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인트라비아의 유명 인사가 된 메이벨은 신전의 요청으로 저를 만나러 온 이들에게 축도해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행렬은 줄어들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한 자세로 오래 있던 탓에 메이벨은 허리가 뭉치는 기분이었다.
왜 이곳까지 와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들 메이벨을 성녀라고 추앙하면서도 정작 그에 맞는 예우를 하지는 않았다.
무례하게 달려드는 자가 있는가 하면, 궁금하지도 않은 가정사를 운운하며 도움의 손길을 바라기도 했다.
하나같이 뭔가 얻어 가려고 눈이 벌게진 채 달려드는 이리의 눈빛이라 메이벨은 피곤했다.
이딴 짓을 그 여자는 웃으면서 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렇게 거짓 미소로 이어진 행렬을 모두 소화하던 때였다. 웬 허름한 옷을 입은 노파 차례가 되자 메이벨은 움찔했다.
그녀에게서 동류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탓이었다.
삐걱거리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노파가 히죽 웃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었다.
그녀가 메이벨의 영웅담이 적힌 책을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평범하고 덜 피곤한 요구였다.
메이벨이 꺼림칙함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성함이?”
“세체르올시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체르 씨에게 자파르시아 님의 은혜와 자비가 함께하시기를 바라요.”
“아델쿠스가 아니라요?”
“!!”
세체르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메이벨의 미소에 금이 갔다.
아델쿠스는 흑마법사들의 조상이자 흑마법의 창시자인 악룡의 이름이었다.
악룡, 아델쿠스.
암룡 자파르시아의 아우이자 숙적이며 그에게 봉인당해 버린 비운의 드래곤.
흑마법사들에게야 영웅이지 이곳 하인트 제국에선 최종 악당에 버금가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신전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몰려 있는 현장에서 대놓고 언급하다니.
메이벨이 불쾌한 얼굴로 시침을 떼며 말했다.
“무슨 뜻인가요?”
애초에 흑마법사들의 영웅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흑마법사였던 게 아니었으니까.
절박한 저에게 달콤한 미끼를 던져 무리로 끌어들인 건 그들이었다. 오히려 아델쿠스라면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메이벨의 냉랭한 반응에 세체르가 호호호, 웃음을 터트렸다.
“다 아시리라 믿었는데요.”
“……후작이 보냈나?”
“저를 움직이는 건 오로지 저뿐이지요. 저는 당신을 도우러 왔습니다.”
“나를 도와?”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흑마법사들은 그녀를 돕기는커녕 이용하기 바쁜 자들이 아니었는가.
메이벨이 전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세체르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처음 그때로.”
“!!”
“원한다면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줄게요. 몸에 더 무리가 오기 전에 말이에요.”
세체르의 말에 메이벨이 입술을 헤벌렸다. 노파가 말하는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 직감적으로 눈치챈 탓이었다.
메이벨이 굳은 채 아무 말이 없자 세체르가 사인 된 책을 가져가며 말했다.
“저기 큰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메이벨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멀어져 가는 세체르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메이벨에게 구태여 내가 딜란을 먹었다고 언질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나탈리 후작이 나에게 접근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때를 노려 제이드와 후작 사이를 완전히 뒤흔들 생각이었다.
과거 한차례 딜란으로 농간을 저질렀던 나탈리 후작이었다.
사실 그녀가 그 일을 통해 노린 건 엠버 가문만이 아니었다.
나탈리 후작은 딜란의 부작용으로 고통받던 데미안에게 효과가 제법 있는 해독약을 주었었다고 했다.
완벽하진 않아도 데미안에게는 꽤 먹혔고 덕분에 몸의 독소를 빠르게 해독할 수 있었다고.
그 일로 데미안과 엘레나가 나탈리 후작과 가까워졌다고 했으니, 나탈리 후작이 노린 건 그들도 포함이었다.
모든 죄는 엠버에게로, 모든 공은 후작 본인에게로.
참으로 치밀한 계획범죄였다. 데미안과 엘레나가 이를 갈며 나탈리 후작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당연했다.
병 주고 약 주는 줄 모르고 후작이 입지를 다지는 데 요긴하게 이용당한 탓이었다.
그때 내 계획을 들은 아키드가 말했다.
“제이드가 후작에게 그 정보를 넘길까요? 보아하니 메이벨과 손을 잡은 것 같은데.”
“아무리 메이벨과 손을 잡았다 해도 당장에 나탈리 후작과 반목하려 들지는 않을 거예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야 흑마법사들의 현 수장은 나탈리 후작이고, 그에겐 감시자가 붙어 있으니까요. 제이드가 아무리 전 수장의 후예라고 해도 죽은 수장 본인은 아니잖아요.”
