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42)화 (142/177)

#142.

―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네 말대로 그 애가 에셀가의 여식이었다면 말이야.

― 에셀 가문의 불은 단순히 소생만을 의미하지 않아. 그들의 상징물인 불사조는 죽음과 동시에 생명이 재탄생되는 존재이니까.

― 아마도 그 애는 불 속성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거야. 그 힘을 담보로 금기를 두 개나 어겼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메이벨이 불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각성기조차 겪지 않았던 게 생각나니 아귀가 맞았다.

‘금기를 두 개씩이나 어긴 탓에 각성기를 겪을 힘 자체를 잃어버린 거였구나.’

나야 원작을 통해 그녀가 별의 루이스라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각성기가 없는 걸 당연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가 진짜 메이벨이 아니었다면, 각성기가 없는 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메이벨이 에셀가의 기본 매듭법을 알고 있었잖아.”

뒤늦게 간과했던 사실까지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캐서린이 그 매듭은 에셀 가문만이 아는 비법이라고 했다.

당시엔 메이벨이 흑마법사와 내통하는 줄 몰랐기에 그저 꺼림칙해하기만 했던 일이었는데.

이제 보니 캐서린 본인이라서 그 매듭법을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령들이 재잘거렸다.

― 시전자를 알아냈으니 그 애가 섣불리 돌아다니도록 하는 건 위험해.

― 금기를 두 개씩이나 어겨서 이전의 정화만으로는 부족했을 거야. 어쩌면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몰라.

“손쓸 수 없는 상태라니? 그럼 정화가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 아니. 그것보다는…….

정령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어쩌면 그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켜야 할지도 몰라. 대책 없이 죽였다간 오히려 혼란이 가중될 거야.

* * *

한편 로에나에게서 메이벨과 엠버 가문 관련 소식을 접한 데미안과 엘레나는 예정보다 수도행 일정을 당기기로 했다.

며느리가 알아낸 사안이 워낙 시급한 것은 물론이요, 알고 보니 두 사람의 과거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는 탓이었다.

특히 ‘엠버의 난’이 실은 나탈리 후작의 계략이자 흑마법사들 간의 내부 분열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엘레나와 데미안은 표정 관리를 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엘레나의 어깨에 흉터로 남아 있는 그날의 기억이 그들을 동요하게 한 탓이었다.

물론 오래전에 종결된 일인 데다 증거까지 모두 조작된 마당이라 경위를 밝히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아무리 엠버 가문이 모함을 받았다 해도 그들이 흑마법사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사특한 힘을 숨긴 채 황실에 충성하는 척 살아온 자들에게 죄가 없다고 볼 순 없었다.

수도로 가기 하루 전, 엘레나는 잠이 오지 않아 직접 차를 내리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시녀를 시키기도 뭐해 직접 움직인 것이다.

차 도구를 챙기고 돌아가던 중 저 멀리 연무장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이 시간에 누가 훈련을 하나 싶은 마음에 엘레나는 그곳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으니 가볍게 옮긴 걸음이었다.

그리고 막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그곳엔 데미안이 있었다.

그는 엘레나가 온 줄도 모른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마법은 쓰지 않는 게 의아했다.

땀이 나는 게 싫다며 늘 마법으로 요령만 피우던 그였으니까.

해서 엘레나는 그가 몹시 번민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이 많아지고 화가 날 때면 저렇듯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엘레나가 연무장 한편에 차 도구를 내려놓은 채 데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

“기운이 넘치나 봐. 야밤에 검을 휘두르는 걸 보니.”

“그러는 부인께서도 잠이 오지 않나 보군요.”

데미안이 검을 검집에 넣은 채 타월로 흐르는 땀을 닦아 내었다. 꽤 오래 그러고 있었는지 숨이 제법 거칠었다.

엘레나가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따뜻한 차라도 드시겠어요?”

“더워 죽겠는데 따뜻한 걸 권하다니요. 저를 괴롭히는 데엔 정말이지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데미안이 찻잔을 거부하며 미리 가져다 둔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긴 잔뜩 땀을 뺀 직후에 따뜻한 차를 마시면 가뜩이나 열 오른 몸에 열기가 확 몰릴지도 몰랐다.

엘레나는 건넸던 찻잔을 제 입가에 가져가 호로록 마셨다.

은은한 로즈 향이 타는 듯한 속을 잠잠하게 해 주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데미안이 말했다.

“안 마시겠다곤 안 했는데.”

“찻잔이 하나뿐이라.”

엘레나가 눈을 깜박이며 마실 테냐고 찻잔을 내밀었다. 같은 잔을 써도 상관없다는 태도에 데미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엘레나는 결혼 전에도 늘 그랬다. 제 잔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면서도 그 의미를 스스로도 깊게 생각하지 않아 상대만 안달 나게 하는.

