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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71)화 (171/177)
  • #171.

    나는 하델루스 별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그간 무리하고 있었다는 걸 실감했다.

    안전한 내 공간에 도착하고 나니 잠이 미친 듯이 몰려온 탓이다.

    나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계속해서 몇 수 앞을 생각하며 계획을 변경해 온 터라 피로감이 꽤 쌓였는지 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푹 자고 일어나니 개운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고 일어나는 게 얼마 만인가.

    상쾌함에 기지개를 켠 후 막 세수를 하고 났을 때였다.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엘레나와 아키드가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와 내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잠만 자서 걱정했다. 배고프진 않니?”

    엘레나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밀며 상냥히 물었다. 나는 우유를 호로록 마시다 배시시 웃었다.

    알맞게 달도록 꿀을 타 둔 게 딱 내 취향이었다.

    “맛있어요!”

    “그래도 두 잔은 안 된다. 밥 먹기 전에 입맛 버리니까.”

    “네에.”

    딱히 ‘한 잔 더’를 외칠 생각은 없었지만 일말의 가능성마저 원천 봉쇄당하니 조금은 의기소침해졌다.

    가만 보면 엘레나는 나를 아직도 어린애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게 그녀 나름의 애정 표현이란 걸 알기에 딱히 거북하진 않았다.

    오히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조금 감격스러웠다.

    엘레나가 내 뚱한 반응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더 먹고 싶다면 가져오라 지시하마. 식사 전에 우유 두 잔 정도는 괜찮을 것도 같고…….”

    나는 당장에 설렁줄로 손을 뻗는 엘레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니에요. 어차피 곧 점심 먹을 시간인데요, 뭘.”

    “대신 네가 좋아하는 토마토 스튜와 연어 스테이크로 준비하라 일렀다.”

    “오!”

    내가 해맑게 웃으며 호응하자 엘레나가 그제야 안심하고 설렁줄로 뻗으려던 손을 물렸다.

    ‘어머님도 은근 마음이 여린 타입이라니까.’

    우유로 배를 채울 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나니 아키드가 내게 다가와 다정히 물었다.

    “잘 잤어요?”

    “네, 덕분에 편하게 와서 편히 잤어요. 그것보다 캐시랑 메이벨은 어떻게 되었어요?”

    기절 잠을 잔 터라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몰라서 한 질문이었다. 아키드가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이곳에 안전하게 머물고 있습니다. 코비슈타인이 아티팩트 해제 방법을 알아내는 동안 이쪽에서 맡기로 에셀 성에도 허락을 받았고요.”

    “의식은요?”

    “에셀 영애는 깨어났지만 메이벨의 경우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비슈타인은 아티팩트의 영향인 것 같다 진단했고요.”

    “그렇군요.”

    루이스의 후예인 캐서린이 의식을 먼저 회복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내 외상도 단번에 복구해 냈던 힘이니까.

    반면 메이벨은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가늠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긴 그 난리를 겪었으니 깨지 못한다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됐어. 우선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혼자서 생각한다고 결론이 나올 문제도 아니니까.’

    나는 또다시 생각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 건에 관해선 그 분야의 전문가인 코비슈타인에게 맡기는 게 옳았다.

    아키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음식은 침실로 가져오라 했습니다. 이왕 쉬는 거 좀 더 쉬는 게 좋으니까.”

    “아, 넷이서 같이 먹어도 괜찮은데. ……어라?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보이질 않네요?”

    나는 뒤늦게 데미안이 없음을 깨닫고 주변을 살폈다.

    이런 때는 빼지 않고 늘 끼었던 아버님이었는데.

    원래라면 제일 먼저 와서 짓궂은 농담이나 하고 그걸 말리는 엘레나에게 깐족거렸을 텐데 이상했다.

    눈치껏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기) 해야 할 때도 구태여 끼어들어 귀찮게 굴지 않았던가.

    “그게…….”

    내 질문에 아키드가 곤란한 표정을 했다. 뒤이어 엘레나가 무심히 말했다.

    “그쪽은 환자란다. 아마 오고 싶은데 못 와서 답답해하고 있을 거다.”

    “아버님이 다치셨다고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아버님이 다쳤다는 소식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어쩌다가 그러신 거예요?”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에 돌연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반응에 내가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렸음을 한발 늦게 깨달았다.

    ‘물으면 안 되는 거였나?’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려 눈치를 보았다. 아키드는 상황을 잘 모르는 듯했다.

    반면 엘레나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어머님은 아는 눈치인데.’

    왠지 묻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키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많이 다치셨어요?”

    “직접 가서 뵙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마침 아버지도 로에나 소식이 궁금할 테고.”

    아키드가 엘레나를 힐끗 쳐다보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아키드도 엘레나와 시선을 못 마주쳤다.

