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제례는 7지구에서부터 행진을 시작해 1지구의 황성 아칼리무트 내부의 신전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행렬은 6지구의 ‘인연의 시작’ 분수와 같은, 각 지구의 자파르시아의 석상을 하나씩 찍으며 지나가게 된다.
이때 귀족들은 무장을 해제한 채 달마티카를 입고 사제들과 같이 행렬을 이었다.
암룡이 주신 힘을 소중히 기리기 위한 의식이라 무력 행동을 일체 금하는 탓이었다.
이번에 봉화를 맡게 된 메이벨은 조금 눈에 띄는 황금색 팔루다멘툼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봉화를 맡은 교황이 주로 입는 예복이었다. 메이벨은 어제저녁부터 소식이 없는 제이드가 조금 신경 쓰였으나 준비는 얼추 마친 채였다.
그녀가 품 안의 유리병을 매만졌다. 본래는 로에나를 죽이기 위해 구했던 약.
공교롭게도 후작의 방해로 미수에 그친 일이었다.
이후 무용지물이라 여겨 방치해 두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쓸모를 찾은 상태였다.
그것도 성가신 아카데미에 막 입학해 캐서린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말이다.
‘불 속성 마법을 각성하셨다고요?’
‘응. 얼마 전에 했어.’
캐서린이 향초의 불을 켜며 ‘봤지?’ 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 메이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에 루이스인 그녀가 에셀의 불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 없는 탓이었다.
저조차도 금술을 저질러 사용할 수 없게 된 힘을 그녀가 얻었을 리 없었다.
그 말인즉, 각성도 못 한 주제에 각성한 척 시치미를 뗀다는 뜻이었다.
마치 과거 제로니스가 미각성 발작을 숨기려 각성한 척 행동했던 것처럼 말이다.
메이벨은 그녀가 각성하지 않고도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까진 알지 못했다.
애초에 완성형일 때 만난 터라 다들 그녀가 운 좋게 각성기를 무사히 지나갔다고 여긴 탓이었다.
캐서린의 손목에서 에셀 공작의 힘이 깃든 팔찌를 발견했을 때는 거의 확신했다.
‘너는 누릴 만큼 누려 왔잖아. 그러니 이제 제발 죽어 줘.’
루이스로 각성했다면 이깟 독은 그녀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못하겠지만, 지금 그녀는 한낱 유충일 뿐이다.
분명 독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될 터.
메이벨이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제로니스가 제게 조금만 다정하게 굴었어도 이런 미친 짓까지 저지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제게 쌀쌀맞을뿐더러 왜인지 각성을 마친 상태였다.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이른 각성이었다. 대체 그 여자가 뭐길래, 자꾸만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지 몰라 짜증이 솟구쳤다.
게다가 그가 저를 경계하는 모습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메이벨을 더욱 화나게 했다.
이래저래 온 세상이 그녀 하나만을 따돌리는 기분이었다.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꼬여 버리니 이제는 하나하나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메이벨이 각오를 다잡고 방을 나선 때였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사제가 메이벨의 앞을 가로막으며 손목을 내보였다.
안쪽 손목의 문신을 확인한 메이벨이 피식 웃었다.
“제이드가 보냈나?”
메이벨의 물음에 사제가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어제 내내 연락이 없더니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제이드가 노리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이쪽을 신경 쓸 틈은 없겠지.
메이벨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와 서로의 물건을 교환했다. 이번 제례를 틈타 성가신 존재를 없애고 명예도 모두 저가 얻으리라.
‘아무리 정령사래도 딜란까지 먹은 상태로 힘을 쓰려면 힘들겠지. 어디 한번 너도 고생 좀 해 보라고.’
메이벨은 로에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미래를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 동시에 오랜 숙적을 처리할 생각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때 사제가 쪽지 하나를 건넸다.
“거사를 마친 후 이곳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쪽도 수고하라고 전해.”
메이벨이 쪽지의 내용을 확인 후 구겨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삽시간에 소환된 검은 새가 종이를 먹어 치우고 도로 사라졌다.
임무를 완수한 사제가 조용히 메이벨에게서 물러났다.
우중충한 하늘이 다가올 불행을 예견하듯 회색빛이었다.
* * *
수도에 일찍 도착한 대공 부부는 예정에도 없던 제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엘레나가 검은색 바탕에 청회색 자수가 놓인 달마티카를 입고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황녀일 적 입었던 금색 달마티카와는 대조되는 어둑한 색감은 하델루스의 사람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같은 디자인의 달마티카를 입은 데미안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웬 백합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자연히 그녀의 시선이 꽃으로 향했다.
최근 그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저렇듯 꽃을 들고 오곤 했다.
