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51)화 (151/177)
  • #151.

    ‘뭔가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건 확실하네.’

    내가 준 구슬이 캐서린에게 영향을 끼친 듯했다. 역시 그때 내 손목의 상처가 나은 건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구슬의 후폭풍이 지금 몰려오는 중인 것 같고.

    ‘제로니스에겐 미안하지만 이건 캐서린이 이겨 내야 할 일이야.’

    캐서린이 모두를 피하기 시작한 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란 탓이리라.

    평생 누군가의 대타로 살아왔다는 걸 알았는데 멀쩡할 리 없었다.

    아마 그녀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래도 한번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겠다는 서신을 보낸 직후였다.

    노크와 함께 세체르가 들어왔다. 떠나기 전에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환대하며 말했다.

    “막상 떠난다고 하니 섭섭하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지요.”

    “그 말은 어디로 가냐고 물어도 알려 주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내 물음에 세체르가 긍정하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일전에 세체르는 돌연 떠나겠다고 말했다.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그간 무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수도엔 훌륭한 의원이 많으니 더 머물라 제안했으나 의술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거절한 지 오래였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고 느꼈다. 애초에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존재였으니까.

    사실 처음 그녀와 마주쳤을 때는 꺼림칙함이 먼저 들었었다. 해몽을 잘하는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아는 게 많아 보여서였다.

    특히 내가 타인의 몸에 빙의했다는 걸 간파했을 때는 조금 소름이 돋았었다.

    오죽하면 내가 원작으로 미래를 보았듯 그녀 나름의 사연으로 이 세계의 미래라도 보고 왔나 싶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이 세계가 금술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않았던가?

    세체르가 나를 기민하게 살피며 말했다.

    “이전에 뵈었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이시는군요. 그사이 해답이라도 찾으셨습니까?”

    “그냥 짐을 나눠 짊어져 줄 사람을 한 명 찾은 기분이라네.”

    나는 아키드에게 내가 빙의했음을 말한 후 전보다 훨씬 후련해진 상태였다.

    가장 이해받고 싶은 상대에게 이해받은 직후이니 당연했다.

    나는 로에나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살아남은 이 순간만큼은 이전의 그녀에겐 없던 삶이니까. 그야말로 온전한 내 것이니까.

    아키드를 떠올리니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세체르가 떠나기 전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녀는 금술에 대해 제법 이해가 깊은 것 같았으니까.

    “세체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시지요.”

    “바뀐 영혼을 되돌릴 방법은 없는 건가?”

    “……그건 왜 궁금해하시는지요?”

    느릿한 대답에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딱히 두 사람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제로니스의 서신을 받으니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혹시라도 캐서린이 본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수도 있으니 방도가 있을까 싶어 물은 것이기도 했다.

    “마침 상대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거든. 꿈을 통해서.”

    꿈이라는 말에 세체르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언뜻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하고 중얼거렸는데,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금술을 어긴 당사자의 의지가 없는 한 불가능할뿐더러 이제 와서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하긴 몸이 바뀐 지 꽤 시간이 경과했으니 되돌리는 게 어렵긴 하겠네.”

    단칼에 대답하는 걸 보니 여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선선히 수긍하는 나를 보며 세체르가 말을 덧붙였다.

    “설령 되돌리는 게 가능하다 해도 영혼만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말은…….”

    “되돌린 시간까지도 함께 움직여야겠지요. 한 가지의 금술만 없던 일로 돌리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섬뜩한 대답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그럴 게 메이벨과 캐서린이 있던 시간 속에는 로에나 하델루스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시간과 영혼을 제자리로 돌린다는 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과도 같았다.

    애초에 원작 속 로에나는 이때까지 살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것참, 다행이면서도 무서운 일이네.”

    나는 괜스레 팔을 쓸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 모든 게 가능하다 해도 악녀가 다시 본래 시간과 신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원작에서 그녀는 벼랑 끝에 내몰린 상태였으니까. 결말 이후 그녀가 선택한 건 결국 흑마법이었고.

    그러니 다시 돌아가 죄수로서 삶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원작에서 접한 캐서린의 성격상 절대 그런 비참한 삶을 잇고 싶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특히 이번 삶에서 내가 직접 겪은 메이벨이라면 더더욱 그런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나는 상념을 떨쳐 내며 질문을 이었다.

