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55)화 (155/177)

#155.

아키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헤맸을 그라서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 어휴! 쟤네는 요즘 만나기만 하면 저러더라.

― 보기 좋은데, 뭐.

한창 바삐 움직이던 정령들이 여전히 수다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착실히 땅을 정화하는 건 잊지 않았다.

물론 그 힘의 원천은 나였다. 나는 슬슬 몸에 무리가 와 자연히 숨이 헐떡여졌다.

이를 느낀 아키드가 나를 놓아주며 물었다.

“숨이 거칩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사실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에요. 이래선 끝도 없어서 메이벨을 찾아야 해요.”

내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정화되고 오염되기를 반복하는 땅을.

“얘가 미쳤는지 아주 작정하고 이곳을 죽은 땅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거든요.”

“그게 무슨…….”

“아직은 괜찮은데, 이래선 체력 싸움이 될 거라…….”

세체르는 금기를 어기고 첫 삶을 시작한 제물에겐 오염의 한계가 없다고 했다.

한계 없는 정령사와 한계 없는 제물의 만남은 끊임없는 무승부만 낳을 뿐.

이렇게 무기한 방출하는 싸움은 체력전이면서 누군가 말리지 않으면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안 끝난다는 뜻이었다.

아마 메이벨도 지금쯤 내가 딜란을 먹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짐작했을지도 몰랐다.

딜란을 먹었다면 이미 힘에 부쳐서 내가 먼저 쓰러졌을 테니까.

희게 질린 내 얼굴을 본 아키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당장 죽이고 오겠습니다.”

성녀고 이목이고 뭐고 대뜸 죽이겠다는 말에 내가 질겁하며 그를 붙들었다.

그게 능사는 아닌 상황이라 더더욱 다급해졌다.

“죽이는 건 안 돼요! 그럼 진짜로 손쓸 수 없이 오염이 번질 거예요.”

“예?”

“금기를 어긴 자는 걸어 다니는 죽은 땅이라 아무런 조치 없이 시체가 되면 더더욱 위험해요.”

애초에 내가 메이벨을 그대로 둘 수밖에 없던 것도 그 이유였다. 그녀는 존재 자체가 암 덩어리이면서 시한폭탄이었다.

죽여도 터지고 안 죽여도 서서히 터지는 그야말로 암적인 존재.

고대에 일어난 대재앙도 제물이 죽으면서 한 번에 터진 오염 때문이었다.

다들 제물이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반대였다. 죽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오염이 시작되는 게 금술의 무시무시함이었으니까.

그러니 섣불리 죽여서는 안 됐다. 차라리 생포한 채로 메이벨의 몸에 그득한 오염을 봉인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문제는 그 방법이라는 게 나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키드는 메이벨이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이라는 말에 경악했다.

“그럼 금기를 어긴 게 메이벨이란 뜻입니까?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겁니까?”

그거야 메이벨이 금기를 어긴 장본인이라는 걸 알리면 캐서린과 메이벨의 몸이 바뀌었다는 걸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당시엔 내가 빙의한 걸 숨겨야 하는 상황이라 깊게 알리지 못했었다.

그 후에는 캐서린이 걱정되어서 망설였었고.

“미안해요. 섣불리 말하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제 잘못이에요. 이 일이 잘 해결되고 나면 그때 다 설명해 줄게요. 진짜로요.”

“대체…….”

“메이벨에게도 혹시 몰라 추적 마법을 걸어 두었어요. 지금 저는 움직일 수 없으니 대신 메이벨을 붙잡아 주세요.”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부탁밖에 할 수 없어 미안했다.

메이벨에겐 뒷배가 없으니 민심을 이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심을 등에 업으려면 이번 제례가 중요하니 남모르게 일을 진행할 줄 알았다.

이렇게 앞뒤 없이 일을 벌일 정도로 미쳐 있는 줄 알았다면 진즉 메이벨의 손과 발을 묶어 두고 시작했을 텐데.

내 문제로도 복잡해서 그만 메이벨이 급발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만큼 메이벨이 내 생각보다 더 정신적으로 몰려 있다는 뜻일 터.

“시간이 없어요. 얼른 얘를 좀 어떻게…….”

내가 그의 손을 붙들어 메이벨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추적 마법을 연동하려던 그때였다.

주머니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키나의 호출기가 든 주머니였다.

나는 뒤늦게 키나에게 메이벨이 캐서린에게 접근하면 호출하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나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벌써 여러 번 수신호가 왔었잖아.’

정신없이 정화하느라 진동이 울리는 줄도 미처 느끼지 못했다. 신호가 온 시간을 보니 내가 막 정화로 정신없는 와중이었다.

“아키……!”

다시금 그를 재촉하려는데 그가 내게서 호출기를 빼앗으며 깊게 입을 맞추는 탓에 뒷말이 삼켜졌다.

