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54)화 (154/177)

#154.

‘하지만 나는 내가 로에나가 되기 전에 유이나라는 이름으로 다른 세계에서 살았었어. 로에나로서 산 기억조차 없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로에나로서 산 기억이 한 터럭도 없다고?’

세체르의 질문에 당시 나는 섣불리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무턱대고 긍정하기엔 내게 로에나의 기억이 흘러들어 온 적이 꽤나 많았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내 존재에 대한 부정을 더는 이어 갈 수 없었다.

‘대공자비님이 겪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합니다. 흑마법의 영향으로 잠시 영혼이 다른 세계로 이탈하기도 한다고 들었으니까요.’

‘이탈했다고?’

‘간혹 그렇게 애먼 영혼이 다른 세계에서 환생해 곤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예정되지 않은 영혼의 탄생이었으니 불행한 삶이었을 테고요.’

‘…….’

‘이러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기엔 제 정체를 밝히지 않을 수 없으니 그저 피해를 입었다고만 말씀드렸던 겁니다.’

내 전생이 불행한 삶이었을 거라는 말에 나는 항변할 수 없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유이나로서의 삶은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고, 슬픈 기억들만 가득했었다.

그래서 이번 삶에 더더욱 악착같이 집착했던 거고.

나는 유이나로서의 내 불행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었다.

‘그럼 정말로 내가 로에나 본인이라도 된다는 거야?’

‘애초에 몸의 기억을 읽는 영혼은 없습니다. 기억은 몸이 아니라 영혼에 새겨지는 거니까요.’

‘…….’

‘대공자비님은 아까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죠. 그건 로에나 하델루스의 기억을 이미 인지했기 때문 아닌가요?’

‘확신할 수 없…….’

‘자신의 기억이 아닌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그건 영혼의 기억이니까요.’

다시 생각해도 허탈하고 황당한 일이었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애써 감쌌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다고 여기길 7년.

알고 보니 이것조차 내 삶이었으며, 유이나로서의 삶이 흑마법에 의한 사고였다는 사실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 그간 로에나의 기억인 줄 알았던 건 모두 유이나로 환생하기 전 내가 겪은 일이란 뜻.

드문드문 흘러든 기억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로에나로서의 삶이었다니.

‘결국 아키를 괴롭힌 게 나였다는 거잖아.’

나는 죄책감에 차마 아키드를 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원작에서 패악질을 부렸던 게 실은 내 전전생이라서 괴로웠다.

아키드에게 상처 될 말을 하고 제멋대로 굴었던 게 다름 아닌 나였다는 사실이 미친 듯이 싫었다.

그러면서 염치도 없이 아키드를 덕질하고 이번 생에선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다.

‘아키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제례 중 내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아키드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애써 아무 일도 없는 척하자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왔다. 손에 온기가 들어차자 몸이 흠칫, 떨렸다.

해서 나도 모르게 아키드의 손을 쳐내고 스스로 놀라 시선을 피해 버렸다.

분명 그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닥쳐온 현실이 나를 정신 없게 만든 탓이었다.

차라리 행진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는 순간이었다.

돌연 주변이 어둠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하늘에 웬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게 의아해 쳐다보는데 누군가 외쳤다.

“마, 마계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차례로 행진하던 귀족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필 모두 정갈한 몸가짐으로 제례에 임하던 때라 대항할 무기가 없어 더욱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동 마법이 가능한 귀족들은 바쁘게 문에서 먼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평민들은 쏟아지는 마수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바빴다.

개중에 공격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이들은 마수와 대적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뒤죽박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행렬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주변은 사람에 치여 넘어지는 이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인파에 휩쓸려 대열에서 이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필 아키드에게 미안해 자꾸만 거리를 벌리고 있던 와중이라 그와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아키!”

나는 어디에도 그가 보이지 않아 소리쳤다. 하지만 어디서도 응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주변이 온통 소란스러웠으니까.

‘분명 내 걱정을 하고 있을 텐데.’

나는 아키드를 찾으려 바삐 인파를 헤치기 시작했다. 하필 평민들과 귀족들이 뒤섞이고 저마다 비슷한 달마티카를 입고 있어서 찾기 어려웠다.

하늘에선 마수들이 쉴새 없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공격했다. 난생처음 보는 마수의 끔찍한 외형에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 앞으로 뛰어든 웬 마수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당장이라도 나를 씹어 삼킬 듯이 다가오는 순간.

