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62)화 (162/177)

#162.

“에단입니다. 세체르를 잡아 왔습니다.”

아키드는 세체르라는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뒤에서 데미안이 이마를 짚으며 “쟤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은데” 하고 중얼거리는 건 들리지도 않았다.

세체르는 방으로 들어오다 말고 데미안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찰나의 동요라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정확히는 아키드가 길길이 날뛰어 그럴 새가 없었다는 뜻이다.

아키드는 곧장 포박된 세체르의 멱살을 잡으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로에나가 어디 있는지 말해.”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네가 로에나와 제례 시작 전 마지막으로 만났으면서 상관이 없다?”

아키드가 윽박지르자 세체르가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토해 냈다.

“정말입니다. 이번 사건과 저는 정말 관련이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당장 목에 칼이 들어가야 말할 텐가?”

“큽!”

세체르는 조여 오는 숨통에 밭은 숨을 내뱉으며 바르작거렸다. 아키드가 당장에라도 목을 비틀 듯이 조인 탓이었다.

데미안은 이래선 추궁도 어렵다 판단하고 입을 열었다.

“그만해라, 아키드.”

“…….”

“어서 말리지 않고 뭣들 해!”

아키드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데미안이 호통을 쳤다.

이에 곁에 선 제널드와 에단이 아키드의 양팔을 붙들어 강제로 세체르와 떨어뜨렸다.

저래선 세체르가 말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인 탓이었다. 데미안은 콜록거리며 숨을 거칠게 쉬는 세체르에게 물었다.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텐가?”

“저는 그저 대공자비님의 오해를 풀어 드렸을 뿐입니다.”

“오해?”

“그렇소! 대공자비님께서 본인이 흑마법의 영향을 받아 다른 몸에 빙의한 줄 알고 계시기에 아니라 말씀드렸을 뿐이요.”

“이건 또 뭔 소리지?”

데미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로에나에 관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 탓이었다.

반면 아키드는 노파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 굳어 버렸다. 이를 보지 못한 세체르가 말을 이었다.

“그저 운이 조금 나빠 잠시 다른 세계에 환생했다 돌아왔을 뿐입니다. 하여 본인 몸에 다시 돌아온 거라고 말씀드렸을 뿐이라고요.”

“!!”

“아키드, 너는 이게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느냐?”

데미안은 아키드에게 질문하다 그의 얼굴이 파리한 것을 보고 이 일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아키드는 혼란스러웠다. 이때 세체르와 아키드의 만남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에단이 말했다.

“아니, 그럼. 우리 작은 마님이 다른 세계에 갔다가 오시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그 흑마법인지 뭔지 때문에?”

“정확히는 과거로 돌아오신 겁니다. 원래라면 전염병으로 진즉 죽었어야 할 영혼이니까요.”

세체르가 연달아 폭탄선언을 내뱉었다. 죽었어야 했다는 말에는 다들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아키드는 이제야 로에나가 왜 그때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본인이 ‘유이나’인 것을 밝힐 때조차도 두려워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자신이 실은 로에나 본인이었다니 충격이 클 수밖에.

아키드가 혼란에 빠진 사이 데미안은 세체르에게 그간의 정황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메이벨이 실은 캐서린 에셀이며, 그녀가 금기를 둘이나 어겼다는 말에는 기가 찼다.

물론 현 캐서린 에셀이 과거 루이스였다는 건 세체르도 알지 못했다. 그건 회귀한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으니까.

“용케 이런 엄청난 일을 숨기고 있었구나. 제대로 한 방 먹었어.”

데미안은 생각이 많아졌다. 특히 로에나가 여러 시간 선을 오갔다는 말에는 가슴이 철렁했다.

시간을 돌린 건 그도 마찬가지인 탓이었다. 물론 부작용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어쩐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싶더라니…….’

로에나는 환생과 회귀를 반복한 덕에 문제를 영리하게 해결할 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데미안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역시 우리 새아가는 천재였어.’

비범한 경험까지 갖추었으니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리라.

특히 회귀하고도 바보짓을 일삼았던 자신과 비교하면 정말 영리한 아이였다.

흑마법과 달리 비전은 암룡 자파르시아의 마나가 담긴 마법서였다.

마법을 창조한 용의 마법서인 만큼 안전성은 확실히 보장된 것이니 금기를 어긴 사례와는 시작부터 달랐다.

하지만 이렇듯 애먼 영혼을 다른 세계 또는 다른 시간 선으로 튕기는 일은 조금 눈여겨보게 되었다.

게다가 특정 경험 이후 전생을 기억하게 된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데미안이야말로 기억을 가진 채 회귀한 상태였다. 하지만 엘레나는 달랐다.

그녀는 이전 삶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기억한다면 그가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온 것에 대해 분노하며 영영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숨이 넘어갈 때조차 아이를 부탁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유언을 알면서도 시간을 돌린 그였다.

