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캐서린이 숨을 거칠게 고르며 손을 합장해 미안함을 표시했다. 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
“미안해. 중간에 교수님께 붙잡혀서 이야길 좀 하느라고.”
“에이, 교수님께서 붙잡으면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캐시는 우등생인가 보다. 교수님께 호출도 되고.”
“딱히 우등생이라기보다는 편입생의 파트너를 부탁받았거든. 편입생은 파트너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여러모로 곤란하니까.”
신임하는 학생이 아니면 애초에 그런 부탁도 하지 않을 텐데.
내가 그게 그거 아닌가, 하고 쳐다보자 캐서린이 어색하게 말했다.
“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았는데 학생부로서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캐서린한테 내키지 않는 일도 있어?”
워낙 활달한 그녀가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게 신기해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우물쭈물해하며 말을 이었다.
“실은 그 편입생이 메이벨이거든.”
“……!”
“이번에 수도로 입성한다는 소식은 들었지? 아마 바로 아카데미로 편입시킬 모양인가 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언급되어 말문이 막혔다.
편입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캐서린과 이런 식으로 엮일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캐서린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꿈 때문이라도 메이벨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거든. 물론 메이벨과 친한 네가 들으면 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기분 나쁠 것도 없어. 나도 메이벨이랑 그리 살가운 사이도 아니라서.”
애초에 서로 경계하며 지낸 세월이 길었다.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된 캐서린과는 전혀 다른 친밀감이었다.
‘그나저나 캐서린과 메이벨의 조합이라니.’
원작에선 메이벨이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크게 애를 먹었었다.
애초에 평민 출신 편입생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 함께해 주려는 학생이 없던 탓이었다.
그러던 중 졸업반이던 제로니스가 파트너를 대리해 주고 마젠타에까지 입적시켜 큰 화제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나는 원작과는 다른 의미로 파란이 불어 버린 상황에 난감해졌다.
섣불리 캐서린에게 메이벨을 경계하라고 말하기엔 그녀를 향한 세간의 평가가 호의적인 탓이었다.
그렇다고 주의를 주지 말자니 메이벨이란 존재 자체가 불안했다.
이미 교수님께 하겠다고 한 상황이라 번복하라고 하기에도 좀 그랬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캐서린이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차곡차곡 꺼내었다.
“여기 전에 말했던 일기장들.”
“아, 으응.”
“꿈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페이지만 접어 두었으니 확인해 보면 돼. 그리고 다른 곳은…….”
“걱정하지 마. 다른 곳은 절대 읽지 않을게.”
애초에 내 목적은 꿈이 시작된 날짜와 꿈의 내용, 횟수 등이었다.
캐서린의 개인적인 내용을 훔쳐볼 생각은 없었다. 그건 아버님이나 하는 못된 짓이니까.
캐서린은 조금 안심이라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편할 때 돌려줘. 마침 페이지를 다 채워서 새 다이어리에 이어 쓰는 중이었거든.”
“응. 캐시도 혹시 그 이후에 꾸는 꿈이 있으면 말해 줘.”
“그럴게.”
캐서린이 빙그레 미소 짓더니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나저나 샤프롱은 구했어?”
“아, 응.”
데뷔탕트로 화제가 넘어가자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샤프롱은 사교장에 첫발을 디딜 때 곁에서 도움을 주는 귀부인을 뜻했다.
성공적인 데뷔탕트를 위해선 수도의 노련한 귀부인을 샤프롱으로 맞이하는 게 중요했다.
가족은 샤프롱으로 둘 수 없기에 엘레나에게도 부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이미 정했구나. 누군지 물어봐도 돼?”
“레니아 부인께 부탁드렸어.”
레니아 후작 부인은 사교계의 마당발로 과거 정기 회의 연회에서 안면을 튼 사이였다.
그 후로도 종종 연회에 참석할 때면 말을 걸며 관심을 보이곤 했다.
아무래도 대공가 분위기가 바뀐 게 나 때문이라는 걸 알아챈 느낌이었다.
마침 그녀는 샤프롱으로서 훌륭한 귀부인이었다. 마당발이라 사교장에 올 귀족들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끄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마침 엘레나도 탁월한 선택이라며 격려해 준 덕에 레니아 후작 부인을 샤프롱으로 맞을 수 있었다.
“역시 그분이랑 하는구나. 사실 거절당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어.”
“캐시도 그분이랑 하려 했어?”
당연히 공작가 중에서 선택할 줄 알았다. 원작에서 캐서린은 황녀이자 하델루스의 안주인인 엘레나를 샤프롱으로 맞이하고 싶어 했으니까.
물론 엘레나는 캐서린의 제안을 거절하고 메이벨의 샤프롱이 되어 주었었다. 아키드가 엘레나가 혹할 만한 제안을 한 덕이었다.
