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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37)화 (137/177)
  • #137.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우물쭈물하자 아키드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기다리는 건 자신 있어요.”

    아키드가 씨익 미소 짓곤 뺨을 한차례 간질이며 손을 물렸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 자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실은 말하고 싶은 쪽에 더 가까웠다. 누군가 내 상황을 이해해 주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내가 로에나 하델루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상대가 실망할까 봐서 겁이 났다.

    스스로도 로에나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실은 나도 알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진짜 로에나가 될 수 없다는 걸.

    ‘이래선 전생이랑 다를 바 없잖아.’

    망설이기만 하고 솔직해지지 않으면 결국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지도 몰랐다.

    그때처럼 양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적자인 동생을 부러워하는 입양아의 삶은 더 이상 싫었다.

    ‘그래. 말하자, 아키라면 분명 이해해 줄 거야.’

    “실은…….”

    겨우 용기를 내 고백하려는 찰나였다. 아키드가 책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실은 웬 여자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말에 말문이 막힌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키드가 어떤 여자의 꿈을 꾼다는 말에 설마 메이벨인가 싶어서였다.

    캐서린도 원작의 꿈을 꾸었으니 아키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추스르며 평정을 유지하는데 그가 뒤늦게 시선을 맞추며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저도 처음 보는 여자입니다. 게다가 이국적인 장소와 이목구비라서…….”

    아키드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내게 성큼 다가왔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 오해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가 거듭 해명했다.

    “정말입니다. 저한테는 로에나뿐입니다.”

    “알아요. 오해 안 해요.”

    처음 보는 얼굴이라면 메이벨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 철렁했냐는 듯이 차분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키드는 내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언어도 문자도, 다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습니다.”

    언문까지 다르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아키드는 과거 로르크 남작의 횡포 덕에 웬만한 인근 나라의 언어는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건 없던가요? 여자가 주로 뭘 했는데요?”

    평정을 찾은 난 적극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키드가 가만히 꿈속 내용을 되짚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책을 읽었습니다. 그것도 같은 책을 수십 번, 수백 번을 보는 듯했어요.”

    그 여자도 나 못지않게 굉장한 덕후인 모양이었다.

    한 가지 책을 여러 번 읽는다는 건 덕심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가볍게 호응했다.

    “무슨 책인지는 모르겠네요. 처음 보는 문자였으니까.”

    아키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차분히 그의 꿈 이야기를 듣는 와중 어딘지 위화감을 느꼈다. 굉장히 내 예전 생활 패턴과 비슷해서였다.

    학교에 가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책을 읽기를 반복하던 삶. 그리고 갑자기 생긴 동생으로 가족들과 소원해진 것까지.

    그때 아키드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이나’라고 부른 것도 같았습니다. 간혹 가족처럼 보이는 이들이 나왔거든요.”

    “네? 뭐요?”

    나는 불쑥 튀어나온 내 이름에 깜짝 놀라 아키드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의 입에서 전생의 내 이름이 거론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골똘하느라 내 동요를 알아채지 못한 채 대답했다.

    “확실히 ‘이나’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은 거의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 단어가 나올 때면 여자가 반응했습니다.”

    “…….”

    “그리고 상대는 저를 아는 눈치였습니다. 간혹 제 이름을 부르며 무어라 말하곤 했거든요.”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가 꾼 꿈이 다름 아닌 내 전생의 모습이었기에 더더욱.

    아마도 내가 책을 읽으며 아키드를 덕질하던 걸 꿈으로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 이름이 거론되는 걸 눈치챈 것 같고.

    뭔가 은밀한 사생활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혼란이 가득했다.

    ‘갑자기 아키드가 왜 내 전생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거지? 캐서린은 왜 원작 속 내용을 꿈꾸기 시작한 거고?’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캐서린과 아키드의 꿈은 꿈이라는 공통점 말고는 연결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각성 직후부터 꿈을 꾸게 된 아키드와 달리 캐서린은 어릴 적부터 꿈을 꾸었으니까.

    게다가 내 꿈 역시도 그들 꿈에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아.”

