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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44)화 (144/177)
  • #144.

    ‘부디 쉐리가 원작처럼만이라도 행동해 주면 좋겠는데.’

    나는 사전에 쉐리에게 제이드가 은신한 곳을 알려 준 상태였다.

    혹시 그가 도망치더라도 위치를 찾아낼 수 있도록 대비해 둔 상황.

    아무리 은신에 자신하는 제이드라도 쉽사리 쉐리의 손아귀를 벗어나진 못할 터였다.

    단순한 교란도 타이밍이 맞으면 효과적인 공격이 될 수 있다.

    나탈리 후작을 대신해 뭍 위에서 발로 뛰는 제이드였다.

    그런 자의 발목을 붙들어 시간을 지연시키면 분명 카타콤에서도 정찰대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를 노릴 생각이었다.

    ‘쉐리가 은근히 미저리 같은 구석이 있거든.’

    나는 원작 속 쉐리를 떠올리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자고로 쉐리는 적일 때는 무척 짜증 나고 열 받지만 아군일 때는 통쾌한 구석이 있었다.

    아키드를 괴롭히던 솜씨를 제이드에게 펼쳐 준다면 제이드도 섣불리 일을 행하기 어려우리라.

    저쪽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훼방을 놓고 이쪽에 유리하게 만드는 건 자신 있었다.

    ‘내가 쉐리를 돕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걸?’

    애초에 쉐리는 내 비밀 병기였다. 나와 관련 없어 보이도록 차명 상단으로 그녀를 후원했으니까.

    이래 봬도 허술하게 일 처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캐서린과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럼 제례 때 보자, 메이벨.”

    “네. 그때 봬요.”

    메이벨이 여유롭게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나는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캐서린의 손목부터 확인했다. 일전에 내가 준 팔찌를 끼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그사이 메이벨이 뭔 짓을 저지르진 않은 모양이었다. 팔찌의 상태가 그대로였으니까.

    하긴 아무리 악녀라 해도 대놓고 캐서린을 죽이려 하긴 힘들 터였다.

    괜스레 안도하던 그때, 돌연 프로디움에서 캐서린이 티미를 도와주던 게 생각이 났다.

    ‘아, 그럼 그때 캐서린이 빛 속성 마법을 사용했던 거구나.’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팔찌가 있어 캐서린이 무사했다 해도 티미가 정화된 건 기이한 일이었으니까.

    ‘무의식중에 힘을 사용했나 보네.’

    그렇다는 건 캐서린이 여전히 빛 속성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긴 무리하게 금술을 쓴 건 악녀이지 눈앞의 캐서린이 아니었다.

    아마도 제대로 힘을 자각하려면 그녀가 전생을 완전히 기억해야 할 터.

    나는 그러려면 캐서린이 제 꿈의 허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캐서린, 혹시 요즘도 꿈꿔?”

    “아니. 요즘은 괜찮은 거 같아. 내가 너무 걱정했나 봐.”

    “만약에 나중에 또 꿈을 꾸게 되면 말이야. 제대로 들여다봐 봐. 어쩌면 네가 생각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캐서린으로 살아온 세월이 크다 보니 메이벨의 시점으로 꿈을 보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꿈에서의 공통점을 그녀도 알아내리라 믿었다.

    캐서린이 눈을 깜빡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가.”

    “아, 그리고…….”

    나는 일기장 더미와 함께 레티큘에서 안젤리카에게 받은 구슬을 꺼내었다.

    구슬은 처음 받았을 때와 달리 살짝 금이 가 있었다. 내가 납치당하기 전까지 멀쩡했던 걸 생각하면 그 이후에 금이 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때 내 손목의 상처를 회복시킨 게 이 구슬이 아닐까 싶었다.

    단시간에 회복될 리 없는 상처가 씻은 듯이 나은 건 빛 속성의 원상복구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으니까.

    물론 그것마저도 부정확하긴 하지만, 확실한 건 이 구슬의 주인이 눈앞의 캐서린이라는 것이었다.

    캐서린에게 구슬을 돌려주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캐서린이 다이어리를 받으며 말했다. 함께 준 구슬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아, 벌써 다 읽었구나.”

    “캐시, 혹시 이게 뭔지 알아?”

    “음? 글쎄.”

    캐서린이 구슬을 요모조모 살피며 말을 이었다.

    “원석인가? 빛깔이 좀 특이한 거 같기도 하고.”

    “보면 뭐 기억나는 건 없어?”

    “으음, 글쎄에.”

    캐서린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에 조금 맥이 빠졌다.

    구슬을 보면 뭔가 기억을 해낼까 싶었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는 탓이었다. 나는 망설이다 새 주머니에 구슬을 넣어 그녀에게 건넸다.

    어쨌든 주인에게 돌아가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면서.

    “당분간 이 구슬을 좀 맡아 줄래? 어엄청 중요한 물건인데,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어. 이것도 꼭꼭 네가 가지고 있어야 해.”

    * * *

    한편 쉐리는 로에나의 기대대로 착실히 진상 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이드가 숨어 있는 신전에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 그 행동이 몹시도 경악스러워 사제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담당 사제가 성기사들을 부르러 간 사이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추기경과 사제로 위장한 제이드가 쉐리를 발견하고 기함했다.