다소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입맞춤 후, 그가 말했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돌아와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니 기다려요. 여기서, 안전하게.”

동시에 흰둥이의 방어벽에 검은 오러가 휘감겼다. 손으로 만지니 이 공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은 것 같았다.

제로니스가 각성했을 때 공간을 분리했던 것과 같은 마법이었다. 허락한 사람 이외에는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공간.

나는 안전을 빌미로 나를 가둔 아키드를 바라보며 입술을 헤벌렸다.

“아키, 이건 왜…….”

“자꾸만 도망치려 드니까. 이번만큼은 저도 더는 물러설 수 없어요.”

그가 낮게 읊조리며 유유히 공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무표정한 얼굴이 몹시 낯설었다.

마치 원작에서 흑화했던 그처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가는 그의 뒷모습조차도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반면 그를 본 나는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중, 나는 입가에 손을 모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떡해, 정말 화났나 봐.”

순간적으로 열이 확 끼쳤다. 방금까지만 해도 정화하느라 숨이 찼는데 지금은 아키드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키드가 화가 났다. 그런데 무섭기는커녕 그 모습이 신선하고 멋있기만 했다.

“와, 이건 상상한 거보다 더, 와아…….”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연신 감탄했다.

원작에서 흑화한 그의 모습까지도 사랑한 나라서 그가 격동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 행동에 전율이 일었다.

저런 얼굴로 화를 낸다면 백 번이고 들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짜 못 살겠다, 내가.”

이렇게 나날이 리즈를 갱신하고 덕통사고를 일으키면 어쩌자는 건지.

화가 난 와중에도 내 안전을 위해 장치까지 해 두는 섬세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 이래서 내가 아키드를 덕질했지. 저 반전미에서 누가 헤어 나올 수 있겠어.’

흑화한 와중에도 메이벨의 손가락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그였다.

차갑게 말하는 것과 달리 행동은 다정하기만 해 덕후의 마음을 저몄었지. 어째서 그가 서브 남주인지 이해 못 해 광광 울기도 했고.

나는 언제 힘들어했냐는 양 헤실헤실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힘에 부치던 일이 덕통사고를 당하고 나니 거뜬해졌다.

앞으로도 보게 될 아키드의 새로운 면이 기대되는데 여기서 지칠 수는 없었다.

물론 아직 내가 진짜 로에나였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미안한 만큼 더 잘해 주고 싶어.’

어쩌면 내가 전생에서 아키드의 삶을 책으로 엿본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 덕에 내가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쯤 되자 더없이 불행했던 나의 전생이 더는 불행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좋아. 해 보자고.”

마지막 스퍼트를 내며 아키드가 돌아올 동안 얌전히 슬기로운 감금 생활을 즐길 무렵이었다.

쾅―!

엄청난 소음과 함께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땅 아래에서부터 오는 진동이었다.

바깥을 확인할 수 없어 의아해하던 찰나 정령들이 비명을 질렀다.

― 뭐, 뭐, 뭐야! 따, 땅이 꺼지고 있어!

“뭐?”

땅이 꺼지고 있다는 말에 놀라는데 주변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흰둥이의 방어벽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흰둥이와 닿지 않는 곳으로 내가 끌려 들어온 기분이었다.

“흰둥아!”

내 부름에도 흰둥이는 반응이 없었다. 분명 땅 아래로 끌려왔는데 마치 지상과 공간이 분리된 기분.

나는 주변을 살폈다. 황폐해 보이기까지 한 곳은 흡사 지하 감옥처럼 사방이 음습했다.

꼭 멸망한 나라의 버려진 터처럼 쓸쓸한 기운을 풍겼다.

‘여긴 카타콤인가?’

직감적으로 이곳의 정체를 짐작한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져 황급히 돌벽 뒤로 몸을 숨겼다.

동시에 바람 속성 마법을 이용해 기척을 숨겨 상대가 나를 보지 못하도록 했다.

잠시 후, 검은 로브를 쓴 사내들이 내가 있던 곳에 등장했다.

“분명 이곳이라고 했는데.”

“주변을 잘 찾아봐. 상대는 정령사에다 바람 속성 마법사잖아.”

역시나 그들이 찾는 건 나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사라질 동안 숨을 죽였다.

지상이 혼란한 틈을 타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오다니.

원래라면 저들이 위로 온 틈에 기습하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물론 그리 겁나지는 않았다. 세체르에게 그들의 진짜 계획을 들었으니까.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는 뻔했다. 분명 내 힘을 이용해 아델쿠스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악룡을 소환하려는 심산이겠지.

이미 실패해 대재앙을 일으킨 전적도 있으니 내 힘이 간절할 터였다.

‘흥, 어림도 없지.’

차라리 잘되었다. 나는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된 거 작전을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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