    숨이 턱 막혔다. 고백하기도 전에 내 정체를 발각당한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는 용기가 만발했던 것 같은데.

    타인에게서, 그것도 아키드에게서 내 진짜 이름이 들리는 순간 하나도 남김없이 쪼그라들어 버렸다.

    “로네?”

    아키드가 뒤늦게 내 안색을 살피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아키드를 황망히 쳐다보았다.

    입 밖으로 ‘사실 그게 저예요’라는 말이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용기보다도 두려움이 더 커졌기에, 결국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은 삼켜지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을 했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놀랐나 보네요.”

    아키드가 내 차가워진 손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느새 손끝이 차갑다 못해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때 말한 노파는 해몽가였습니다. 전하께서 소개해 주어 꿈에 대한 해석을 부탁했고요.”

    “그랬군요.”

    나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그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그 해몽가를 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연락해 두겠습니다. 마침 혹시 몰라 동행하고 있기도 하니.”

    “고마워요.”

    “자료는 다 확인했습니까?”

    “아, 네……. 제이드랑은 관련이 없어 보이더라고요. 가계도에 이름도, 초상화도 없고요.”

    “확실히 그렇군요.”

    아키드가 책을 살피며 가볍게 긍정했다.

    잠시 후, 책장에 책을 도로 꽂은 아키드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게 둘러 주며 어깨를 감쌌다.

    아마도 손끝이 차게 식은 내가 추위를 탄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죠.”

    * * *

    주말 오후, 캐서린의 초대로 에셀 성에 도착하자 안젤리카가 반갑게 맞았다.

    “로에나 님!”

    방긋 웃으며 내게 안겨 오는 안젤리카는 이전에 보았을 적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앙상해서 늘 마음이 쓰였던 몸에 살도 붙고 늘 고개를 땅에 처박고 다니던 자세도 제법 바르게 교정되었다.

    이제는 구태여 눈을 맞추려고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예쁜 푸른 눈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잘 지냈어, 안젤리카?”

    “네, 네! 자, 잘 지냈어요! 이게 다 로, 로에나 님 덕분이에요.”

    “잘 지냈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캐서린이랑 애프론 부인은?”

    “어, 어머니랑 캐, 캐시 언니는 자, 잠깐 얘기 중이에요.”

    “데뷔탕트 일로 의논 중인가 보네.”

    내 중얼거림에 안젤리카가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여전히 말을 더듬기는 했지만 의사 표현이 전보다 자연스러워져 보기 좋았다.

    “머, 먼저 차를 마, 마시고 있으라 했어요.”

    안젤리카가 씩씩하게 말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테이블에 모여 앉으니 삼단 트레이에 먹기 좋게 놓인 디저트와 적당한 온도로 데운 홍차가 놓여 있었다.

    한창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 메이벨의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아참, 메, 메이벨이 온다는 소식 드, 들으셨어요? 이, 이번 제례 때 마, 맞춰서 온다고 하, 하던데.”

    “응. 들었어. 요즘 메이벨 이야기로 떠들썩하잖아.”

    내가 대륙을 모조리 정화한 덕에 메이벨은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펼쳐지니 추앙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메이벨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찝찝하겠지.’

    일부러 그녀가 가는 길목마다 미리 수를 쓴 터라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터였다.

    ‘아마도 처음엔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생각이 많았겠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내가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다 뭔가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나 의심했을 테고.’

    일부러 메이벨을 교란하는 작전이었다. 내가 정령사라는 걸 밝힐 수 없는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리고 내 계획대로 메이벨은 내가 한 일을 저가 한 것처럼 꾸며 영웅 행세를 하고 있었다.

    기적의 성녀로 불리며 수도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제례 때 교황을 대신해 봉화까지 올릴 예정이라고 하니, 그녀의 입지가 얼마나 대단해진 건지는 말해 봤자 입만 아플 지경이다.

    하지만 그렇게 호의호식하는 것도 수도에 들어오기 전까지였다.

    나는 그녀의 입성 시기에 맞춰 준비해 둔 선물을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쉐리와 함께 계획한 작품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저자에 웬 노래가 유행한다던데. 들은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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