그래. 아무리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섣불리 수장에게 들이받을 만큼 제이드는 멍청하지 않았다.
나탈리 후작이 아무리 카타콤에 발이 묶여 있다 해도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니까.
의심받지 않을 만큼의 정보를 제공하며 후작과 메이벨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오갈 게 뻔했다.
그게 내가 파놓은 함정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탈리 후작은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거예요. 그녀가 제게 접근하려 할 때가 우리에겐 기회예요.”
나는 스스로 미끼가 된 셈이었다. 아키드는 그게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계획을 말해 준 것에 어느 정도 불안함이 풀린 것 같았다.
그가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로네가 위험할 것 같으면 계획이고 뭐고 당신부터 구할 겁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해도요?”
“잡힐지, 안 잡힐지 모를 기회보다 눈앞의 로네의 안전이 제게는 더 중요하니까요.”
아키드가 비교할 대상을 비교하라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눈앞에 있는 기회보다도 내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어쩐지 쑥스러워진 내가 볼을 붉히며 말했다.
“방금 그 말, 굉장히 멋진 거 알아요?”
역시 내 최애는 나날이 새롭게 매력을 발산하는 진화하는 존재였다.
내가 붙들린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기까지 하자 그가 씨익 웃었다. 그가 내 손을 끌어다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저는 로네가 원한다면 기회도 잡고 당신도 지켜 낼 겁니다.”
“저도 이왕이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게 더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번 계획을 놀이에 비유하며 말을 이었다.
“일종의 토끼몰이예요.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한쪽으로 몰려 잡히게 될 거예요.”
이미 제이드가 감옥에 갇힌 흑마법사들과 뭍에 숨어 있는 자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둘로 쪼개진 집단만큼 몰아붙이기 쉬운 일도 없었다.
게다가 믿고 의지했던 수장이 사실 전 수장을 모함해 멸문당하게 한 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아주 즐거운 놀이가 예정된 것처럼 히죽 웃었다.
“우린 그때를 노려 카타콤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리자고요.”
더는 금기를 어기는 짓 따위는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씨를 말려 버리리라.
도전적인 상황은 나를 늘 두근거리게 했다. 이미 숱한 성공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지난번엔 어리바리하게 있다가 크게 당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들이 직접 카타콤의 위치를 까발리도록 할 테다. 설령 일이 틀어지더라도 임기응변에는 자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동의를 구하듯 그를 따라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렇지 않나요?”
“로네가 즐겁다면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아키드가 손을 물리며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마치 입술이 닿을 곳이 거기가 아니란 듯이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그가 그윽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나직이 속삭였다.
“지금은 다른 재미를 아셨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재미라면 어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자 아키드가 낮게 웃었다.
그가 깍지 낀 손을 더욱 얽으며 다른 손으로 내 턱을 아래로 눌렀다.
자연히 입술이 벌어지자 그가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떼며 말했다.
“이런 재미는 어떠신가요?”
싱그러운 미소까지 지으며 하는 말에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키, 솔직히 말해요.”
“무얼 말입니까?”
“이게 어떻게 참는 사람의 행동이에요?”
이건 반칙이다.
아니, 고문이다!
이렇게 자꾸 유혹만 하고 정작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니.
나를 안달 나게 해서 죽이려는 게 분명한 행위에 어쩐지 애가 닳았다. 내 새된 음성에 아키드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참고 있는 거 맞습니다. 스스로 참을성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
“물론 언제까지 참아질지는 로에나에게 달려 있지만.”
아키드가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에 내 머릿속은 정신이 없었다.
‘이게 어딜 봐서 참는 건데요. 네? 왜 자꾸 나를 시험에 빠뜨리는 거야.’
나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는 그의 플러팅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이게 바로 그림의 떡이란 말인가.
눈앞에 아주 멋지고 잘생기고 조신하고 훌륭한 남편을 두고 독수공방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찔끔 날 것만 같았다.
내가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는 사이 아키드가 또다시 입술을 훔치고 달아났다. 그게 아쉬워 쳐다보니 그가 말했다.
“허락 없이는 이 이상 건드리지 않을 테니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닛…….”
“그럼 이번 놀이는 이쯤에서 끝내는 거로 하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끝을 낸다고요?
그럼 입이라도 더 맞춰 줘야 내가 덜 괴롭지 않겠어요?
나는 어쩐지 내가 매달려야 될 것만 같은 상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아키드를 허탈하게 쳐다보았다.
‘이대로 그냥 질러 버려?’ 같은 음험한 생각을 하고 있던 때 내 속은 까맣게 모르는 그가 말했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재촉하는 거라고 여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