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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56)화 (156/177)
  • #156.

    한편 데미안은 엘레나의 이혼 선언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녀로 인해 그는 내내 묻어 두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일시에 저를 옥죄는 압박감을 느꼈다.

    특히나 혼자서만 안고 있던 비밀이 그의 마음을 더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데미안이 엘레나의 상태를 알게 된 건 엘레나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었다.

    데미안은 자신이 가문의 비전을 이용해 회귀하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엘레나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황제의 말에 데미안은 처음에 이렇게 답했었다.

    ‘상관없습니다. 예정대로 혼인을 진행하겠습니다.’

    애초에 후계를 위한 정략혼이 아니었다. 엘레나야 정략혼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지만 데미안은 진심이었다.

    딴 놈이 그녀와 결혼해 잘 사는 꼴은 두 눈 뜨고 절대 보기 싫었으니까.

    데미안이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하자 오히려 황제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후계 문제는 어쩔 셈이지?’

    ‘방계의 아이를 후계로 세우겠습니다. 어차피 아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

    ‘그건 안 되네. 루이스 가문이 방계를 후계로 세운 후 멸문한 걸 잊었나?’

    ‘…….’

    모를 리 없는 문제였다. 가문을 생각하면 엘레나가 아니라 다른 이와 혼인하는 게 맞을 테니까.

    루이스 가문이 흐지부지 사라진 이후, 귀족들은 직계에 더더욱 집착하기 시작했다.

    본처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첩을 들여서라도 가문의 명맥을 이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애초에 신붓감을 고를 때 1순위가 건강한 몸인 것도 다 그에 대한 반동이었다.

    데미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엘레나에게 상처 주면서까지 가문의 힘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제멋대로 사는 그였다. 방계 후계를 들이면 원로원의 반발이 있겠지만 그거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하델루스가는 마법적인 재능이 없어도 충분히 명맥을 이을 만큼 탄탄한 기반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감 하나는 여전하군.’

    ‘애초에 루이스 가문이 멸문하게 된 건 지나치게 마법에 의존했던 가문 경영이 문제였습니다. 하델루스는 마법과는 별개로 이미 탄탄한 가문이고요.’

    ‘하지만 그대의 가문이 존재만으로도 북부의 방패이자 제국의 강력한 무기라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사단으로도 충분―’

    ‘충분하지 않아.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델루스의 존재 자체가 제국에 얼마나 큰 전력인지.’

    데미안은 황제의 반응에 슬슬 짜증이 났었다.

    파혼하라고 부른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이제 와서 결혼도 안 된다니.

    다소 불경한 줄을 알면서도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데미안은 눈앞의 존재가 엘레나의 오라비가 아닌 일국의 황제라는 걸 재인식했다.

    ‘첩을 들여. 그리고 직계 후손을 낳아 후계로 삼아라.’

    어처구니가 없는 조건이었으니까. 엘레나의 유년 시절을 함께 겪은 이의 제안치고는 잔인한 말이었다.

    데미안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거부했다.

    ‘싫습니다.’

    ‘그럼 나는 엘레나를 다른 이에게 시집보내겠어. 하자 있는 몸이니 후처 자리밖에 안 되겠지만 적어도 대우는 받을 수 있겠지.’

    ‘폐하! 미치셨습니까? 엘레나를 그딴 곳에 시집보낸다니요!’

    ‘별수 없지 않은가. 나는 하델루스라는 전력을 약화시킬 생각이 없고, 그대는 직계를 낳을 생각이 없으니 말이야.’

    ‘…….’

    ‘자네가 내 제안을 거절하면 엘레나의 상태를 모두가 알게 되겠지. 숨기고 결혼시키는 건 후폭풍이 있을 테니까.’

    자존심 빼면 시체인 엘레나였다. 제 몸 상태에 대해 밝혀지느니 혼자 살겠다고 할 게 뻔했다.

    하지만 황제는 미혼의 황족을 가만 내버려 둘 정도로 어리숙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엘레나의 혼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위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상처받을 사람은 엘레나뿐이었다.

    ‘폐하께서 이리도 차가운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어떻게 올랐는지 아는 자네가 나를 차갑지 않다고 여길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엘레나에게는 따뜻하실 줄 알았죠.’

    ‘…….’

    ‘명을 받겠습니다. 대신 엘레나의 상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네의 평판이…….’

    ‘제 평판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자 있다고 여겨지는 건 엘레나가 아니라 저여야 합니다.’

    데미안은 당시 황제의 명을 받는 척 결혼을 강행했었다.

    그리고 결혼 후 당연하게도 황제와의 약속을 어기고 방계를 후계로 삼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하자가 있는 것은 자신인 것처럼 행동해 황제의 첩 권유까지도 막았었다.

    그랬었는데.

    바보같이 마음이 약해져 아이를 너무도 갖고 싶어 하던 엘레나의 뜻을 끝내 거부하지 못했다.

    아이 자체를 갖기 어려운 몸이라 불확실했으나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야 기적적으로 임신했을 때는 둘 다 희망에 들떠 있었다. 혹시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데미안은 좋다는 영약은 다 엘레나에게 구해다 바쳤다. 그 덕분인지 태아는 건강하게 자라 두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적은 거기서 끝이었다.

    엘레나가 아이를 낳다 죽었을 때 데미안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도 저는 버젓이 살아 있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목숨을 바쳐 탄생시킨 아이의 얼굴조차 똑바로 보지 못하고 따라 죽으려 할 정도로.

