. 애초에 이혼할 때 자신의 상태를 밝힐 생각이라 거침이 없었다.

    이렇게 해야만 상대의 설득을 차단할 수 있을 거란 계산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아키드는 엘레나의 폭탄선언에 두 눈을 홉떴다. 엘레나가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의 사생활은 해명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이가 무얼 했든 이제 나는 상관하지 않으려…….”

    “어머니.”

    아키드가 엘레나의 말을 끊고 가까이 다가왔다. 성큼 다가오니 어릴 적과 달리 몰라보게 자란 게 실감이 되었다.

    엘레나가 그를 올려다보다 낮게 침음했다.

    역시나 데미안을 빼닮은 모습이라서. 그럼에도 그에게 정이 가는 자신이 참 푼수 같았다.

    그가 손으로 입가를 쓸며 말했다. 마치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어머니의 상태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고?”

    엘레나는 아키드가 제 상태에 대해 안다는 말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일은 아무에게도 말해 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아키드는 말문이 막힌 표정을 한 엘레나를 힐끗했다.

    자파르시아와 만났을 당시, 아키드는 엘레나와 데미안 사이의 일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자파르시아가 보여 주었다는 쪽에 가까웠다. 아키드는 마지막엔 제대로 들리지도 않던 자파르시아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 네 부모도 불쌍한 애들이니 용서하거라. 궁금하다면 다시 나를 찾아오고.

    그 순간 아키드는 느낄 수 있었다. 자파르시아가 비전을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허락했음을.

    원래라면 비전이 열리자마자 한 번, 자파르시아와 만나면서 또 한 번이 카운트되는 형식이었다.

    데미안이 말했던 사용법과 주의 사항을 익히게 된다는 건 바로 그 뜻이었다. 애초에 기회는 한 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같은 의미였고.

    아키드는 로에나를 구해 낸 직후 다시 비전을 열람했다. 부모님의 과거가 궁금해서였다.

    그리고 거기엔 자파르시아 석상이 아닌 데미안과 엘레나가 있었다.

    그것도 저를 잉태하고 행복해하는 두 사람이 말이다.

    아키드는 엘레나가 죽고 처절하게 울던 데미안도 보았다. 미쳐 가던 모습은 그뿐 아니라 주변 모두를 피 말리게 했다.

    그리고 회귀에 성공한 데미안이 황제와 대화 후 곧장 엘레나를 확인하러 간 것도, 살아 숨 쉬는 엘레나를 발견하고 남몰래 황궁의 정원에서 울던 것도 모두 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보았다던 게 그때였던 거지.’

    아키드는 일전에 제로니스가 전했던, 데미안이 결혼 전에 엉엉 울었다는 말을 그제야 온전히 이해했다.

    이제 보니 그건 회귀 직후 엘레나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하고 흘린 안도의 눈물이었다.

    아키드는 데미안이 의도적으로 방탕한 척 살아왔던 것까지 확인하자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회귀 전 누구보다 단란했던 부부가 회귀 후 서로를 혐오하는 모습이 상반되면 상반될수록 더더욱.

    아키드가 잠긴 목소리로 서두를 던졌다.

    “이혼하시게 되더라도 이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 * *

    다행히 캐서린은 데미안을 도와 달라는 내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건강도 호전된 상태라 곧장 해도 좋다고.

    혹시라도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해 거절할까 걱정했던 건 괜한 우려였다. 나는 그길로 곧장 데미안에게 찾아갔다.

    데미안은 난데없이 캐서린을 데려오는 것에 당황해하다 그녀가 루이스의 후예라는 말에 더더욱 당황스러워했다.

    “설마 에셀가의 도움을 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가 멀쩡해진 팔을 휘휘 흔들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멀끔하게 돌아온 팔은 언제 잘렸는지도 모르게 미세한 흔적조차 없었다. 캐서린이 물었다.

    “불편하신 데는 더 없으세요?”

    “외상뿐 아니라 마나독도 완전히 사라진 것 같은데. 원상복구라는 게 내상도 포함이었군.”

    “이제 캐서린이 루이스의 후예라는 게 믿어지세요?”

    “그거야 아까부터 믿었다만 직접 눈으로 확인까지 하니 놀랍구나. 게다가 에셀가에서 루이스가 나타날 줄은.”

    정확히는 금술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었으나 데미안은 그렇게만 말했다.

    캐서린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지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전직 성녀다운 말을 내뱉었다.

    “도움이 되어 다행이에요.”

    “진짜 성녀를 몰라봤군요. 이번 일은 하델루스에서도 꼭 보답하겠습니다.”

    데미안이 너스레를 떨며 감사를 표했다. 자신을 구제해 준 캐서린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은 채였다.

    내가 막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볼 때였다. 아키드가 돌연 데미안의 침실로 들이닥쳤다. 그가 데미안의 상태를 보고 짐짓 놀란 눈을 하다 곧 태연히 반응했다.

    “팔이 도로 생기셨군요.”

    “조금 더 놀란 기색을 보여 주면 덧나기라도 하는 거냐? 반응이 너무 미적지근하군.”

    “에셀 영애가 곁에 있기에 상황을 짐작했을 뿐입니다.”

    “하여간 재미없는 놈.”

    데미안이 피식 웃으며 혀를 쯧쯧 찼다. 딱히 불쾌한 느낌은 없는 채였다.

    아키드가 데미안을 힐끗하다 슬쩍 내게 다가와 나가자고 제안했다.

    “잠시 따로 할 얘기가 있습니다.”

    “저랑요?”

    “예.”

    아키드의 얼굴이 평소답지 않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아 데미안과 캐서린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를 따라 침실을 나섰다.

    그가 말없이 어디론가 이끌자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어머니께 가는 중이었습니다.”

    아키드는 그제야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어리바리하게 대답했다.

    어쩐지 삐걱거리는 모습이 이상했다. 갑자기 찾아와 다짜고짜 어머니에게 가자는 게 의아하기도 했고.

    “어머님껜 왜요?”

    내 질문에 아키드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나는 그를 따라 멈추어 시선을 맞추다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제 보니 아키드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 또 생겼나 싶어 심장이 철렁했다.

    “왜 그래요? 어머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걱정스럽게 질문을 이었으나 아키드는 망설이기만 할 뿐이었다.

    데미안에게도 말하지 않고 따로 부른 걸 보면 큰 사고는 아닌 것 같은데 자꾸 우물쭈물하니 불안해졌다.

    “아키드?”

    거듭 재촉하자 아키드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일에 괜히 끼어들어서 일을 크게 만든 것 같아요…….”

    “왜요? 무슨 일인데요?”

    “제가 한 말 때문에 어머니가 쓰러지셨습니다.”

    “네?!”

    나는 멀쩡하던 엘레나가 쓰러졌다는 말에 당황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건강하던 엘레나가 쓰러질까?

    의아해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아키드가 폭탄선언을 이었다.

    “놀라 의원을 부르러 간 사이에 어머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아무래도 가출인 거 같습니다.”

    예? 어머님이 가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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