데미안이 찻잔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진짜 사람 속도 모르고.

엘레나는 결혼 전이나 후나 저를 너무 격의 없이 대했다.

저에게 호되게 당하기까지 했으면서. 그 탓에 한동안 저를 보면 무서워 벌벌 떨었으면서.

그 모든 과거가 없다는 양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해 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늘 답답했다. 차라리 시원하게 화를 내주었으면 할 정도로.

해서 그는 일부러 그녀를 화가 나게 해서 미움받는 길을 선택했었다.

다시는 그때처럼 바보같이 기대하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 결과가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더더욱.

그는 악역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데미안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 그 사건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각오와 달리 깊은 내면에선 엘레나에게 진짜로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약한 제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어찌 된 일인지 로에나에게 들켜 버린 것 같고.

‘언제까지 어머님께 어리광을 부리실 생각이세요? 그러다 정말로 미움받으실지도 몰라요.’

‘후계자가 생겼으니 이제 더는 거짓 애인 놀이도 하실 필요 없으시면서. 자꾸 삐뚤게 굴지 마세요.’

후계자까지 언급하던 걸 보면 로에나도 엘레나의 비밀을 아는 눈치였다.

‘엘레나가 말해 줬을까?’

원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그녀이지만 로에나에게는 유독 약한 대공비였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정보를 흘려 눈치 빠른 로에나가 알아채게 했을지도 몰랐다.

데미안이 찻잔을 노려보기만 하고 마시지 않자 엘레나가 다시금 물었다.

“눈으로 마시려는 건 아니겠죠? 안 마실 거면 됐…….”

엘레나가 찻잔에 도로 입술을 가져다 댄 그때였다.

데미안이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등을 감싸며 찻잔에 입술을 대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엘레나의 붉은 눈동자가 얕게 흔들렸다. 데미안이 그대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러나며 말했다.

“설마 눈으로 마시려고요.”

“…….”

“맛있네요.”

데미안이 씨익 웃으며 하는 말에 엘레나가 찻잔을 요란하게 내려놓으며 항의했다.

“애인에게 하던 버릇대로 날 대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제가 애인에게 이렇게 하는 걸 보기라도 하셨습니까?”

“그야 안 봐도 뻔하…….”

“그럼 부인께선 왜 제게 본인 잔을 자꾸 권하시는 겁니까?”

데미안의 역질문에 엘레나가 입술을 헤벌렸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인 탓이었다.

‘내가 왜 그랬지?’

엘레나가 인상을 찌푸린 채 골똘했다. 결혼 전에는 데미안이 얼굴이 벌게진 채 허둥대는 게 재밌어서 놀리려고 그랬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변해 버린 그가 괘씸해서 부러 괴롭힌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진짜 변한 게 맞는지 확인하려 일부러 도발했던 것도 같았다.

데미안은 저가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피하기 바빴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저 찻잔이 하나뿐이라 그랬던 거였다. 의식하기도 전에 한 행동이란 뜻이었다.

엘레나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뜻 없어요. 찻잔이 하나뿐이니까.”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척 내려 둔 찻잔을 도로 입에 가져가자 데미안이 유쾌하게 말했다.

“거기 제가 마신 곳인데.”

“아.”

“이젠 제 자리도 넘보시는 겁니까?”

짓궂은 농담에 엘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다른 곳으로 마시면 괜히 의식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그때 그가 찻잔을 가져가며 엘레나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제 입술을 도로 꾹 눌렀다. 청회색 눈동자는 엘레나에게 고정된 채였다.

엘레나는 이상하게 그 눈빛을 피할 수 없어 굳어 버렸다.

잠시 후, 목이 말랐는지 차를 모조리 마신 그가 그녀에게 찻잔을 쥐여 주며 말했다.

“이러면 다시 제 자리가 되겠군요.”

엘레나는 온기가 남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방금 굉장한 분위기가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의미를 알기 어려웠다.

엘레나가 데미안의 소매를 충동적으로 붙들며 물었다.

“……갑자기 왜 이래요?”

“무얼 말입니까?”

“방금 그거 말이에요. 왜 눈을 그렇게 떠요?”

엘레나의 질문에 데미안이 황당하다는 듯이 반응했다.

“이젠 제가 눈을 뜨는 방식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는 겁니까? 눈이라도 감고 다닐까요?”

이죽거리는 음성은 평소보다도 부드러웠다.

“아니, 난…….”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쏘아붙인 것 같아 입을 달싹였다.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싶어진 탓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엘레나의 모습을 본 데미안이 씨익 웃었다. 그러곤 엘레나를 일으켜 제 팔에 그녀의 손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모셔다드리죠.”

“어차피 가는 길이 같잖아요.”

엘레나가 에스코트를 받아들이면서도 데미안을 기민하게 살폈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또 뭔 사고를 친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