“흰둥아, 엄호해 줘!”

내 외침에 땅이 울리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본체를 드러낸 흰둥이가 튀어나와 마수를 내동댕이쳤다.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땅속에서 따라오도록 지시한 터라 제때 등장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거대한 백표범에 주변 이들이 놀라 더더욱 비명을 질러 댔다.

“꺄아악! 마, 마수다! 따, 땅속에서 마수가……!”

땅속에서도 마수가 튀어나온다고 생각했는지 주저앉아 엉엉 우는 이도 있었다.

“얘는 마수가 아니에요!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나는 손을 모아 사과하면서도 흰둥이와 함께 전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마수와 인간이 한데 섞여 난장판이 된 곳이라 쉽사리 아키드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꾸만 마수들이 나를 공격하는 터라 이동이 쉽지 않았다. 꼭 어딘가로 몰리는 기분.

“윽!”

그때 내 옆을 지나던 귀족 하나가 돌연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하필 나를 붙들고 늘어진 터라 내 몸이 크게 휘청였다.

“괜찮으……!”

내가 막 그를 부축하는데 뒤이어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픽픽 쓰러졌다.

기이한 현상에 움찔하던 중, 나를 붙든 이의 얼굴이 거뭇거뭇해지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오염이잖아!’

동시에 바닥을 내려다보니 땅의 색깔이 거무죽죽해지고 있었다. 마계의 문이 열린 것도 모자라 인트라비아의 땅이 죽어 가고 있었다.

평소 뿌려 대던 오염과는 차원이 다른 양과 농도였다. 이래선 당장 자리에 주저앉아 정화부터 해야 할 판이었다.

어디 있을지 모를 아키드와 시부모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나는 메이벨이 내 발을 묶고자 부리는 수작인 줄 알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 신수?”

마침 흰둥이의 핵석을 발견한 귀족이 정체를 알아채고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를 마음껏 부리는 내 정체에 대해 궁금한 얼굴을 했다.

이목이 집중되어 정화를 마음 놓고 하기 어려운 상황. 나는 곧장 땅에 손을 짚으며 소리쳤다.

“흰둥아!”

내 부름에 흰둥이가 눈을 번뜩이며 앞발로 바닥을 쿵, 내리쳤다.

흰둥이가 내 주변으로 흙벽을 쌓아 마수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어했다.

동시에 사람들이 내가 무얼 하는지 볼 수 없도록 시야를 가로막은 것이기도 했다.

“거지 같은 흑마법사 놈들! 진짜 내가 다 잡고 만다.”

나는 낮게 욕지거리를 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정령들을 실체화했다.

실체화된 정령들이 내 주변에 가득 모여들었다. 동시에 내 손을 중심으로 오색찬란한 빛이 퍼지며 검어지던 땅이 본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정화된 땅이 도로 오염되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어쭈, 요것 봐라?”

메이벨은 나와 힘겨루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역시나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할 속셈인지 오염의 속도가 거침이 없었다.

흡사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뭐든 정화할 수 있는 나와, 뭐든 오염시킬 수 있는 메이벨의 싸움.

힘겨루기가 계속되자 자연히 숨이 거칠어졌다. 입에선 ‘빌어먹을 메이벨’이라는 말이 절로 쏟아졌다.

이래선 결판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아 머리를 굴리는데 바깥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로에나! 괜찮습니까?”

‘아키드!’

나는 벽을 두드리며 내가 괜찮은지 확인하는 아키드의 외침에 울컥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아키드에게 메이벨 쪽을 확인해 달라고 해야겠다. 이 정도로 판을 넓힌 걸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흰둥아, 아키드를 들여보내 줘!”

내 허락이 떨어지자 방어벽 일부가 허물어졌다. 그 틈으로 아키드가 방어벽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로에나!”

“아키, 전 괜찮아요. 그것보다…….”

그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려고 입을 열었으나 아키드는 듣지 않았다.

“잘못되는 줄 알았잖습니까!”

오히려 그가 거친 음성을 토하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땀에 젖은 숨과 파르르 떨리는 몸이 나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여실히 느껴지게 했다.

그제야 아키드의 마음을 뒷전으로 두었다는 자책에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후, 정말…… 돌아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손을 놓아주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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