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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53)화 (153/177)
  • #153.

    데미안은 묵묵부답으로 저를 뚜하게 쳐다보는 엘레나에게 설명을 이었다.

    “그냥 선물입니다. 독은 없고요, 벌레나 벌의 여부도 확인한 확실하고 안전한 꽃다발입니다. 해코지할 의도는 없는 것이니 그냥 받으시죠.”

    그간 한 번도 꽃다발을 순순히 받아 주지 않으니 하는 말이었다.

    매번 강매하듯 엘레나에게 쥐여 주거나 시녀를 통해 전하곤 했었다.

    이번만큼은 흔쾌히 받아 주면 좋겠건만. 어째서 오히려 엘레나의 표정이 사나워지는 건지 모르겠다.

    데미안은 하는 수 없이 곁에 선 아리아 백작 부인에게 꽃다발을 건네려 했다.

    그때 엘레나가 꽃다발을 채 가며 향기를 맡았다.

    “확실히 그래 보이네요.”

    “…….”

    “그런데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선물이 맞나요?”

    엘레나의 질문에 데미안이 움찔했다. 일말의 의도도 없이 여자한테 꽃을 선물하는 미친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선뜻 내뱉어지지 않았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아무 말이 없자 엘레나가 말했다.

    “호감을 표시하기에 이것만 한 선물은 없겠죠. 갑자기 내게 관심이라도 생긴 모양이에요.”

    “그건…….”

    데미안이 얼굴을 붉힌 채 허둥지둥했다. 그사이 엘레나가 아리아 백작 부인에게 꽃을 화병에 담아 두라 지시했다.

    아리아 백작 부인이 나간 후 단둘이 되자 데미안이 헛기침을 하며 서두를 던졌다.

    “그래요. 맞아요, 저는…….”

    그가 막 사심이었다고 인정하려는 찰나였다. 돌연 엘레나가 데미안의 팔을 지그시 끌어 거리를 좁혔다.

    엉겁결에 상체를 기울인 데미안이 놀라 쳐다보자 그녀가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대공에게 받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그 미소를 본 데미안이 움찔, 떨며 홀리듯 그녀의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내내 거부하던 그녀가 드디어 다가와 준 터라 내심 속에서 기대감이 들었다.

    더는 미움받고자 애쓸 필요가 없는, 그녀와 전처럼 단란한 부부가 되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듯했다.

    데미안이 숭고한 맹세를 하듯 뜨거운 숨을 토하며 말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이를 본 엘레나는 속으로 조소했다. 다음 말이 이어지면 그의 표정에 금이 갈 걸 알기에 더더욱.

    그녀는 아까보다도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데미안을 괴롭히고 난 후에 짓는 표정처럼 아주 환한 미소였다.

    “아이를 갖고 싶어요.”

    “…….”

    “요즘 대공도 나를 피하지 않는 듯하니 아이 하나쯤은 낳을 수 있겠죠. 이왕이면 딸이…….”

    “그건 안 됩니다.”

    데미안이 엘레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절하며 벌떡 일어나 거리를 성큼 벌렸다.

    “다른 건 다 되지만 그것만은 안 돼.”

    단호하고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 선언에 엘레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쩐지 입 안이 쓴 기분이었다. 그가 이토록 저를 거부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기에 더더욱.

    엘레나가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왜요? 요 며칠 나를 유혹하지 못해 안달 나 있었으면서. 왜 아이는 안 된다는 건데?”

    엘레나의 추궁에 데미안이 평소보다도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상하게도 겁에 질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데미안이 얼빠져 있는 사이 엘레나가 그의 멱살을 쥐어 제게로 당겼다.

    바짝 가까워진 거리에 놀랄 틈도 없이 엘레나가 말했다.

    “디안, 그동안 내가 그대를 도발할 때마다 속으로 웃었겠어.”

    “……?”

    “아이도 갖지 못하면서 웬 허세인가 했겠지. 속으로 나를 동정이라도 했나 봐?”

    “!!”

    오랜만에 애칭으로 불렸다는 것에 일순 열이 확 끼쳤다가 그녀의 뒷말을 듣고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데미안은 온탕과 냉탕을 연달아 들어간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그는 그녀가 스스로의 비밀을 여과 없이 말했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 비밀은 그녀의 자존심과 직결된 일이었으니까.

    데미안의 청회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가 저를 붙든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쩐지 그녀의 입을 막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엘라, 나는…….”

    하지만 이미 결심한 그녀의 입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녀가 냉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택해요. 나랑 아이를 만들지, 아니면 이혼할지.”