    ‘나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두 사람의 분위기가 꼭 내가 처음 빙의했을 때와 같았다. 서로에게 데면데면해 보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수상했다. 물론 그때와는 결이 다른 어색함이기는 한데.

    나 역시 뒤늦게 내 정체가 생각나 어색해지기는 마찬가지인 상황.

    일단 가장 알기 쉬운 데미안에게 먼저 물어보는 게 좋을 듯해 순순히 아키드의 손을 잡았다.

    “그래. 다녀오거라.”

    엘레나는 함께 가자고 할까 두려운 사람처럼 쏜살같이 사라졌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아키드에게 물었다.

    “혹시 아버님이 어머님 때문에 다치신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정확한 건 두 분 모두 말씀이 없으셔서.”

    딱히 물어본 적도 없는 모양이다.

    나는 그의 무심한 반응을 가만히 살피기만 할 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어쩐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데미안의 침실 앞에 도착하니 아키드가 자리를 피하며 말했다.

    “저는 잠시 들를 곳이 생겨서. 먼저 만나고 있어요.”

    “아, 네.”

    평소라면 무조건 같이 들어가려 했을 텐데 이상했다.

    ‘아키도 좀 이상한데.’

    뭔가 나 빼고 다 삐걱거리는 이상한 상황에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오히려 삐걱거려야 하는 건 나인데 다들 하나같이 이상했다.

    역시 답은 아버님뿐인가.

    우리 아버님은 관심을 주면 입을 술술 여는 깃털 같은 분이시지.

    나는 확신의 주둥이를 떠올리며 노크와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접한 데미안의 상태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버님, 파, 팔이……!”

    “여어, 왔냐.”

    데미안이 성한 팔을 들어 나를 반겼다. 다친 사람치고는 쾌활한 반응이었다.

    나는 비어 있는 그의 한쪽 소매를 보며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다쳤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신체 일부가 사라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안 그래도 언제 오나 기다렸지. 걸음이 너무 느린 거 아냐?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군.”

    그가 시답지 않은 시비를 걸며 히죽 웃었다. 나는 한달음에 데미안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괜찮아요? 아닛, 어쩌다가……!”

    쏟아지는 질문에 데미안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내 머리를 헝클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궁금한 게 아주 넘치는구나.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이렇게 깨자마자 오다니 영광이군.”

    “웃음이 나오세요?”

    “그럼 웃지, 울어? 실종된 며늘아기가 무탈히 돌아왔는데 죽상을 하고 있을 순 없지.”

    “아버님은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입술만 달싹이고 말이 없자 데미안이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당장이야 불편하겠지만 금방 적응해 낼 테니.”

    “그걸 말이라고…….”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불쑥 떠오르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어어? 괜찮다니까 그러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자 그가 외려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했다.

    “설마 우는 게냐?”

    데미안의 목소리가 한층 진지해졌다. 그가 걱정스러운 투로 몇 차례 더 말을 걸 때였다.

    나는 생각하던 것을 끝내고 불쑥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적응하실 필요 없어요.”

    “응? 왜? 설마 네가 평생 수발이라도 들어 주려고? 그건 좀 감동이다만 사양하…….”

    데미안이 언제 다정했냐는 양 인상을 찌푸리며 장난을 치려 했다. 물론 내가 본론을 꺼내는 게 더 빨랐다.

    “루이스가 있어요.”

    “엉?”

    데미안은 다짜고짜 루이스를 언급하는 말에 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미 멸문된 루이스를 갑자기 거론하니 의아해진 것이다.

    나는 얼빠진 표정을 한 그의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그 애라면 아버님의 팔도 돌려놓을 수 있을 거예요.”

    마침 캐서린, 그러니까 진짜 메이벨이 이곳에 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괜찮아지고 나서 치료를 부탁하면 데미안의 팔도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내 진지한 반응에 데미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환상의 동물이라도 찾아올 기세로군. 감격이긴 하다만 루이스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사라진 게 아니에요. 사라졌다면 빛 속성 마법사가 아예 없어졌을 거예요.”

    “무슨 뜻이지?”

    데미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것도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데미안에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우선 상대의 의중을 먼저 들어 봐야 해서요.”

    “알아듣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새아가.”

    “저를 믿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문으로 향했다. 캐서린에게 가 볼 생각이었다.

    “새아가!”

    뒤에서 데미안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완전히 나가기 전 문틈으로 손을 한 번 흔들어 그의 만류를 저지했다.

    그리고 사용인들에게 물어 곧장 캐서린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의식을 회복했다고 하니 어떻게 된 건지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막 그녀의 침실에 갔을 때였다.

    “캐시?”

    나는 텅 빈 침실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캐서린이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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