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로에나와 아키드가 재회하기 전.
코비슈타인의 도움으로 카타콤에 도착한 아키드는 곧장 로에나부터 찾기 시작했다.
카타콤이 생각보다 넓고 복잡한 데다 기운을 읽기도 어려워 한참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떨어진 곳이 하필 로에나가 있던 신전과는 거리가 제법 있는 곳이었다.
그가 막 흑마법사들의 감옥을 훑을 때였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제이드가 감옥에 있는 탓이었다.
온몸이 새까매진 채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몰골이었다. 겉보기로는 죽은 것 같았다.
아키드는 로에나의 서신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카타콤에서 제이드를 만났어요. 마침 중간 목적이 같아서 협조하게 되었고요.]
분명 둘이 협조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제이드가 이곳에 있다는 건…….
다급해진 아키드가 감옥을 나서려는 때였다.
“아키드.”
실낱같이 가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아키드가 우뚝 멈추어 뒤를 돌자 감겨 있던 제이드의 눈이 반쯤 떠 있었다.
“살아 있었나.”
“이걸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 곧 죽을 거야.”
제이드가 제 죽음에 대해 초연하게 말했다. 그도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아키드는 제이드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엠버가의 사생아인 것을 떠나서 그의 삶이 기구한 탓이었다.
“나탈리 후작이 그런 거냐?”
“뭐, 그렇지.”
“…….”
“벌 받나 보다. 이왕이면 쉐리 손에 죽어 주었어야 했는데. 쿨럭.”
“쉐리라면 곧 올 거다.”
“무섭네…….”
진짜로 온다는 말에 제이드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농담을 던졌다.
이미 쉐리와 실드의 용병들이 뒤따라오기로 했었다. 쪽수에서 밀리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고, 그들만큼 음지를 잘 아는 자들이 없는 탓이었다.
아키드가 제이드 앞에 신호기를 놓으며 말했다.
“신호기를 두고 갈 테니까 쉐리가 올 때까지 버텨 보든가.”
“못 버텨. 내 몸에 흐르는 피를 다 뽑지 않는 한 무리라고.”
“흑마법인가 보군.”
“그래. 또 같은 수법에 걸린 나도 참 바보 같지 않냐? 이럴 줄 알았으면…… 쿨럭!”
제이드가 말하다 말고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흥건한 피를 토하고도 그는 태연했다.
사실 제이드는 나탈리 후작에게 공격당한 직후 전생이 떠올랐다. 그때에도 그는 이렇게 버려졌었다.
아키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못 버틴다 해도 난 가야 해.”
제이드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아, 인마. 너한테 내 임종을 지켜 달란 말을 할 정도로 내가 염치없는 놈은 아니지.”
“알면 됐고.”
아키드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려는 때였다.
“아내를 찾으러 왔지?”
“그래.”
“아마 신전에 있을 거다. 서쪽으로 쭉 가면 보이는 건물.”
서쪽이라면 그가 가려던 방향과는 반대였다. 아마 제이드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헛걸음을 계속했을 터.
“고맙다.”
“별말씀을.”
“정말 방법이 없나?”
돌아서려던 아키드가 거듭 되물었다. 제이드는 그게 속없이 기뻤다.
“글쎄. 네가 나탈리 후작을 죽여 주면 좀 달라질 수도 있겠다. 그 여자의 피가 나를 죽이고 있는 거라.”
물론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흑마법사가 된 순간부터 그의 목숨은 아델쿠스에게 종속된 것.
아델쿠스의 소환을 막지 않으면 그는 아델쿠스의 먹이가 될 터였다.
살기 위해선 아예 흑마법과의 연을 끊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강력한 신성력이 필요했다. 가령 프로디움에서 나눠 주는 성수 같은 정제된 힘이.
하지만 북부의 성수를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미리 상비용으로 남겨 둘 수도 없는 것인데.
이 사실을 모르는 아키드가 말했다.
“안 그래도 죽이러 갈 참이었어.”
로에나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예식에 제물로 사용하려는 자였다.
살려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이드는 제게 가망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 버텨 볼게, 그럼.”
“버틴다 해도 쉐리 손에 죽을지도 모르고.”
“그것도 좋네.”
제이드가 씨익 웃으며 어서 가 보라는 몸짓을 취했다. 아키드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 신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 *
제이드는 멀어지는 아키드를 보며 참았던 기침을 연거푸 내뱉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게 너라서 다행이다, 아키드.”
그 말과 함께 제이드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던 찰나였다.
“이 개자식……!”
익숙한 욕지거리와 함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제이드가 힘겹게 눈을 뜨니 쉐리가 보였다. 그것도 눈물범벅인 채로.
