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45)화 (145/177)
  • #145.

    며칠 후, 대공 부부가 수도에 도착했다. 화려한 피켓 환영 이후에 나는 두 사람의 낌새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간파했다.

    꼭 오는 길에 싸우기라도 했는지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냉랭한 탓이었다.

    특히 엘레나가 데미안을 몹시 껄끄러워하는 게 보였다. 반면 데미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스러울 뿐이었다.

    엘레나는 데미안을 피하기 바빴고, 데미안은 왜인지 그녀를 졸졸졸 따라다니는 느낌.

    예전에도 데미안이 귀찮게 굴어 엘레나가 늘 피해 다녔으니 그리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그때와는 또 분위기가 살짝 달랐다. 나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 메이를 불러 슬쩍 떠보았다.

    “두 분, 북부에서 무슨 일 있었어?”

    “으음, 그게…….”

    메이가 눈치를 슬쩍 보는가 싶더니 내게 작게 귀띔했다.

    “대공 전하께서 요즘 이상해요.”

    “아버님이 이상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야?”

    내 태연한 반응에 메이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그건 그런데. 요즘은 좀 과하다고 할까요?”

    “뭐가 과해?”

    “대공비께 지나치게 잘하세요.”

    “응?”

    그거야말로 엄청난 문제였다. 데미안은 엘레나를 괴롭히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구는 성격 파탄자1이었으니까.

    물론 그에 부응하듯 엘레나도 만만치 않게 그를 헐뜯기 바쁘지 않았던가.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가 고민하는데 메이가 말을 덧붙였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 있잖아요. 혹시 어디 아프신 게 아닐까요?”

    아니, 그 정도야?

    원작에서 그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이어서 메이가 그간 데미안의 기이한 행동들에 대해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마님께 뜬금없이 꽃다발을 선물하기 시작하셨어요. 분명 음모가 있을 거라며 마님께선 꽃다발을 내버려 두셨는데, 글쎄……”

    “왜? 꽃다발 속에 꿀이라도 발라 뒀어?”

    엘레나가 벌을 끔찍이도 싫어해서 한 질문에 메이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뇨. 벌이 꼬이기는커녕 진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정말 그냥 선물이었나 봐요!”

    “…….”

    “그 후로 여러 차례 꽃을 주셨는데 한 번도 별일이 없었다니까요?”

    엄청난 일이라는 양 메이가 충격음 금치 못했다.

    나 역시 이어지는 데미안의 기이한 행보에 다소 얼떨떨했다.

    대충 데미안이 껌딱지처럼 엘레나를 졸졸졸 따라다닌다는 이야기인데.

    안 하던 짓을 자꾸 하니 엘레나는 그가 대형 사고를 쳤거나 시한부 삶이라도 선고받은 줄 아는 것 같았다.

    해서 그의 뒤를 캐고 있는 듯한데 뭐 하나 나오는 게 없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나는 데미안의 180도 돌변한 태도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그에게 충고했던 게 떠올랐다.

    더 미움받기 전에 삐뚤게 굴지 말라던 말에 데미안이 뭐라고 했더라.

    ‘어쩌다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도움은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 넌 비밀이나 지키거라.’

    흐음, 알아서 한다는 게 이런 식이라니.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서로의 오해를 대화로 풀고 관계 개선에 힘쓰란 뜻이었지 무턱대고 잘해 주란 게 아니었건만.

    엘레나와 데미안 사이에 파인 골은 그런 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엘레나의 반응을 보아라.

    잘해 주니까 오히려 음모론에 휩싸이지 않았는가?

    엘레나는 절대 데미안의 호의를 호감으로 여기지 않을지도 몰랐다.

    설령 호감으로 여긴다 해도 그간 그가 쌓은 업보가 있는데 하루아침에 바뀔라고.

    ‘아무래도 아버님께 뭔가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정작 당사자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되려면 한참이나 남았겠구나,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아키드를 보며 움찔했다.

    그날 도서관에서 흐지부지 이야기를 끝낸 이후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인 탓이었다.

    “작은 마님?”

    나도 모르게 메이를 두고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자 메이가 뒤에서 불렀다. 그리고…….

    ‘왜, 왜 따라오는 거야!’

    나는 덩달아 내 쪽으로 뛰기 시작하는 아키드에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은 추격전의 시작.

    우리를 본 사용인들이 복도에서 뛰면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뒤따라오는 아키드에게 따라잡히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정말 붙잡히겠다 싶어 내가 새된 음성을 토해 냈다.