처음엔 죽을 때가 된 건가, 의심했었는데…….
엘레나가 지난 황실 방문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 자카리에게서 뜻밖의 이야길 들은 탓이었다.
저와 데미안의 사이가 제법 좋아 보였는지 이제는 괜찮을 줄 알고 밝힌 말이었으나 엘레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하필 그게 데미안이 결혼 전부터 제 몸 상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아주 황당한 이야기였으니까.
엘레나는 자카리와의 대화를 회상했다.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
엘레나가 자카리를 작게 힐난했다. 즉위한 이후 한 번도 황제를 편하게 대한 적 없던 그녀가 황자일 적 대하듯 말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만큼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이에 자카리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랬지. 그렇지만 이건 황제로서의 결정이었어, 누이. 하델루스마저 루이스처럼 되도록 둘 순 없으니까.’
‘애초에 그의 청혼을 거절하라고 했으면 됐잖아.’
‘누이.’
‘파혼하겠다는 내 말에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약속을 저버릴 수가 있어, 자카리.’
엘레나는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항변했다.
그녀가 데미안의 청혼을 받아들인 당시만 해도 제 몸 상태가 아이를 잉태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살얼음판과 같은 황실에서 자카리와 의지하며 살아왔었다.
선황의 하렘이 크면 클수록 황족들은 수난 시대가 따로 없었으니까.
해서 엘레나는 어릴 적부터 자주 독살 위험에 노출되곤 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독을 마신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게 제 몸을 망가지게 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자카리가 황제가 되고 과거와 같은 위협이 사라졌을 때도 생리 주기가 불규칙하긴 했지만 아이를 낳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여겨 왔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한 정밀 검사에서 엘레나는 아이를 낳아선 안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몸속 독소가 아이를 잉태하기 어렵게 할뿐더러 기적적으로 임신을 한다 해도 출산까지 이어질 확률이 지극히 드물다고 진단받은 탓이었다.
억지로 아이를 낳으려 하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엘레나는 절망했다.
그리고 곧장 자카리를 찾아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고, 자카리는 파혼은 안 된다고 일축했었다.
그랬기에 그가 데미안에게 그 사실을 진즉 말했다는 게 엘레나를 분노케 했다.
‘내가, 파혼하게 해 달라고 빌었잖아. 그냥 평생 혼자서 지내겠다는 말을 거절해 놓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엘레나의 호소에 자카리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의 눈도 엘레나 못지않게 열기로 충혈되어 있었다.
‘누이가 그렇게 된 데에 내게도 책임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 나 대신 독을 마신 탓에 그렇게 된 거잖아.’
‘딱히 너를 위해 한 게 아니야.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살아남으려고 그랬을 뿐이니 괜한 죄책감 갖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적의 위협을 피해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독쯤은 백 번이라도 먹을 터였다.
그렇게 해서 자카리를 황제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엘레나의 대답에 자카리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누이는 항상 그런 식이지! 남을 위해 희생해 놓고는 별거 아니란 듯이 말해 사람을 괴롭게 해. 누이는 욕심도 없어? 솔직히 그 결혼, 정말 하고 싶어 했잖아.’
데미안이라면 평생 심심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엘레나는 제 감정에 워낙 서툴기에 그게 호감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로에나처럼 덜컥 다가온 상대가 드물었다. 대개 엘레나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다가오지 못하고 지레 겁을 먹기 일쑤였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 왜 이렇게 아이같이 구는 거니, 자카리.’
‘그래, 나는 여전히 애 같아서 누이를 위해 대공에게 지독한 선택지를 주었어. 누이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황제의 권위로 그를 협박했다고. 하델루스의 명맥이 끊어져선 안 되니 첩을 들여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말이야.’
‘!!’
‘애초에 그에게 파혼이란 선택지를 고르지 못하게 한 건 나야. 내가 그의 방탕한 생활을 묵인한 이유가 바로 그거고.’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몇 번을 생각해도 화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 엘레나는 황궁에 방문하지 않았고, 자카리의 서신도 펼쳐 보지 않은 채 태워 버렸다.
저를 위해 대공을 협박한 황제나, 그런 황제의 일방적인 횡포에 반기도 들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대공이나 하나같이 짜증스러웠다.
제아무리 상대가 황족이라 해도 애초에 거절할 수 있을 권력이 있는 데미안이 파혼을 강행하지 않은 것도 황당할 뿐이었다.
‘분명 죄책감 때문이었겠지.’
본인은 아니라지만 엘레나는 그가 제법 책임감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빌어먹을 책임감 때문에 제게 청혼했다는 사실까지도.
그때 데미안이 꽃다발을 흔들며 물었다.
“또 안 받으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