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 내 동생 놈의 추종자가 또 미친 짓을 했나 보군. 그 녀석도 어지간히 인간들을 현혹하길 좋아한단 말이지.
목소리는 석상에서 들리는 듯했다. 이곳에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라곤 석상뿐이었으니까.
아키드가 석상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자파르시아인가?”
― 건방지구나.
책망과는 달리 석상은 강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목소리만으로도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 하긴 일전에 왔던 네 아비도 꽤나 건방졌었지. 내가 이래서 하델루스들을 좋아해.
좋아하는 이유가 몹시 이상했다. 감상에 젖은 듯한 음성에선 하델루스를 향한 애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아키드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꾸물거릴 시간도 없었고.
“제가 알고 싶은 건 로에나를 구하는 방법입니다.”
― 허참, 이런 점도 네 아비랑 똑같구나. 하긴 그래서 네 어미를 살렸지.
“?!”
아키드는 어머니란 말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데미안과 제 생모 사이에 뭔가가 더 있었다는 게 놀라운 탓이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생모가 누군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아키드는 생모를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제이드 무리와 만나기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
쉐리 말로는 길에 쓰러져 있길래 쓸 만해 보여 주워 왔다고 했다. 그 덕분에 객사는 면했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어차피 중요한 기억이 아니니 지워진 거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데미안이 생모를 살렸다고 하니 의아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 말 그대로다. 죽은 네 어미를 살리려고 그놈이 비전을 이용해 시간을 돌렸거든.
“!!”
그 말인즉, 데미안이 비전을 통해 시간을 돌리는 마법서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아키드는 이상함을 느끼며 물었다. 시간을 되돌리면서까지 살린 생모가 정작 보이질 않는 탓이었다.
“그럼 제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 어디 있긴. 여전히 그놈 옆에 있지. 물론 회귀하기 전과 달리 사이가 무척 나빠진 것 같다만, 그건 그놈 응보고.
“……?!”
아키드는 비전 속 자파르시아의 음성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말은 자신의 생모가…….
아키드는 뒤따라오는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동안 자신이 데미안의 사생아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차라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설마 제 출생에 이 같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으니 당연했다. 그때 자파르시아가 말했다.
― 애초에 넌 이곳엔 없었을 놈이었다. 네 아비가 시간을 되돌릴 때 하필 네가 옆에 있어 함께 돌아왔거든.
“…….”
― 아마도 네 안의 하델루스의 힘이 강한 덕을 본 거겠지. 하여튼 옛부터 운이 좋다니까.
자파르시아가 그 말을 끝으로 웬 검을 아키드의 앞에 소환했다. 비전 속 공간은 오래 있을 수 없는 탓이었다.
몸체가 온통 새까만 검에는 알 수 없는 고대어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 이걸 가져가거라. 마법이 새겨진 검이니 그 빌어먹을 예식이 치러지는 곳에 꽂아 버려라. 이참에 그 음습한 지하를 없애 버리는 게 낫겠어.
난데없이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출생의 비밀을 까발려 놓고는 대뜸 본론이었다.
충격에 빠진 아키드가 검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자 자파르시아가 다른 일 때문이라 여겼는지 화제를 돌렸다.
― 네 아내라면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죽지 않을 테니까.
“아.”
― 물론 네가 제때 안 막으면 곧 죽을 거 같긴 하구나.
“!!”
자파르시아의 말에 아키드가 냉큼 검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자파르시아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 예나 지금이나 하델루스들은 연인 문제에선 영 맥을 못 춘다니까. 하나에 꽂히면 다른 데는 볼 생각도 안 하니, 원.
들릴락 말락 한 마지막 당부와 함께 그가 무언가 더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키드는 신전에 돌아오자마자 검을 꽂아 넣어 예식을 막기 바빴으니까.
때마침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문 때문에 당시 로에나의 상황도 알 수 없어 초조하기만 했었다.
* * *
“아, 그건…….”
아키드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난감한 얼굴로 자꾸만 위를 힐끗거렸다.
나는 그 모습이 의아해져 덩달아 시선을 올리다 깜짝 놀랐다.
신전이 무너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타콤이 무너지는 중인 것 같았다.
“이, 이게, 뭔?”
“우선 안전하게 위로 올라간 후에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키드가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나는 침착하지 못했다.
“네?”
“아까까지만 해도 카타콤이 지상으로 올라가기 직전이었거든요.”
