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온 세상이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울렸다.
찢어지는 듯한 마수의 울음소리와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지르는 이들의 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엘레나는 어릴 적부터 숱한 위협을 받으며 살아왔고, 이러한 난리는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냉정한 판단을 했던 그녀에게도 등골이 오싹한 때는 많았다.
특히 자카리가 4황자에게 거의 죽을 뻔했던 과거의 그 사건만큼은 엘레나에게 여전히 악몽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오버랩되어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엘레나는 제 앞을 가로막은 채 신음을 토하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새 난리가 난 곳과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그때까지도 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디, 디안?”
엘레나가 당황한 음성을 토하자 데미안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와는 사뭇 달랐다. 버겁게 웃는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좀만 더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어, 엘라.”
“디, 디안, 너, 너어……!”
“와,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데? 그것도 화 한 번 안 내고 말이야.”
이 와중에도 농담을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엘레나의 목소리가 자연히 바들바들 떨렸다.
여전히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의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서였다.
“자, 잠깐만. 마, 말하지 마. 지금 피, 피가, 파, 팔이……!”
제대로 된 문장도 완성하지 못한 채 엘레나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정확히는 그의 팔이 있던 자리를 붙들었다.
그가 팔이 잘려 나간 자리를 힐끗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이거? 마수들이 배가 고팠는지 덥석 물고 가더라.”
“…….”
“네 잘못 아니야. 그냥 내가 머저리라 방심하다가 다친 거지. 예전에도 자주 그랬잖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이러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으로 마수에게 미친 듯이 달려가는 제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그 뒤에 데미안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파편적인 기억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엘레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에 데미안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팔 하나 없다고 내 미모가 사라지진 않으니 걱정하지 마.”
“누가 네 미모 따위를 걱정했어?”
“자꾸 날 보며 울길래. 난 또 내 걱정을 하는 줄 알았지.”
“안 울었어.”
“그럼 뺨에 흐르는 건 땀인가? 눈에서도 땀이 나온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자꾸만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그에 엘레나가 신경질을 부렸다. 그것조차 울먹임이 섞여 있어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엘레나는 그와 실랑이를 하는 대신 제 달마티카를 찢었다. 그러곤 그의 팔에 묶기 시작했다.
응급처치도 못 하고 있던 걸 보면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려는 저를 붙드느라 그랬던 게 분명했다.
엘레나가 말없이 응급처치를 마치자 데미안이 그녀의 소매를 붙들었다.
어느새 그의 표정엔 장난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진중한 눈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지켰으니까, 죄책감 때문에 결혼했다느니 같은 생각은 다신 하지 마.”
이 와중에 다 지나간 이야기를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엘레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던 것과는 별개로 그의 말이 지닌 의미가 조금 서글픈 탓이었다.
“……그래. 죄책감이 아니라 협박을 당한 거겠지. 폐하께 들었어, 네가 협박을 당해서 나랑 결혼했다고.”
“뭐?”
“차라리 못 하겠다고 하지 그랬어. 아무리 폐하라고 해도 네가 거절하면 파혼해 주었을 텐데.”
데미안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에 엘레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멍청한 건 진즉 알았지만 그딴 협박에 순응할 정도로 물정 모르는 줄은…….”
“엘레나.”
하지만 이어진 데미안의 부름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성한 손으로 엘레나의 팔을 붙든 채 집요히 응시했다. 다소 화난 듯한 음성을 뱉으면서.
“넌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상처받은 듯한 눈빛이었다. 팔의 상처보다도 그녀의 말이 더 고통스럽다는 듯이 미간이 한껏 성나 있었다.
엘레나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너답지 않은 선택이었어. 네가 정말 가문을 생각했다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공비로 들였어야 했고.”
“…….”
“그랬다면 사생아가 후계자라는 꼬리표도 없었을 테고, 너와 내가 이렇게 틀어지지도 않았겠지.”
그래. 부부가 아니라 해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잘 지냈을지도 몰랐다. 저가 수도원에 들어가 살았을 테니 자주 보지는 못했겠지만.
“웃기지도 않는군.”
데미안은 몹쓸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차갑게 뇌까렸다. 이에 엘레나는 움찔하면서도 시선을 외면했다.
잠시 후,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평소보다도 다소 격양된 음성은 그의 동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내 선택이 우리 관계를 파탄 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네게 이해받을 생각도, 용서해 달라 빌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
“…….”
“차라리 네가 나를 원 없이 미워할 수 있게 일부러 더 과장되게 행동했던 것도 사실이야. 그렇게라도 네 관심이 받고 싶던 거지.”