    “왜, 왜 따라와요!”

    “그럼 로네는 왜 저를 피하는 겁니까?”

    “피, 피한 게 아니…… 앗!”

    내가 막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려던 때였다. 드레스 자락에 발이 걸린 내 몸이 크게 휘청였다.

    하필 붙잡을 것도 없는 데다 눈앞이 계단이었다. 최소 골절상을 입겠구나, 하고 질끈 눈을 감는데 강한 힘이 나를 바짝 끄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당겨진 힘에 나는 속절없이 뒤로 끌려갔다. 뒤이어 청량한 향과 함께 아키드가 나를 안고 뒤로 벌러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그가 벽에 쿵, 부딪쳤다. 졸지에 아키드의 품에 바싹 붙게 된 나는 커다란 소리에 놀라 말했다.

    “괘, 괘, 괜찮아요?”

    굉장한 소리가 들린 걸 보면 꼬리뼈가 몹시 아플 것 같았다. 아키드는 내 등을 붙든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위험하잖아.”

    하마터면 계단을 구를 뻔해서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붙든 채 가만히 숨을 골랐다.

    만약 그가 붙잡아 주지 않았으면 정말로 위험했기에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그의 가슴팍을 붙든 채 나직이 읊조리니 그가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품에 더더욱 끌어안았다.

    달리기를 한 후라 아키드의 심장이 무척이나 빨리 뛰었다. 나는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숨죽였다.

    도망친 것도 모자라 넘어지는 사고까지 저지르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민망함에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키드가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지분거렸다.

    얼마나 그렇게 안겨 있었을까. 나는 아키드가 나를 도무지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아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어, 아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놔주면 또 도망갈 거잖습니까?”

    “도망간 거 아니…….”

    “도망간 거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게 도망이니까.”

    아키드의 단호한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앙다물었다.

    그간 내가 은근히 피해 다닌 것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대로 품에 가둬 놓고 살고 싶네요.”

    그건 내 꿈인데.

    나는 아키드의 도발에 볼을 발그레 물들일 뿐이었다. 입장 바꿔 생각하니 내가 아키드였어도 서운했을 것 같았다.

    “미안해요, 피해서.”

    “알면 됐습니다.”

    그가 내 뺨을 매만지며 피식 미소 지었다. 이렇게 쉽게 용서해 주니까 내가 자꾸 버릇이 나빠지는 거다.

    아키드의 유순한 반응에 양심이 콕콕, 찔렸다. 얼마든지 기다려 준다는 그인데 나 혼자 초조해하는 꼴이 우스웠다.

    나는 애써 조급함을 감춘 채 조심스레 물었다.

    “있잖아요, 요즘도 그 꿈꿔요?”

    “예?”

    “이나라는 여자가 나오는 꿈이요.”

    “아아. 네, 뭐. 그렇죠.”

    아키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미묘한 눈빛을 보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였으나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했다.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내내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한 말이었다.

    “아키 눈에는 그 여자가 어때 보이던가요?”

    “글쎄요.”

    아키드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가볍게 대답했다.

    “참 외로운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

    “아마 저도 로네를 만나지 않았다면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했고요.”

    솔직한 답변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판단이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사무치게 외로운 사람이었으니까.

    “저도 아키를 만난 덕에 외롭지 않아졌어요.”

    “그 말은 꼭 이전에는 외로웠다는 말로 들립니다.”

    아키드의 예리한 질문에 나는 쓰게 미소 지었다. 진짜 로에나는 외로움 하나 없이 자랐을 텐데, 나는 아니니까.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부부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뜻밖의 질문에 아키드의 눈이 얕게 흔들렸다. 나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 말을 덧붙였다.

    “별다른 의미는 없고, 그냥 우리가 만약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싶어서요.”

    만약 내가 지구에서 아키드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이렇게 남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느낌 없이 더욱 솔직해질 수 있었을까.

    어쩌면 빙의하지 않은 나는 여전히 책 속 아키드만을 덕질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아키드의 다정다감한 부분들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겠지.

    물론 내가 전생에 그를 덕질한 덕에 그를 이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아키드는 마음을 꼭꼭 숨기기 바쁜 아이라, 모르고 보면 오해하기 쉬운 행동이 잦았으니까.

    그를 잘 아는 내가 로에나가 되어 다행이다.

    그 덕에 아키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었고, 그의 이면을 더욱 깊이 알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그때 아키드가 질문에 대답하며 내 상념을 깨뜨렸다.

    “아마 그때도 전 당신을 사랑하겠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