    죽이든가 버리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니. 그건 너무도 잔인한 선택지였다.

    데미안은 둘 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맥없이 손을 놓았다.

    이에 엘레나가 한 발짝 물러나며 그의 눈을 직시했다.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을 때, 이런 선택지가 등장할 걸 미리 알았어야지.”

    따스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는 뜻을 굽힐 의지가 없음을 알렸다.

    잠시 후, 엘레나가 석상처럼 굳어 버린 데미안을 지나쳐 응접실을 나갔다.

    데미안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 * *

    인트라비아는 제례를 보려는 인파들로 가득했다.

    한편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하델루스 일가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우선 엘레나가 평소보다도 훨씬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데미안이 멀찍이 떨어진 채 힐끔거리고 있었고.

    그가 잔뜩 주눅 들어 있는 표정을 보면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의 분위기를 읽은 사람은 아키드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두 사람보다도 로에나가 더더욱 신경 쓰였다. 아키드가 로에나에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안색이 안 좋은데.”

    아키드의 물음에 로에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일은요. 아무 일도 없어요.”

    축 처진 어깨는 힘이 하나도 없어 위태로워 보였다.

    간혹 저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 물러서는 걸 보면 뭔가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아키드는 행사가 끝난 후에 로에나에게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동시에 왠지 모를 불안감에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제가 손에 땀이 차서…….”

    하지만 채 온기를 느끼기도 전에 로에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떼어 냈다.

    그녀가 먼저 스킨십을 거부한 건 처음 있는 일.

    아키드가 충격받은 얼굴로 로에나를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시선을 피해 버린 후였다.

    행렬은 마침 ‘인연의 시작’ 분수를 지나가고 있었다. 제례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평민도 그 행렬을 쫓아갈 수 있었다.

    평소라면 평민이 출입할 수 없는 상위 지구까지도 개방되기에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교황이 분수대 앞에서 기도한 후 도로 행진이 이어졌다.

    사제복을 입은 귀족들이 뒤따라 가는 광경은 무척이나 성스럽고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렇게 막 아칼리무트로 진입하려던 때였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돌연 하늘이 새까매졌다.

    먹구름이 해를 가린 것도 모자라 하늘 위에 기이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헉!”

    이를 본 사람들이 숨을 삼키며 수군거렸다. 어느새 하늘이 쭉 찢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뻥 뚫리며 커다란 공간이 생겼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보던 늙은 귀족 하나가 벌벌 떨며 소리쳤다.

    “마, 마계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하늘에서 마수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마계의 문이 열리기 전.

    나는 세체르와 했던 대화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우선 그녀가 과거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흑마법사였다는 사실은 제쳐 두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제물’의 의미가 나에겐 더더욱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제물은 금기를 어겨 흑마법을 성공시킨 영혼을 뜻합니다. 세계의 금기를 어긴 죄로 평생 고통받으며 살다가 비참하게 죽고 또 죽는 삶을 살 비운의 영혼들이자 흑마법사들의 먹잇감이죠.’

    세체르는 과거 금기를 어긴 일로 형벌을 받고 있다고 했다. 금기를 어긴 영혼에겐 죽음이라는 안식이 없다나.

    특히 대재앙으로 세계를 초토화시킨 세체르는 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스스로 제 몸에 오염을 가두며 살았다고 했다.

    오염이 극한치에 다다라 죽더라도 어차피 다시 살아난다는 걸 알고 나서는 쭉 그래 왔다고.

    대단한 집념이면서 스스로 벌을 주는 행위였다. 그렇다면 그녀의 병이 의술로는 해결 안 된다던 과거 발언이 이해가 되었다.

    그건 그녀 스스로가 자신에게 주는 벌이자 씻을 수 없는 죄의 흔적이니까.

    ‘흑마법사들의 먹잇감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그들의 숙원을 이뤄 줄 산 제물이 바로 금기를 어긴 영혼이니까요. 특히 금기를 어긴 직후의 제물이 가장 적합합니다.’

    ‘숙원이라니?’

    ‘그들은 과거 악룡 아델쿠스가 대륙에 머물던 때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제물은 그 악룡 아델쿠스를 소환할 수 있는 유일한 영혼이고요.’

    세체르는 어차피 그 소환 마법은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라 조용히 떠나려 했단다. 더는 흑마법사들과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나.

    한데 내가 로에나의 몸에 빙의했다는 말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그들의 용어를 발설한 것이었다.

    세체르가 내 의구심을 알기라도 하듯 말을 덧붙였다.

    ‘단언컨대 대공자비님께서 몸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부인께는 의식을 치른 흔적도, 동류의 낌새도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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