“데미안.”
고조된 음성에 엘레나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듣질 않았다.
그는 로에나의 말에 흔들려 또다시 헛된 기대를 한 스스로가 한심해 울컥했다.
그냥 하던 대로 반목하며 지내는 게 차라리 나을 뻔했다. 그랬다면 정치적 이유를 들어 이혼을 거절하기 쉬웠을 테니까.
“이혼은 절대 안 돼. 싫어도 내 옆에 있어. 차라리 예전처럼 계속 날 미워하며 살라고.”
엘레나는 할 말을 잃고 뒤늦게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예전에는 울보라고 자주 놀릴 만큼 익숙한 눈물이었으나 근래에는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동안은 이렇게 감정을 나눌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었다.
어쩌면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동안 그는 망가져 가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엘레나는 우선 그를 진정시켰다.
“여기서 더 체력을 낭비하면 안 돼. 너 그러다 진짜 쓰러…….”
툭.
마치 엘레나의 말이 저주라도 된 것처럼 데미안의 머리가 엘레나의 어깨로 무너졌다.
풀썩 고꾸라진 몸에 엘레나가 놀라 굳어 버렸다. 역시나 피를 많이 흘린 상태로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몸에 무리가 간 듯했다.
“내가 뭐랬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도움의 손길을 외치려는 때였다. 그가 엘레나의 손을 붙들며 실낱같은 음성을 토해 냈다.
“제발 나 계속 미워해도 좋으니까. 이혼하자는 말만은 하지 말아 줘, 엘레나.”
“…….”
“아이를 낳자는 말도 제발 하지 말고. 그건 나보고 널 두 번 죽이라는 말이잖아.”
“…….”
“내가 어떻게 그래. 여기서 더 널 상처 주란 말은 하지 마, 엘라. 이미 많이 받았잖아.”
고해성사하듯 쏟아진 말을 끝으로 데미안이 혼절했다.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있었다.
그가 하는 말 중 어느 하나도 이해되는 게 없었다.
잠시 후, 신호탄을 보고 찾아온 기사들이 쓰러진 데미안을 옮겼다.
* * *
나는 우선 흑마법사 하나를 기습해 옷을 바꿔치기했다.
이대로 하델루스가의 인장이 새겨진 달마티카를 입고 다닐 수는 없는 탓이었다.
다행히 허술해 보이는 놈을 정령들이 완력으로 제압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정령들의 힘은 엄청났다.
나는 흑마법사들이 주로 입는 칙칙한 로브에 후드까지 깊게 눌러쓴 채 기척을 숨겼다.
바람 속성 마법의 특징은 은신과 색출. 카멜레온이 보호색으로 저를 숨기듯 완벽히 몸을 숨기는 마법은 에이프릴가의 전매특허였다.
함께 다니면서도 같이 다니는 줄도 모를 만큼 존재감을 없애는 데 탁월했다.
웬만한 감이 없으면 나를 인식조차 못 하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호랑이와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는 딱 좋은 마법이었다.
‘각성한 게 신의 한 수였어.’
행여나 각성도 못 하고 이곳에 끌려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절로 가슴을 쓸었다.
살펴본 바로 이곳은 고적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땅 아래에 이런 도시가 숨겨져 있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예상대로 흑마법사가 아니면 이곳에 드나들지도 못하는구나.’
나는 아무 데서나 입구를 만들어 카타콤 밖으로 나가는 흑마법사를 보며 낮게 침음했다.
특정된 문이 없는 것을 보면 흑마법사 특유의 힘으로 문을 만들어 출입하는 듯했다.
제법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래선 내가 이곳 밖을 홀로 나가는 일이 불가능했으니까.
나는 우선 이곳의 지리를 파악하기 위해 조용히 움직였다. 그러기를 한참.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을 발견했다. 과거 흑마법사가 나를 납치했을 때 보았던 신전과 비슷한 구조물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무너진 곳 없이 성한 상태이고 내부 바닥에 기괴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는 것 정도.
나는 내부를 살피던 중 제단 앞에 놓인 성수대를 보고 경악했다. 그곳엔 새빨간 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제례 전 정갈한 몸가짐을 위해 손을 씻는 도구라고 하기엔 구역질이 나는 일이었다.
‘진짜 미친 자들의 도시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령들이 제단 주변을 빙빙 돌며 사태를 확인할 무렵이었다.
“이상하구나. 분명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말소리와 함께 인기척을 느낀 나는 얼른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