그 탓에 캐서린은 뒤늦게 다른 이를 부랴부랴 찾느라 제대로 된 샤프롱을 구하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원작 속 캐서린만 분하던 데뷔탕트였지.
캐서린이 메이벨을 미워한 데에는 제로니스 말고도 너무 많은 게 엮여 있었다.
“응. 네가 좀 더 빨랐던 거 같지만.”
“그럼 아직 샤프롱을 구하지 못한 거야?”
내로라하는 귀부인들은 이미 다른 이의 샤프롱이 되었을 테니 지금부터 구하는 건 늦은 감이 있었다.
내 염려 섞인 질문에 캐서린이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냐. 구했어.”
“다행이다. 늦게 구해서 어려웠을 텐데.”
안도의 한숨을 내뱉자 캐서린이 말했다.
“운이 좋았어. 마침 애프론 백작 부인께서 이곳에 와 계시거든. 아버지 말로는 그분이 애프론령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뛰어난 샤프롱으로 유명하셨대. 이번에 딸 교육 문제로 도로 수도로 오셨다나 봐.”
“그렇구나, 애프론 백작 부인이 샤프롱이 되어 주셨…… 뭐? 애프론?”
나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안젤리카의 가족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때 헤어진 후 쭉 만나지 못했던 터라 안젤리카가 수도에 와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말을 얼버무리자 캐서린이 말했다.
“안젤리카와도 이미 만나서 얘기도 나눴어. 네가 브라운 영애를 무찌른 이야기는 통쾌하고 재밌더라.”
벌써 안젤리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캐서린이 해맑게 웃으며 후일담을 이야기했다.
“안젤리카는 나보다 어린데도 무척 야무지더라. 귀여운 건 덤이었고. 여동생이 있었다면 안젤리카 같지 않았을까?”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응. 내년에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해서 많이 도와주려고. 애프론 백작 부인께 도움받은 일도 있으니까 열심히.”
캐서린이 주먹까지 불끈 쥐며 씨익 미소 지었다.
나는 잊었던 안젤리카를 떠올리자 그녀가 메이벨에게 전해 달라던 구슬이 생각났다. 실은 주머니에 넣어 놓고 까먹었었다.
“안젤리카는 잘 지내?”
“응. 네가 수도에 와 있다고 하니까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
“나야 언제든 환영이지. 마침 안젤리카의 친구도 내 시종으로 동행했거든.”
“아하, 티미를 말하는 거지?”
“뭐야. 벌써 거기까지 다 얘기 나눈 거야?”
“물론이지. 티미가 안젤리카의 빵을 들고 튄 일화까지 모조리 들었는걸.”
“그건 나도 모르는 이야기인데. 대단한데?”
나는 감탄조로 대꾸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역시 캐서린의 친화력은 어마어마하구나, 새삼 체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캐서린이 내친김에 약속까지 잡으려는지 적극적으로 이야기했다.
“괜찮으면 이번 주말에 우리 성으로 놀러 올래? 마침 안젤리카가 애프론 백작 부인이랑 오기로 했거든.”
“좋아.”
속전속결로 약속을 잡은 후 간단한 담소를 마치고 캐서린과 작별을 나눴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 혼자가 되자마자 캐서린의 일기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맨 처음 꿈이 시작된 시기는 7년 전이었다.
[무슨 꿈을 꾼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물부터 났다. 알 수 없는 후회가 나를 덮쳐 오는 기분이었다.
죽다 살아난 직후에 꾼 꿈이라 그럴까. 괜스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고 이상하게 제로니스가 보고 싶었다.]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역시 깨자마자 제로니스가 보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다. 꿈을 꾼 이후로 제로니스를 자꾸만 의식하게 되는 건 왜일까?
마음이 답답하고 불편해서 더는 잠이 오지 않는다.]
꿈을 꾸기 시작한 캐서린은 깨어난 직후 제로니스가 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전까지 오라버니의 친구이기만 했던 제로니스를 급격히 의식하게 된 것도 다 그 꿈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주 강렬하게.
나는 캐서린의 일기장에 흠뻑 취한 채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접히지 않은 쪽에서 익숙한 단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마침 아키드가 거론된 부분이었다.
[하델루스 일가가 성에 머물게 되었다. 아버지 말대로 로에나는 좋은 사람이라 나도 친해지고 싶다.
그런데 왜 대공자의 얼굴이 낯익은 걸까. 그를 보면 자꾸만 가슴이 아프다.
꼭 오라버니를 다치게 하고 나서 마음이 안 좋았던 것처럼 미안해 죽을 것 같은 기분이다.
딱히 우린 만난 적도 없을 텐데 이상하게 전에 본 것만 같아서 신경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