데미안은 엘레나가 부디 전생을 기억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흑마법과 달리 비전은 그러한 부작용은 없을 터였다.

그는 문득 아키드를 보며 두고 온 아이를 생각했다.

‘그 아이가 자랐다면 저렇게 자랐을 테지.’

이상하리만치 저를 닮아 가끔 소름이 돋곤 했다.

그게 그의 죄책감을 불러와 괜히 더 아키드에게 냉랭하게 굴기도 했었다.

방계 쪽 사생아라고 하기엔 강한 힘을 타고나서 더더욱 그를 번민하게 했으니까.

저가 놓고 온 아이도 자라면 저렇듯 강해졌을까, 하는 후회가 그를 보는 매 순간 밀려와 괴로웠다.

기어이 저를 닮았다며 희게 웃던 엘레나까지 떠오르자 데미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프다 보니 별생각을 다 하는군. 무슨 염치로.’

데미안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머릿속에서 흐트러뜨렸다. 그때 세체르가 말했다.

“이번 제례는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겁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또 그 짓을 하려는 게 뻔합니다.”

“그 짓?”

“아델쿠스를 소환하는 예식 말입니다. 준비물이 모이면 곧장 다음 예식을 시행할 겁니다.”

“!!”

데미안은 아델쿠스라는 말에 눈을 홉떴다. 이는 타락한 용이자 흑마법의 시초 용을 뜻하는 탓이었다.

자파르시아가 대륙을 떠난 후 드래곤들이 이지를 상실한 건 다 아델쿠스의 흑마법 탓이었다.

“준비물이라는 건…….”

“오염을 없애 줄 매개체인 정령사와 금기를 어긴 영혼인 메이벨일 겁니다. 애초에 메이벨은 제물로서 의미 있는 영혼이니까.”

“신전의 보호를 받는 건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었던 건가.”

그저 이쪽과 힘겨루기를 하려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건 예상 밖이었다.

곁에 있던 제널드와 에단도 심각함을 인지했는지 말이 많아졌다.

“전하, 이건 조금 위험한 것 같습니다. 황실에도 알려야 할 듯한데.”

“그것보다 이러면 작은 마님이 위험한 상황인 거 아닙니까? 보나 마나 그들에게 납치되었을 텐데!”

다급해진 부하들의 종알거림에도 데미안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로에나가 사라진 지금, 그들이 노릴 상대는 성녀였다.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긴 하지만 하는 수 없군.’

데미안이 코비슈타인과 준비하던 것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제널드, 지금 당장 성녀가 있는 신전에 병력을 배치해라.”

신전과의 분란을 불사해서라도 성녀를 끌고 오겠다는 뜻이었다. 제널드가 명을 받고 자리를 뜨자 데미안은 뒤이어 에단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 당장 코비슈타인에게 가서 그 일을 강행하라고 해.”

“존명!”

“아실, 자네는 이자를 감옥에 가두고 아는 건 모조리 뱉도록 만들어. 노인네라고 봐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전하.”

아실이 포박된 세체르를 데리고 사라지자 침실엔 아키드와 데미안 둘만이 남았다.

데미안이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아키드에게 말했다.

“아키드, 정신 차리고 이리 오거라.”

그러곤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 순간 아키드의 손 안에 웬 묵직하고 작은 게 나타났다.

아키드가 놀라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이건…….”

그것은 하델루스의 인장 반지였다. 데미안의 손가락에 끼워진 것과 같으나 풍기는 기운이 사뭇 달랐다.

아키드가 의도를 몰라 멍하니 쳐다만 보자 데미안이 말했다.

“아무래도 네게 이걸 줄 때가 된 모양이다. 어떻게 사용할지는 네게 달려 있겠지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인장 반지는 왜…….”

“오늘부터 네가 하델루스의 가주다.”

“예?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리신다고요? 이유라도 알려 주십시오.”

대뜸 인장 반지를 쥐여 주며 가주가 되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키드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항변하자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정한 게 아니다. 내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지금은 나보다도 너에게 훨씬 유익한 물건이기도 하고.”

“설마 겁이라도 먹으신 겁니까?”

어울리지 않은 약한 소리에 아키드가 조용히 물었다. 마나독에 당하기는 했지만 영구적으로 마나 코어가 막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일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마냥 마법을 못 쓰게 되는 것도 아니라 그의 결정이 이해가 안 되었다.

데미안이 아키드의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가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가져가란 뜻은 아니다. 그저 하델루스 가주라는 자리가 다른 가문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려 주려는 거지.”

“무슨 뜻입니까?”

“하델루스는 오래전부터 자파르시아의 유지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그러니 가장 강한 하델루스가 파수꾼을 맡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설마 이게…….”

“그래. 그게 진짜 인장 반지이자 비전을 열 수 있는 열쇠다. 물론 하델루스의 힘 없이는 꺼낼 수도, 열 수도 없는 물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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