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34)화 (134/177)

#134.

별장에 도착하자 아키드가 나직이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별장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그를 안심시켰다.

“아뇨,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생각이요?”

“아. 아키, 혹시 내일 어디 좀 같이 가 줄래요?”

화제를 돌릴 겸 마침 엠버의 난이 떠올라 외출을 제안하자 아키드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수도에서 가 보고 싶은 데라도 생겼습니까?”

“오늘 마젠타에서 우연히 엠버의 난에 대해 들었거든요. 마침 엠버 성이 하델루스 소유라고 해서 가 보고 싶어졌어요.”

“으음, 그곳은 그리 가 볼 만한 데가 아닐 겁니다. 지저분하기도 하고 거의 방치되어 있어서 안전 문제도 커요.”

“사실은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확인이요?”

아키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딱히 그에게 숨길 일이 아닌 것 같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납치됐을 때, 흑마법사들이 엠버 가문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분명 전 수장의 가문이라고 했어요.”

“엠버 가문이 흑마법사 집단과 관련이 있었다는 뜻입니까?”

“그들 말에 의하면요. 게다가 제이드가 엠버 가문 가주와 닮았다는 말도 언뜻 언급했던 게 자꾸 마음에 걸려요.”

만약 제이드가 진짜로 엠버 가문의 후계자라면, 나탈리 후작이 그를 주운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마법사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으니 뭔가 느껴진 게 있어 양자로 들였을 확률이 높으니까.

물론 그녀가 그의 정체를 알고 데리고 갔는지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그의 몸에 흑마법사의 피가 흐른다는 건 알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

나탈리 후작이 카타콤으로 꼭꼭 숨은 이때, 엠버 가문을 파고들다 보면 흑마법사에 대한 단서를 찾을지도 몰랐다.

제이드가 거론되자 아키드의 얼굴이 짐짓 굳어졌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만약 일가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면 정말 그와 닮았나 확인해 볼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정말로 닮았다면…….”

“그러면 제이드는 원래부터 흑마법사였다는 뜻이겠죠.”

아키드가 나와 같은 결론을 내며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제이드가 흑마법사 집단의 전 수장인 엠버 가문의 후계자였다면 태어나자마자 흑마법사의 피를 물려받은 셈이었다.

그들은 흑마법사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피를 나누는 집단이니까.

정말 후계자가 맞는다면 제이드에게 나탈리 후작 못지않은 힘이 잠재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꼭 그것뿐만이 아니라 해도, 옛 수장이 살던 성이라면 카타콤에 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제이드가 후계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 부분에 대한 확인 또한 필요하다고 봐요.”

“그거야 그렇지만…… 막상 그 성에 가 보면 과연 뭐가 남아 있을까 싶을 겁니다. 다 쓰러져 가는 건물만 황량하게 남아 있거든요.”

“그 정도로 엉망이에요?”

“지반이 몹시 위태로워서 내부를 확인하려면 수리가 필요할 겁니다. 애초에 안전 문제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두기도 했고요.”

하긴 부숴 놓고 방치한 성이 멀쩡할 리는 없었다. 잘못하면 매몰되어 압사당할 수 있을 터.

고민에 빠진 내게 아키드가 말했다.

“일단 내부 점검을 해 두라 지시하겠습니다. 무너지기 직전인 성에 안전성 확인도 없이 로네를 보낼 수는 없어요.”

“알겠어요. 대신 그전에 엠버 가문에 대한 기록을 좀 확인해 보고 싶어요.”

“황가에 승인을 받아 보겠습니다. 반역 가문에 관한 기록은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거든요.”

“좋아요.”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아키드가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더 남아 있나, 하고 시선을 피하지 않으니 그가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뺨에 닿는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다정한 눈빛에 깃든 불안함을 느끼자 문득 갑작스럽게 시작된 각성기 때 혼비백산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뭔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던 게 생각나니 궁금해졌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걱정됐던 건가, 하고.

게다가 캐서린이 꿈 이야기를 해서일까. 그도 꿈 어쩌고 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내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아키드가 쉐리를 거론했다.

“수도에 오자마자 쉐리에게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네? 어떻게…… 설마 쉐리가 아키를 찾아왔어요?”

쉐리가 언급되자 나는 눈을 홉뜨며 물었다. 그녀가 원작에서 아키드를 괴롭히던 게 생각난 탓이었다.

애초에 쉐리를 돕는 대신 계약 조건에 아키드 앞에 스스로 나타나지 말 것을 1조항으로 걸었었다.

원작처럼 아키드의 자존감을 깎아 먹는 빌런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설마 약조를 깨고 뭔 짓을 한 건가 싶어 예민하게 반응하자 아키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제가 찾아갔습니다.”