“네에?”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너무 놀라니 네, 라는 의문 가득한 반응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카타콤은 인트라비아 1지구에 견줄 만한 규모였다. 이게 아무 대책 없이 지상으로 올라가면 위는 초토화될 터.
내가 어리바리한 얼굴로 쳐다보자 아키드가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카타콤이 힘을 잃고 무너지는 속도가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빨라졌으니까요.”
“아, 다행이…… 아니라, 뭐라고요? 무, 무너진다고요?”
그럼 얼른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눈치 없이 눈물, 콧물을 빼며 시간을 지연시켰다는 자책감에 허둥거렸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어, 어떻게 하지? 돌아가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데! 그럼 이대로 같이 매장되는 거예요, 우리?”
함께 순장되기를 바랐던 적은 없었는데.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현 사태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이에 아키드가 내 손을 붙들며 만류했다.
“진정하십시오. 올라갈 방법은 충분하니까. 키나를 제게 보냈던 걸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거야 나탈리 후작에게 속은 줄 몰랐을 때 보냈던 거라…….”
제이드가 아닌 나탈리 후작이라면 제대로 된 흑마법을 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예상이 들어맞았는지 아키드가 순순히 대답했다.
“예. 코비슈타인의 아티팩트가 카타콤을 강제로 열었을 때부터 일이 틀어졌다는 건 진즉 눈치챘습니다. 열림과 동시에 카타콤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으니까요.”
“아, 역시…….”
카타콤과 인트라비아가 전복될 뻔한 건 나탈리 후작의 계략이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아델쿠스를 지상으로 데려가 저들만의 광영을 찾으려던 계획이었겠지.
나는 그녀에게 보기 좋게 당했다는 사실에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하마터면 목숨도 잃고, 세계도 파괴될 뻔했다. 오싹해 팔을 쓰는데 아키드가 말했다.
“일단 코비슈타인이 만들어 둔 입구까지 돌아가야 합니다. 제가 돌아갈 때까지 열어 두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요.”
탈출구가 있다니 다행이었다.
“아, 잠시만요. 캐서린과 메이벨도 데리고 가야 해요.”
나는 도망치려다 말고 제단 위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도망갈 때 가더라도 두 사람은 챙겨야 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예식이 진행될 때 저들에게 이상한 빛이 나던 것 때문인 듯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분명 목에 이상한 구속구를 채운 채였어.’
예식이 시작되자마자 가시화된 걸 보면 고대의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아마 내 배를 뚫었던 지팡이와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문제는 나와는 달리 이게 캐서린과 메이벨을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쇠사슬로 연결되던 걸 똑똑히 보았다.
분명 평범한 방법으론 해제가 불가능할 터.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천재 아티팩터인 코비슈타인뿐이리라.
그때 아키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에셀 영애는 그렇다 쳐도 메이벨은 굳이 데려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사태의 원흉인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게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설명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랬다간 캐서린도 위험해질 수 있어서요.”
아티팩트는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물건이었다. 괜히 멋도 모르고 건드렸다간 크게 위험할 수 있어 하는 말이었다.
‘나도 조금만 늦게 반응했어도 같이 묶여 버렸겠지.’
중간에 기지를 발휘해 지팡이의 힘을 끊어서 다행이었다.
“더 이상 오염으로 장난질하지는 못할 거예요. 저 구속구가 메이벨의 힘을 묶은 것 같거든요.”
나는 내내 옆에서 종알거리던 정령들의 말을 전해 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정령이 직접 확인했으니 확실했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둘 다 데리고 가야만 했다.
나는 정령들에게 캐서린과 메이벨의 운반을 맡기며 말했다.
“아마 코비슈타인이라면 저 구속구의 정체와 해결책도 알아낼 거예요.”
“알겠습니다.”
아키드가 순순히 대답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고 걸어가려는데 순간 몸이 크게 휘청였다. 다행히 아키드가 나를 붙들어 준 덕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막았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바들바들 떨리는 몸에 얕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음?”
“역시 안 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내 발이 땅에서 멀어졌다. 그가 나를 공주님 안 듯 번쩍 안아 올린 덕이었다.
“아, 괜찮아요……. 잠시 놀라서,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제가 안심이 안 돼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가게 해 주세요.”
아키드는 나를 단단히 고정하며 단호히 말했다. 나는 열었던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차라리 이편이 빨리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아키드에게 몸을 맡겼다.
“그럼 부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