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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67)화 (167/177)
  • #167.

    내가 꺼낸 건 흰둥이가 가져온 휴대용 가방에 있던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아까 카타콤에 오기 전 혹시 몰라 챙겼던 것이었다.

    ‘이게 사용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심호흡했다. 구속구로 정령의 힘을 사용하지 못한 끔찍한 경험 이후, 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아티팩트였다.

    발동하면 구속구의 힘이 사라지게 된다. 구속구에 따라 유지 시간은 천차만별이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문제는 이 지팡이가 아델쿠스의 유물이라는 점인데.’

    고대 용이 만든 아티팩트에 맞서기엔 역부족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기대 볼 만한 건 이 아티팩트가 하마르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하마르가 열 개나 들어간 아티팩트라고.’

    하마르는 드래곤의 피가 담긴 보석이었다. 내가 데미안을 꼬셔 그의 창고에 있던 하마르를 탈탈 털어 만든 아티팩트였다.

    드래곤에 대항하려면 그에 버금가는 아티팩트여야 할 터.

    ‘제발, 제발 부탁이야! 잠시만이라도!’

    나는 속으로 간절히 빌며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 * *

    아키드는 카타콤으로 뛰어내리려다 말고 코비슈타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코비슈타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가, 갑자기 수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수식이 바뀌다니?”

    “이대로라면 카타콤이 지상으로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지상에 있던 건물들은……!”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저 아래 있는 게 위로 올라온다는 건가?”

    “크, 큰일 났습니다! 아무래도 대공자비님께서 당하신 것 같습니다. 흑마법에 웬 주술이 끼어 있던 모양이에요.”

    “!!”

    아키드는 코비슈타인이 횡설수설하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을 따라 아래를 내다보니 점점 지상으로 올라오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인트라비아가 초토화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

    “로에나?”

    그때 아키드가 손목을 내려다보며 아연히 중얼거렸다. 로에나가 선물했던 팔찌에서 정령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그건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아키드는 로에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심장이 철렁했다.

    ‘이 팔찌는 제가 힘을 떼어 둔 거라 웬만해선 힘을 잃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만약에 팔찌에 문제가 생긴다면 아마 그만큼 제가 벅찬 상황이라는 뜻일 거예요.’

    “젠장!”

    아키드는 로에나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코비슈타인의 멱살을 붙들었다.

    “어떻게든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아래는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예, 예옙! 예? 이대로 내려가시겠다고요?”

    코비슈타인이 대답하다 말고 놀라 되물었지만 이미 아키드는 아래로 뛰어내린 후였다.

    코비슈타인이 안절부절못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이내 결심한 얼굴로 아티팩트에 손을 대었다.

    그러곤 아키드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오래는 못 버팁니다!”

    * * *

    코비슈타인은 천재가 분명하다.

    나는 아티팩트를 발동하자마자 지팡이에 흡수되던 힘이 멈춘 게 느껴졌다.

    다행히 내 생각대로 하마르가 적절히 먹혀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힘을 빼앗기고 배까지 뚫린 터라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 더럽게 아파.’

    나는 지팡이를 힐끗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죽어 본 경험은 있지만 배가 뚫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둘 다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아.’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아무래도 끝이 보이는 듯했다. 배가 너무 아파서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사이 정령의 도움으로 구속구가 풀린 흰둥이가 포효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나탈리 후작의 목을 뜯어 버렸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절명한 나탈리 후작이 쓰러졌다.

    그것을 본 흑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흰둥이는 한 명도 놓치지 않았다.

    때마침 주변에 지진이 크게 일었다. 벌어진 땅 틈으로 우왕좌왕하던 흑마법사들이 잡아먹혔다.

    그사이 정령들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 로에나, 괜찮아?

    ― 아아아, 안 돼. 죽으면 안 돼.

    파르르 떨리는 나비들의 더듬이가 애처로웠다. 평소였다면 잔뜩 놀려 줄 텐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제사장 역할이던 나탈리 후작이 죽었음에도 예식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제단이 붉게 물들며 문에 힘을 제공하고 있었다.

    문틈으로는 거대한 발톱이 당장에라도 나올 것처럼 문을 부여잡고 있었다.

    ‘역시 시전자가 죽는다고 멈추진 않는구나.’

    나는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없애야 한다는 걸 느꼈다. 지팡이에 몸이 꿰뚫리는 순간, 이게 진짜구나 싶었으니까.