“네? 아키가 왜?”

“로네랑 같은 이유겠죠.”

아키드가 부드러운 눈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그 말은 제이드를 찾기 위해 쉐리를 찾아갔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요? 제이드는 아키의 가장 친한 친구였잖아요.”

아키드에게 제이드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원작에서 그가 쉐리의 막무가내식 모욕을 묵묵히 감수할 정도로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존재였으니까.

원작의 그에겐 수많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 요절한 부인인 나도, 저로 인해 죽은 줄 알았던 제이드도, 거리의 친구였던 쉐리도.

그의 곁에는 전부 가시를 세우는 상대만 있었다. 유일하게 메이벨만이 가시를 뽑으려 다가갔다가 실패했지만.

그러고 보면 아키드는 메이벨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 적이 없었다. 늘 그녀 주변을 배회하며 돕기만 하고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델루스 꽃을 준 것이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그 흔한 고백조차 그는 하지 않았으니까.

만약 그가 내게 하듯이 메이벨에게 행동했다면 진즉 제로니스를 제쳤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몇몇 독자는 아키드가 메이벨을 좋아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한 거 아니냐는 댓글이 빈번하게 발견될 정도로.

물론 아키드빠인 나로서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우리 아키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아니고!

상념에 빠져 있던 사이 아키드가 한 발짝 다가와 대답했다.

“네. 친구였었죠.”

“…….”

“하지만 이제 저는 로네가 제일 중요합니다.”

깊은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쉐리를 찾아갔는지 온전히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스스로 끊어 버린 인연을 다시 찾아갈 정도로 아키드는 나를 무척 아끼는구나.

아키드에게 더는 제이드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

어느새 내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

제이드에게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진 아키드는 무척이나 멋있었다. 그리고 그를 변화시킨 게 나라는 사실에 조금 뭉클해졌다.

이전처럼 ‘아이고, 내 새끼 장하다’ 하고 칭찬부터 떠오르지 않는 건 그와 나 사이가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뜻일 터.

“나도 아키가 제일 중요해요.”

내가 그를 따라 한 걸음 다가가자 맞닿은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아키드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입가에 선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내렸다.

“듣기 좋은 말이네요.”

그 말을 끝으로 입술과 가까운 뺨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입술에 닿을 줄 알고 눈을 감았던 나는 민망함에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아키드의 여유로운 미소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가 일부러 놀린 것을 알아채서 더더욱.

“놀리지 말…… 으음.”

어쩐지 창피해져 막 타박하려던 찰나였다. 불쑥 다가온 입술이 다음 말을 삼켰다.

코끝에 청량한 향기가 훅 끼치는 것은 물론 다가선 온기에 정신마저 쏙 빠졌다.

벌어진 입술 새로 낯선 존재가 들락날락하자 몸속이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마음에도 온도가 있다면 지금이 끓는점일지도 모를 만큼 덥게 느껴졌다.

잠시 후, 입술을 떼어 낸 아키드가 말했다.

“보채지 마십시오.”

“네에…….”

무얼 보채지 말라는 건지도 모른 채 멍하니 중얼거리자 그가 나를 품에 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좋은 박자로 뛰어서 행복감에 푹 젖어 들었다.

입맞춤과는 다른 의미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행위였다. 나는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드는 것으로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기로 했다.

* * *

얼마 후, 메이벨의 활약 소식이 수도 전역에 퍼졌다.

북부를 정화한 것도 모자라 단시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진 오염을 없앤 탓이었다.

물론 그건 내가 한 일이었다. 흰둥이와 정령들이 합세해 메이벨이 한 것처럼 교묘히 탈바꿈시켰을 뿐.

노도처럼 대륙 전역에 기승을 부리던 오염이 사라지자 황실은 메이벨을 아칼리무트로 초청했다.

가장 큰 골칫거리를 해결해 준 것에 사례하기 위함이었다. 그야말로 원작대로 화려한 입성 소식이었다.

이 일로 메이벨은 아카데미 대학부 특채로 편입할 테고, 마젠타의 일원이 될 것이었다.

데뷔탕트도 무척이나 화려할 것이고.

물론 그건 원작 속 성스러운 메이벨일 때라야 가능했다.

나는 쉐리를 시켜 은밀히 초석을 깔아 두던 일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자고로 나는 내 등에 칼 꽂은 사람을 내버려 둘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이젠 혼자서 삼키고 견디는 건 이골이 났으니까. 슬슬 반격을 가할 때이기도 했다.

혼자서 복수할 걸 떠올리며 비열하게 웃는데, 때마침 기다리던 캐서린이 맞은편에 앉으며 미소 지었다.

“미안,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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