    쉐리가 기도실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탓이었다. 물론 그들이 지나갈 줄 알고 일부러 난동을 부린 입장에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여어, 한 점 하시겠소?”

    쉐리의 태연한 권유에 추기경이 분기탱천했다.

    “신성한 기도실에서 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입니까?”

    쉐리는 추기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제이드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기도를 하는데 배가 너어무 고프잖아. 근데 기도는 마저 해야겠으니 어쩌겠어. 여기서 먹으면서 하면 딱이지 않아?”

    쉐리는 무척 기발한 생각이라는 듯이 히죽 웃었다. 그게 꼭 상대를 놀리는 것 같았다.

    제이드가 뒤늦게 쉐리를 알아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무신론자인 그녀가 신전에 와서 기도를 드리는지는 모르겠다만 제 정체가 발각되면 곤란했다.

    제이드가 고민하는 사이 추기경이 나섰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당장 나가시오!”

    뒤이어 그가 얼굴이 벌게진 채 쉐리를 끌어내려 했다.

    그 순간 쉐리의 곁에 대기하던 용병들이 그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며 나섰다.

    “어디 감히 누님에게 손을 대려 하나?”

    “저리 안 꺼져? 앙?”

    “어억. 포, 폭력은 나쁜 것이오! 이, 이보게, 성기사를 불러오게!”

    추기경이 용병들에 밀려 엉덩방아를 찧은 채 제이드에게 소리쳤다. 그가 기회다 싶어 나가려 하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파공음에 제이드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방금 지나가려던 기둥에 단검이 박혀 있었다.

    제이드와 같은 노련한 암살자가 아니었다면 피하기 어려웠을, 명백한 살인 의도를 지닌 행동.

    “정말 답이 없는 분이시군요.”

    제이드는 기둥에 꽂힌 단검을 보며 서늘히 중얼거렸다.

    반면 사람을 죽일 뻔하고도 쉐리는 태연했다. 그녀가 또 다른 단검을 휘휘 흔들며 말했다.

    “아니이, 이상하게 그쪽 면상이 너어무 밋밋해서 말이야. 아, 그래! 뺨에 흉터라도 있으면 좀 그럴듯할 것 같아서 그런 건데, 놀랐어?”

    “!!”

    제이드는 뺨의 흉터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제 뺨을 만졌다. 분명 얼굴이 다를 텐데 저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꼭 제 정체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살벌한 분위기. 제이드는 다짜고짜 살기를 내보이는 쉐리가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찾아와 저러는 이유도 모를뿐더러 저를 아는 듯한 태도가 의구심을 부추겼다.

    엎어져 있던 추기경은 이제 저 진상을 어떻게 할 도리도 없다는 듯이 신께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말세로다.”

    추기경의 말에 쉐리가 히죽 웃으며 돌연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암룡 자파르시아시여, 간곡히 기도드립니다. 쇤네가 몹시 억울하고 분하여 밤잠을 통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이드에게 천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제이드는 제 이름이 거론되자 움찔했다. 쉐리는 그런 그를 가볍게 일별하며 기도를 계속했다.

    “아니, 글쎄. 제이드 그 자식이 그간 수도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지 않습니까? 우린 개애애고생을 하며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말이죠. 그래 놓고 잠수를 탔습죠. 에잇,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이다!”

    곁에 있던 용병들이 쉐리의 마지막 말을 따라 했다. 그것도 제이드를 쳐다보면서.

    제이드는 명백한 의도가 있는 기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개고생’이라는 단어에 힘을 빡 준 것을 보면 저를 원망하는 듯했다.

    잠시 후, 쉐리는 정확히 제이드를 쳐다보며 기도를 마쳤다.

    “부디, 부우우우디. 제가 그 자식을 찾아 찢어 죽일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미사도 열심히 다니고, 회개도 하겠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곁에 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호응까지 하자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추기경은 사람을 죽이게 해 달라며 비는 쉐리의 기도에 게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쉐리는 고기 판을 그대로 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제이드를 스쳐 지나가며 경고했다.

    “배 안 뚫리게 조심해라, 제이드.”

    “……언제부터 알았지?”

    제이드가 떨떠름하게 질문하자 쉐리가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알았다, 이 개자식아.”

    쉐리의 원색적인 욕설에 제이드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이곳에 온 목적이 저였던 모양이었다. 제이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지금 뚫고 가지 그래? 내가 다음에 어디 있을 줄 알고.”

    “어디 한번 실컷 도망쳐 봐. 난 끝까지 찾아가서 꼭 네놈 배때기에 구멍을 뚫어 버릴 테니까.”

    히죽 웃은 쉐리가 기둥에 박힌 단검을 빼 주머니에 넣곤 동료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제이드는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 은신처를 들켰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쉐리는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번번이 제이드의 위치를 찾아내 진상 짓을 계속했다.

    그는 어떻게 그녀가 제 위치를 알아내나 못내 궁금해했으나 끝내 그 내막을 알 수 없었다.

    그야 쉐리의 뒤에는 에이프릴 쌍둥이들이 조력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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