    정령들은 지팡이 주변에 모여들면서도 쉽사리 그것을 부수지 못했다.

    지팡이를 없애면 그나마 막아 둔 곳이 벌어지며 출혈이 심각해질 걸 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지팡이를 없애든 없애지 않든, 나는 가망이 없었다.

    애초에 배가 뚫린 채 힘이 빨리던 상황이었다. 원래라면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러니 정령들에게 어서 지팡이를 부수라고 하는 게 맞는 일인데, 자꾸만 망설여졌다.

    두고 온 한 사람 때문에.

    ‘아키드한테 미안하다고도 못 말했는데.’

    이대로 영영 이별이라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눈물로 흐려졌다. 차마 그냥 하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못한 채 맴돌았다.

    “흑, 흐읍.”

    기어이 내뱉어지는 건 울음뿐이었다. 정령들이 많이 아프냐며 같이 울먹거렸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흐느끼며 마지막 말을 남기기 시작했다.

    “흡, 또다시 이별을, 큽, 아, 알게 해서 미안해.”

    ― 마, 말하지 마! 사, 상처가 벌어진단 말이야!

    ― 하지 마!

    정령들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내 입을 막으려 했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말을 이었다.

    “너희를 만나서, 다, 다행이야. 덕분에 이만큼, 흐, 살 수 있었어.”

    ― 흐어엉!

    정령들이 마지막을 직감하고 울기 시작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아버, 아버님이랑 어머님께 싸, 싸우지 말라고 해 줘.”

    ― 응, 으응. 흐읍.

    ― 싫어! 네가 직접 말하면 되잖아! 왜 마지막인 것처럼 굴어!

    “그리고……. 아키드한테, 흡, 미안, 미안했다고, 그, 그리고 사랑한다고 전해 줘.”

    ― …….

    “준비됐어, 난.”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음성을 마지막으로 두 눈을 감았다. 정령들이 흐느끼는 소리와 흰둥이의 포효가 신전을 가득 울렸다.

    잠시 후, 정령들이 지팡이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유히 누운 채 내 임종을 기다렸다.

    나탈리 후작의 말대로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할 영혼이었다.

    어쩌다 보니 흑마법에 의해 유이나로 환생했고, 그 덕분에 아키드의 입장에서 상황을 헤아릴 수 있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흑마법에 다시 한번 노출되어서인지 로에나로 살았던 시절이 머릿속에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사랑받으면서 컸던 내 모습은 유이나와는 전혀 달라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한 장면.

    ‘아, 그래서였구나…….’

    나는 떠오른 기억에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처음 결혼을 결심하게 된 사건이 방금 떠오른 참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지.’

    에이프릴 후작이나 쌍둥이나 나를 품에 넣고 안 놔주고 싶어 했다.

    그런 자들이 순순히 결혼시켜 준 게 의아했는데 방금 그 이유를 알고 말았다.

    ‘나 생각보다 불도저였네.’

    청혼장과 동봉해 온 초상화만 보고 반해서 시집왔을 줄은 정말이지 생각도 못 했다.

    에이프릴 후작과 쌍둥이가 말려도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그 탓에 아키드의 출신 이야기는 아예 듣지도 못한 것 같고.

    사실 들었다 해도 상관없다 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때부터 심각한 얼빠였으니까.

    사실 우리 사이가 틀어진 건 다른 문제였다.

    ‘하긴 한술 더 떠 바닥을 구르며 울어 젖혔으니 세 사람이 감당할 수 없었겠지.’

    오냐오냐 키워진 탓에 나는 엄청난 떼쟁이가 따로 없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왜 죽는 순간에 흑역사가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간 수치사로 먼저 죽을 것만 같았다.

    아, 제발 그만해.

    나는 울상을 지으며 멈추라고 중얼거렸으나 떠오르는 기억들을 막을 순 없었다.

    뒤이어 아키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던 상황과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지까지 되새겨지자 이제는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기억나게 할 거면, 좀만 더 살려 주라고……. 이대로 가면 너무 억울하잖아.’

    돌고 돌아 다시 아키드를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쉬웠다. 아까까지는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스스로 다독였으나 지금은 반대였다.

    후회스러웠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대의고 뭐고 그냥 나부터 살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내 인정하기로 했다.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그래도 다시 아키드의 부인으로 살 수 있어서 좋았어.’

    나는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며 온몸의 힘을 탁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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