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있잖아, 캐시.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 마음에 구멍이 있대.”
“구멍?”
캐서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나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구멍을 채우려고 노력하거든.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친구로, 또는 이상향으로 말이야.”
“그런 거로 채워져?”
“글쎄. 잠시는 채워질지 몰라도 결국 구멍은 다시 생겨. 그 구멍은 외부에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럼 어디서 채우는데?”
“그건 아무도 몰라. 그 구멍은 채워졌다가 허물어졌다가를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애라서 참 복잡해. 조심하지 않으면 너무 커다래져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진 것 같지 않아질 거야.”
나는 캐서린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냥 구멍이 있는 채로 사는 거야. 더 커지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채워지면 채워지는 대로 비어 있으면 빈 채로 말이야.”
그늘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있어도 그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인생이란 건 빛나는 순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나 역시 아키드를 만나기 전만 해도 그리 빛나는 인생은 아니었다.
지금의 캐서린보다도 더 많은 구멍을 가지고 외부에서라도 채우고자 아등바등 살았으니까.
돌려받지 못하는 애정을 갈구하는 건 결국 사람을 초라하고 지치게 만들기 쉬웠다.
양부모의 무관심이, 동생에게로 쏟아진 애정이 내게는 정말 괴로운 일이 되었던 것처럼.
나는 캐서린이 느끼는 결핍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구멍을 키우는 벌레가 되곤 하니까.
“내 말은, 전하께 느끼는 네 양가적인 마음을 너무 옥죄려고 하지 말라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니까.”
“…….”
“그냥 인정하면 돼.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그러다 보면 의외로 상황과 감정이 잘 분리되더라.”
잠자코 듣고 있던 캐서린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로에나도 구멍이 있어?”
“당연하지. 너보다 더 많을걸?”
장난스럽게 반박하자 캐서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웃는 캐서린을 보며 말했다.
“너무 너 자신을 싫어하지 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멍이 비어 있어도, 채워 있어도 더는 그게 너를 우울하게 할 수 없을 거야.”
내가 거듭 위로의 말을 건네자 캐서린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사실 우울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
“응?”
“실은 아플 때마다 이상한 꿈을 꾸거든. 그동안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혀지는, 평상시엔 기억도 잘 안 나는 꿈이었는데…….”
캐서린이 나를 힐끗 쳐다보며 주저하는 빛을 띠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잠자코 기다리자 캐서린이 말했다.
“이번 꿈은 전처럼 사라지지 않고 뇌리에 박혀서 기분이 이상해.”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혼란이 나에게도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긴장한 채 되물었다.
“무슨 내용이었는데?”
“그건…….”
입술을 달싹이던 캐서린이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꿈에서 내가 자꾸만 나쁜 짓을 해. 제로를 괴롭히고 오빠를 시켜 누군가를 괴롭혀.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말에 번뜩 누군가가 떠올랐다.
요 며칠 내 머릿속을 가장 복잡하게 만들었던 원작 속 여주인공이.
나는 혹시나 싶어 떠보듯 물었다.
“……설마 그 사람이 메이벨이야?”
“어, 어떻게 알았어?”
캐서린은 내가 맞힐 줄 몰랐다는 듯이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캐서린이 꿈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데뷔탕트 때, 내가 그 애를 괴롭혀. 드레스를 망치고 손을 다치게 하는 것도 모자라 모함도 해.”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그녀가 본 꿈은 내가 알던 원작과 일치했으니까.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 그때 입고 있는 드레스가 아버지가 주문 제작한 것과 일치했을 때 너무 두려웠어. 진짜로 미래에 내가 그럴까 봐.”
“캐서린.”
“꿈을 기억하기 시작하니까 무서워졌어. 내가 꿈처럼 제로니스를 해하고, 주변에 피해만 끼칠까 봐.”
“…….”
“실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개꿈이라고 할까 봐,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거 같아서 내내 혼자만 끙끙 앓고 있었어.”
불안한 눈동자에서 그녀의 혼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게 그냥 꿈 같지가 않아. 진짜 있던 일 같은 기시감이 들었거든.”
“기시감?”
“응. 내가 진짜 그런 짓을 했던 것만 같아. 아니. 어느 날 갑자기 회까닥해서 그렇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아.”
