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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46)화 (146/177)
  • #146.

    사랑한다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아키드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나와 달리 그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일전에 보였던 동요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오히려 동요한 건 나였다.

    나는 그의 끈적한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다.

    그때 그가 내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건, 어디에서 만나건 제가 로네를 사랑한다는 건 변하지 않을 거란 뜻입니다.”

    “아키…….”

    “설령 우리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았다고 해도……. 인연이 닿는 한 그때에도 저는 로네를 사랑할 겁니다.”

    아키드는 그 말과 함께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다가오는 눈빛이, 머금은 숨결이, 뺨에 닿은 손길이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나는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이미 그날 몇 번이나 해 본 입맞춤이니 익숙해질 법한데. 오히려 하면 할수록 새로운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매달리며 입을 맞췄다.

    그는 알까. 방금 그가 한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우리가 다른 세계에서 만난다 해도 나를 사랑하겠다는 말은 그저 꿈속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한 예시일 터였다.

    하지만 그 말은 어떤 것보다도 나를 충만하게 했다.

    그게 꼭 내가 어떤 모습이든지 나를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 같아서였다.

    내가 온몸을 맡기자 아키드가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 깊게 입을 맞추었다.

    복도 한복판에서 추격하다 말고 이어진 입맞춤은 뜬금없지만 강렬했다.

    정신없이 그에게 의지해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입술이 뭉개지고 멀어졌다 겹쳐지며 질척한 소음을 만들었다.

    주변에 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꼭 이 공간에 서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다.

    잠시 후, 나는 열에 들뜬 얼굴로 그를 나직이 불렀다.

    “아키.”

    “큿.”

    그 모습을 본 아키드가 미간을 좁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마치 더는 참지 못하겠으니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란 듯한 모습.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자 그가 연신 입술을 짓씹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아키드가 평소답지 않게 자제력을 잃고 무척이나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덜미부터 귀까지 붉어진 그의 모습은 내게도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보고 있는 나까지 빨개질 것 같았다.

    “어어…….”

    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한참이나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자 겨우 안정을 찾은 아키드가 나를 떼어 놓으며 말했다.

    “추태를 보여 미안합니다.”

    “…….”

    “제가 이렇게 위험한 사람일 줄은…….”

    아키드가 횡설수설하며 물러나려 했다. 나는 멀어진 체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쾅―!

    “로, 로에나?”

    아키드는 돌연 벽에 머리를 박은 나를 보고 기겁했다. 내가 또다시 머리를 박으려고 하자 그가 손으로 벽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미, 미, 미, 미안해요! 바, 방금 그 얼굴을 보니까 도, 도저히 진정이 안 돼서…….”

    나는 이대로 있다간 음란 마귀에게 정신을 지배당할 것만 같았다. 수절한 지 7년 차에 벌어진 대위기였다.

    이대로 있다간 아키드를 덮쳐 버릴지도 몰랐다. 내가 자꾸만 벽에 이마를 찧으려 하자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만하라니까.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들어요.”

    그러곤 더는 머리를 찧지 못하도록 꽉 붙들었다. 몸이 붙으니 머리가 더 핑글핑글 도는 기분이었다.

    ‘아닛! 이,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릴 무렵이었다. 뒤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분위기 좋아 보이는구나.”

    “어머니.”

    아키드가 엘레나를 알아보고 알은체를 했다. 그럼에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방금 상황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얼굴만 간신히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궁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일찍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아예 그냥 방으로 가지 그러니? 이래선 사용인들이 이쪽을 아예 지나가지도 못하지 않겠어?”

    한마디로 길 막지 말고 할 거면 들어가서 하라는 소리.

    엘레나의 적나라한 힐난에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반면 아키드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아직 키스밖에 못 해서요.”

    그 말은 곧 그 이상도 하겠다는 말이렷다.

    나는 아키드의 도발적인 반박에 잘 익은 벼처럼 자꾸만 얼굴이 수그러졌다. 정수리로 엘레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후, 그녀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딱히 너네 스킨십 진전 사항은 안 궁금하단다. 그것보다 대공이 안 보이던데.”

    “아, 아버지께선 엠버 성으로 가셨습니다.”

    나는 엠버 성이라는 말에 아키드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대공이 그 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반면 아직 대공의 계획을 모르는 엘레나는 갑작스러운 소식이 의아한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다 쓰러져 가는 곳에는 왜?”