    “그럼 금술에 영향을 받은 영혼이 죽는 경우도 있는가?”

    “누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세체르가 의외라는 듯이 되묻자 내가 여상히 대꾸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아니잖나. 한데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영혼은 어디에도 없는 거 같거든.”

    “예?”

    그 순간 세체르의 가는 눈동자가 홉떠졌다. 마치 내 빙의 사실을 처음 듣는다는 듯 한껏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사실 전부터 궁금했다. 진짜 로에나는 정말 그때 그 호수에서 죽은 게 맞는 걸까, 하고.

    원래라면 로에나는 각성 전 전염병으로 죽어야 했던 영혼이기에 더더욱 의문만이 남은 일이었다.

    그저 이것 역시 흑마법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체르의 반응을 보니 내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세체르? 왜 그러는가? 내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리 놀라?”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 제가 말한 뜻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세체르가 입가를 손으로 연신 훔치며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해요.”

    세체르는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자꾸만 불가능하다는 소리만 읊조렸다.

    그녀의 반응에 나까지 불안해져 그녀를 재촉했다.

    “알아듣게 설명해 줘. 뭐가 불가능하다는 거야?”

    “금술이 행해진 영혼은 둘입니다. 부인께서는 제물이 아니니 영혼이 바뀌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고요.”

    나는 제물이라는 말에 입을 헤벌렸다. 납치 당시 그 단어를 흑마법사들이 언급하는 걸 들은 탓이었다.

    “잠깐만. 그대가 제물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아는 건가?”

    나조차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한 질문이었다.

    굳은 얼굴로 묻는 말에 세체르가 아차 하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게 수상해 거리를 벌리며 경계태세를 하자 그녀가 돌연 한숨을 쉬었다.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범인이 내가 범인이오, 하는 경우는 없지.”

    의심이 싹트니 세체르의 이전 행동들이 하나같이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전부터 이상했어. 자넨 금술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잖아. 대체 정체가 뭐지?”

    혼란스러워하는 말에 세체르가 돌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기괴한 노파의 웃음소리에 흠칫, 떠는데 그녀가 정색하며 말했다.

    “이것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제가 노망이 나 실수를 저질렀네요.”

    “…….”

    “제물에 대해서 어찌 아느냐고요?”

    그 말과 함께 세체르가 윗옷을 늘어뜨려 가슴께를 드러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말리기도 전에 그녀의 심장께에 있는 선명한 금술의 흔적을 발견한 나는 충격으로 입을 헤벌렸다.

    아주 오래전, 정령들이 직접 보았다던 표식이 세체르의 가슴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것도 정령들이 그려 준 것과 일치하는 금기를 어긴 흔적이. 정령들도 이를 보곤 몸을 떨며 혼란스러워했다.

    ― 저거, 저거……! 그때 그, 그, 그거잖아!

    ― 허, 허어, 헉.

    ― 왜, 왜, 왜 아직도 살아 있지?

    몇몇 정령은 바닥에 툭 늘어져 부르르 떨기만 했다.

    나 역시 주저앉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표식은 분명 과거 대재앙을 일으켰다던 자의 표식과 같았다.

    말도 안 돼. 그런 자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그럴 리가. 그자를 대책 없이 죽인 바람에 대재앙이 더 악화되었다고 들었다.

    여태 생존해 있을 리 없는 자가 어째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자 세체르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이게 뭔지 단번에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보나 마나 수다스러운 정령들에게 들었겠죠.”

    “……!”

    내가 정령사라는 것까지 간파당하자 오금이 저렸다.

    ― 저리 가! 내 정령사한테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정령들이 나를 보호하려 스스로를 실체화하자 세체르가 말했다. 마치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리는 양.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나야말로 한때 제물 그 자체였던 사람인데, 또다시 그 미친 짓을 하고 싶어 할 리 없지 않나.”

    “목소리가 들려?”

    “이제는 들리지 않아요. 그저 하는 짓이 딱 봐도 경계하는 듯해서 짐작했을 뿐입니다.”

    그 말은 전에는 들렸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얼이 빠진 채 서 있자 세체르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충성심에 눈멀어 소중한 것을 스스로 앗아 버린 멍청이가 바로 저거든요.”

    이어진 세체르의 충격적인 고백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