캐서린이 팔을 쓸며 초조한 눈빛을 띠었다. 갑작스러운 기억 혼선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상태가 나와 흡사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꿈은 아니지만 특정 인물과 마주칠 때마다 몸의 기억이 흘러들어 오곤 했으니까.
‘설마 캐서린도 나처럼 실은 캐서린 본인이 아니었던 걸까?’
나와 캐서린의 차이점은 전생을 기억하냐, 하지 않느냐일 뿐이었다.
나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 이곳이 빙의된 세계라는 걸 바로 눈치챘지만 캐서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영혼이 뭔가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내가 아는 원작 속 악녀랑은 너무 다르다 싶기는 했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원작과는 다른 선량하기 그지없는 캐서린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원작의 기억이 흘러들어 온 데에는 분명 계기가 있을 것 같았다.
그 계기를 찾는 것부터가 이 모든 일의 진실에 다가가는 첫걸음일 터.
“캐시, 혹시 꿈을 처음 꾸었을 때가 언제였는지는 기억해?”
“응. 처음 꿈을 꾸었을 때부터 일기장에 적어 두기는 했어. 깨어나서도 꺼림칙했던 꿈이라.”
캐서린이 꼼꼼한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혹시 그 일기장, 내가 좀 볼 수 있을까? 뭔가 패턴이 있을지도 몰라. 당사자보다 제삼자가 보는 게 더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도 있으니까.”
“아…….”
“물론 불편하면 안 보여 줘도 돼. 강요는 아니야.”
조심스러운 내 제안에 캐서린이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했다.
“로에나는 내가 한 말을 다 믿어 주는 거야?”
“그야 믿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어째서 이제야 그녀가 기억을 인식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나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기억들을 익히게 되었으니까.
이미 기억하기 시작했다면 점점 더 자주 그러한 일이 반복될 수도 있었다.
나는 각성 직후에 꾸었던 로에나의 장례식 장면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원작에서도 본 적 없고 진짜 로에나가 경험할 리 없는 꿈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뭔가 꺼림칙하고 기시감이 드는 건 캐서린의 꿈과 같았다. 마치 그런 일이 실제 있던 것과 같은 생생함.
물론 캐서린과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원작 속 본인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거니까.
어쨌든 계기만 알게 된다면 캐서린이 병약한 이유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원작에서 아픈 적이 없으니 말이다.
잠시 후, 캐서린이 결심이 선 표정으로 말했다.
“남한테 보여 주는 게 부끄럽긴 하지만 로에나가 믿어 주니까. 다음에 만날 때 일기장을 가져올게.”
“좋아. 그럼 우선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하자. 괜히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잖아.”
몸도 안 좋은데 이상한 꿈까지 꾼다고 하면 캐서린의 말대로 미쳤다고 오해 사기 딱 좋은 탓이었다. 캐서린이 밝게 대답했다.
“그럴게. 나도 몸에 이어 정신까지 아픈 사람 취급받고 싶지는 않거든.”
“아니, 난 그런 의도가…….”
“분명 다들 미쳤다고 생각할 거야. 어쩌면 이미 미치는 중일지도 몰라.”
캐서린의 자신 없는 말에 내가 정색하며 반박했다.
“너 안 미쳤어. 내가 비밀로 하라는 건 아직 꿈이 진행 중이니까, 좀 더 명확해진 후에 말하자는 뜻이었어.”
“…….”
“넌 그냥 너 자신만 믿으면 돼. 네가 절대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설령 가족들이 알게 돼도 널 미친 사람 취급하진 않을 거야.”
조금 엄한 충고에 캐서린이 얼빠진 표정을 짓다 해맑게 웃었다.
“고마워, 로에나.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그러곤 손을 마주 꼭 쥐었다.
얼추 진정한 캐서린과 함께 유리 온실로 돌아가니 아키드가 와 있었다.
“늦었네요?”
“산책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아키드의 물음에 내가 가볍게 대꾸하며 캐서린을 쳐다보았다. 이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쳤다.
“응. 맞아.”
이후 우리는 언제 비밀 이야기를 했냐는 양 자연스럽게 모임에 녹아들었다.
물론 내 속에서는 캐서린의 꿈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진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