    그리고 그때 데미안은 가문의 비전을 사용했다.

    원래라면 가문을 위해서만 쓰기로 맹세했던 것이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 결과가 그녀와의 파탄 난 결혼생활이었지만, 데미안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제 눈앞에 살아 있고 또 멀쩡히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데미안은 엘레나가 계속해서 빛나는 존재로 있기를 바랐다. 고고하고 우아한 채로 말이다.

    하여 그녀와의 사이가 벌어지도록 일부러 정부를 들였다. 그 스스로도 그녀에게 너무나 약하다는 걸 알아서였다.

    겉으로는 정부에 푹 빠져 방탕하게 사는 것처럼 행동하며 뒤에서는 적당한 방계를 물색해 직계인 척 꾸미려는 계획도 세웠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게 아키드를 만났고, 그에게서 하델루스의 힘이 있는 것을 느낀 데미안은 당황했었다.

    지금껏 그는 단 한 번도 정부들과 밤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까.

    밤을 보낸 척 꾸민 적은 많으나 맹세코 실현한 적은 없었다. 정부의 감각을 마비시켜 위장만 했을 뿐이지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키드의 힘이 직계 못지않았기에, 데미안은 망설임 없이 그를 후계로 삼았다.

    방계의 사생아가 우연히 강한 힘을 타고났다고 여기면서.

    이렇게밖에 엘레나를 지키지 못하는 현실이 데미안을 괴롭게 했지만 여전히 당당하고 우아한 엘레나를 보면 기뻤다.

    나쁜 건 모두 자신이 가져가고 엘레나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서 빛나 주기를 바랐으니까.

    그녀가 욕을 먹느니 차라리 저가 욕을 먹는 쪽을 선택한 건 여전히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모순적이게도 그녀가 다른 이를 마음에 품는 걸 지켜볼 자신은 없었다.

    옹졸하게도 차라리 저를 미워하고 증오해 다른 이들은 쳐다도 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여 삐뚤어진 애정이라 해도 엘레나가 온 열정을 쏟아 저를 미워하도록 일부러 더욱 못되게 굴었었다.

    그런데 이제 일부의 사실을 알아 버린 엘레나는 제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었다.

    선택의 결과는 가장 원치 않는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데미안은 이 결혼을 유지하고 싶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데미안이 엘레나의 소매를 살짝 붙든 채 말을 걸었다.

    “엘레나,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

    “이야기할 시간은 여태 많았을 텐데.”

    하지만 엘레나는 소매를 털어 내며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시선조차 주지 않으니 데미안은 미칠 것만 같았다. 차라리 저가 밉다고 괴롭히고 윽박지르고 엿을 먹이는 편이 나았다.

    데미안은 행사 중인 것을 알면서도 엘레나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감각에 데미안이 엘레나를 와락 끌어안아 몸을 피했다.

    콰앙―!

    뒤이어 엘레나가 있던 자리에 마수의 아가리가 처박혔다. 그대로 두었다면 엘레나가 당했을 거리였다.

    데미안의 예민한 감각이 아니었다면 피하지도 못할 속도였다.

    “이, 이게 무슨?”

    엘레나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하다 뒤이어 제가 있던 자리를 보고 사색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마수의 공격에 데미안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가 마침 마계로 통하는 문 안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마수들을 본 엘레나가 희게 질렸다.

    “여긴 위험하니 일단 애들을 데리고…….”

    엘레나를 엄호하며 급하게 소리치던 데미안은 뒤따라 오던 로에나와 아키드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확인했다.

    아수라장이 된 틈에 아들 내외를 놓치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도망치는 이들이 많았다.

    데미안은 우선 엘레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그 후에 아들 내외를 찾으러 갈 생각으로 엘레나에게 고개를 돌리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움찔했다.

    엘레나의 몸이 평소답지 않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데미안은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엘레나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자, 자카리를 찾아야 해. 그, 그 애를 노린 거라고. 분명 4황자가 보낸 거야.”

    어린 시절 숱한 죽을 위기를 겪은 그녀에게 이런 소음이 가득한 상황은 당시의 충격을 되새기기에 충분했다.

    엘레나는 아이처럼 중얼거리며 자카리를 찾으려 했다.

    4황자는 자카리가 황자이던 시절 황태자였다. 그는 손위의 황자들을 죽여 황태자가 된 후 남은 황족들까지 모조리 죽이려 한 폭군이기도 했다.

    애초에 자카리가 황제가 되기로 마음먹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살아남으려면 황제가 되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4황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데미안은 울컥한 채 그녀를 붙들었다.

    “엘라, 내 눈을 봐. 지금 여긴 황성이 아니야. 4황자는 이미 죽었잖아.”

    “흐, 흐읍. 자카리가 도, 독을 마셨단 말이야. 아, 아직 회복도 안 됐는데 이대로 자객이 그 애를 죽이기라도 하면 나는, 나는……!”

    자카리가 황태자가 되기 직전 벌어졌던 가장 큰 사건이 엘레나의 사고를 잠식한 모양이었다.

    데미안이 억지로라도 그녀를 끌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윽!”

    엘레나가 힘을 사용해 데미안을 공격하곤 자카리를 찾으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필 마수에게 정면으로 달려가는 줄은 본인도 모르는 채였다.

    “엘레나,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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