    “성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오시기 전부터 사람을 시켜서 견적을 받아 가셨었고요.”

    아키드는 눈치껏 대외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엘레나는 흥미를 잃은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까운 노다지이긴 했지. 진즉 그러라고 해도 안 듣더니 별일이구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수심이 깊어 보였다. 아마도 옛 생각이 나서 그러시는 것이리라.

    나는 왠지 지금이 아키드의 품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인 것 같아 냉큼 일어났다.

    역시나 아까보다 그의 손아귀 힘이 느슨해져 빠져나오기 쉬웠다.

    “어머니, 오랜만에 티타임 어떠세요? 이왕이면 여자들끼리 오붓하게요.”

    “좋지.”

    엘레나는 내 제안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녀가 내 어깨를 붙든 채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아키드를 일별했다.

    “볼일 다 보았으면 새아가를 데리고 가도 되겠지?”

    “그러시죠.”

    아키드는 오히려 고맙다는 듯이 싱긋 미소 지었다. 사실 엘레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근처에 있는 아무 방에나 들어가서 일을 치렀을지도 모르고…….

    나는 방금 전 아키드의 뇌쇄적인 눈빛을 떠올리며 뺨을 어루만졌다. 순진하게만 보이던 그의 이면의 야성을 엿본 기분.

    테라스로 가는 내내 이상한 콧김을 뿜자 엘레나가 말했다.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구나. 혹여 내가 방해한 거니?”

    “아, 아니에요.”

    “분위기가 전보다 더욱 좋아진 것 같던데. 하긴 한창 뜨거울 때이기도 하지. 너희도 다 컸으니까.”

    “거, 걱정하지 마세요. 서약서의 내용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서약서라는 말에 엘레나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녀가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물었다.

    “설마 그동안 서약서 때문에 그렇게 내외했던 거니?”

    “네? 아, 네. 어쨌든 법적으로 약속한 일이기도 하고 저나 아키드나 너무 어릴 때 결혼을 했으니…….”

    “푸흡.”

    내가 횡설수설하며 진지하게 반응하니 엘레나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진지한 게 퍽 우스운 모양이었다.

    “아키드가 꽤 애를 먹고 있겠구나.”

    “네?”

    “아니다. 그나저나 못 본 새 얼굴이 반쪽이 된 것 같은데. 누가 괴롭혔니?”

    엘레나는 말만 하면 그게 누구든 묻어 주겠다는 듯이 상냥하면서도 살벌하게 질문했다.

    “말하면 혼내 주시려고요?”

    “혼만 낼 뿐이니. 네 눈앞에 얼씬도 못 하게 해 줘야지.”

    엘레나가 서늘히 미소 지으며 어서 말해 보란 듯이 재촉했다.

    이상하지. 그게 꼭 화풀이 상대를 찾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소싯적 ‘하인트의 미친개’를 연상하게 해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흑마법사들이 몸을 숨긴 일 때문에 조금 피곤했을 뿐이에요. 게다가 메이벨까지 그들 편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이 많고요.”

    대공 부부에겐 메이벨이 흑마법사와 내통하는 것 같다고만 언질한 상태였다.

    실은 이 오염의 원흉이 그녀라는 건 아직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아키드에게도 비밀로 한 채 나름대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엘레나가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우리가 너무 방심했던 모양이야. 설마 성녀가 흑마법사와 어울릴 줄 누가 알았겠니.”

    “파블로 예하께선 뭐라고 하시던가요?”

    “일단 제례가 코앞이니 상황을 지켜보자고 하더구나. 성녀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는 때에 그녀를 건드리는 건 위험하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녀를 유명인으로 만든 게 나이니 할 말이 없었지만, 빨리 수도로 데려오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메이벨이 오염의 원흉이라는 것도, 제이드가 실은 엠버가의 사생아이며 그 가문이 흑마법사의 전 수장 가문이었다는 것도 알아냈으니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그들이 탐내 마지않는 훌륭한 미끼인 정령사였다.

    그러니 분명 나탈리 후작이 어떻게든 내게 접근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그날이 제례 때가 아닐까 어림짐작했다.

    물론 심증일 뿐이지만 메이벨과 제이드가 유독 제례와 관련된 내용이 변경될 때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걸 보면 의심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가볍게 운을 떼며 엘레나를 향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도 대공과 계획 중인 일을 알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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