그녀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며 으르렁거렸다.
“우릴 버려 놓고 한다는 게 고작 이런 비참한 죽음이냐? 차라리 거리를 전전하다 같이 동사하는 게 낫지, 이 썩을 놈아!”
하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마지막으로 만난 이가 쉐리일 줄이야.
제이드는 피곤해졌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언제는…… 혼자 배부르게 지냈다고 죽여 버리겠다더니.”
“죽일 거야! 죽여도 너는 내가 죽일 거라고! 애먼 놈한테 죽게 둘 줄 알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쉐리가 노발대발하며 제이드를 힐난하는가 싶더니 이상한 물약을 입에 처넣었다.
“이 개자식, 남의 손에 죽기만 해 봐라!”
“웁웁!”
제이드는 놀라 거부하려다 말고 눈을 홉떴다. 그녀가 과격하게 제 입에 쑤셔 넣은 게 성수인 탓이었다.
놀라 눈을 부릅뜨자 쉐리가 말했다.
“다 처먹어! 내가 보존 마법까지 걸어서 아끼고 아껴 둔 성수니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아마도 성수가 피로 회복과 해독에 좋은 걸 알고 냉큼 먹인 것 같았다.
하필 그게 제이드의 상태를 호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제이드는 열심히 성수를 받아 마셨다. 살고 싶었기에 더더욱 갈급했다. 목을 타고 들어오는 느낌이 꽤 좋았다.
“이 새끼, 욕심 더럽게 많네. 다 처먹으라니까 진짜 다 처먹었잖아?”
쉐리가 또 다른 성수의 뚜껑을 열며 히죽 웃었다. 단번에 제이드의 상태가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인 모양이었다.
제이드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쉐리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녀에게 구해질 줄은 몰랐기에 더더욱.
‘늘 걸리적거리기만 했는데.’
그는 그녀가 저와 아키드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생각했었다.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으나 속으로 몇 번이고 그녀를 버리고 싶었었다. 결국 버렸고.
“고맙다.”
“고마워하지 마. 너 좋으라고 준 거 아니니까. 내가 이자까지 열 배로 물려서 다 받아 낼 거야.”
“아까는 죽일 거라며.”
“……그래, 죽일 거야!”
“앞뒤가 다르잖아.”
“너도 예전에 나 살려 줬으니까 살려 준 거야. ……으이씨, 시끄러우니까 입 닥쳐.”
쉐리가 민망했는지 성수 병을 그의 입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 탓에 제이드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남은 성수까지 다 털어 넣은 쉐리가 부하에게 말했다.
“이 개자식 당장 위로 데려가서 목숨줄 붙어 있게 만들어! 얘 죽으면 네놈들 목도 딸 테니까!”
“옙! 누님!”
용병들이 거수하곤 제이드를 들것에 싣기 시작했다.
* * *
제이드의 말대로 서쪽으로 향하니 신전 하나가 보였다. 아키드는 곧장 소란이 이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본 것은 제단 위에 묶인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로에나였다.
“!!”
생기 하나 없는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키드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
웬 지팡이가 그녀를 꿰뚫고 있는 걸 보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쾅―!
아키드가 제단으로 달리다 결계에 부딪쳐 튕겼다.
몇 차례 힘을 사용해 결계를 부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 힘마저도 먹어 버리는 기이한 결계인 탓이었다.
게다가 저쪽에선 이쪽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만한 소란을 일으켰는데도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마도 예식에 집중하기 위해 외부를 완전히 차단한 듯했다.
“젠장!”
아키드는 눈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눈앞에 쓰러져 있는 로에나를 보니 평정심이 생기질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그녀가 죽을 것만 같았다. 벌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가 돌연 제 뺨을 세게 갈기며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야 해.”
이렇게 정신 놓고 있을 새가 없었다. 아직 서로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았다.
아키드는 곧장 인장 반지를 소환했다. 본능적으로 지금 써야 한다고 느낀 탓이었다.
‘제발, 제발……!’
아키드가 파들파들 떨며 열쇠를 발동시켰다. 열쇠가 하델루스의 힘에 반응해 웅웅, 울리는가 싶더니 눈앞이 새까매졌다.
곧이어 시야가 트였을 땐 웬 낯선 공간에 놓여 있었다. 상하좌우의 구분이 없는 듯한 공간.
눈앞에는 익숙한 형상을 한 용 석상만이 보였다. 그 순간 뇌리를 타고 낯선 음성이 들렸다.
― 또 왔구나, 하델루스야.
마나가 잔뜩 실린 목소리에 절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그 울림에 짓눌리듯 무릎이 꿇려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