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32)화 (132/177)
  • #132.

    “아하하. 이것 참, 칼 같네.”

    “산책은 캐시랑 이미 많이 했거든요.”

    “으응. 그래.”

    내가 웃으며 철벽을 치자 에드워드가 풀 죽은 얼굴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래도 선을 지킬 줄은 알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좀 더 막무가내로 굴었다면 캐서린과도 소원해졌으리라.

    “미안, 우리 오빠가 좀 부담스럽지?”

    캐서린이 귓속말로 사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에드워드의 막무가내 구애는 이미 이력이 나서 딱히 상관없었다.

    다만 하루빨리 에드워드에게도 좋은 짝이 나타나서 더는 내게 관심을 두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신경 쓸 거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은 후 에셀 공작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공작님이 뒤늦게 클럽을 맡게 돼서 힘드셨겠네요.”

    “그랬지.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혀 다들 정신이 없던 때 공작이 솔선수범했었거든.”

    “굉장히 신뢰하는 리더였던 모양이에요. 믿던 도끼라고 하는 걸 보면.”

    “뭐, 꽤 오래된 황실파였으니까. 사실 반역을 꾀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가문이라 당시엔 피해가 좀 컸지.”

    “그랬구나.”

    가볍게 호응하고 넘어가려는데 제로니스가 말했다.

    “대공자비는 이 일에 대해 들은 바가 전혀 없는 얼굴이군.”

    “네? 제가 알아야 하는 일이었나요?”

    “딱히 그래야 한다기보다는 그 일을 해결한 게 하델루스였으니 하는 말이었어.”

    “엑, 정말 몰라? ‘엠버의 난’은 수도에서 엄청난 파란을 일으킨 대형 사건이었는데. 게다가 그 일은 대공비 전하와도 관련…….”

    에드워드가 놀란 눈으로 덧붙이는 말에 제로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에드워드, 황족 앞에서 잘도 반역자 가문의 이름을 거론하네. 명줄이 짧아지고 싶은가 봐.”

    “그래서 나 죽일 거냐. 그럼 우리 캐시가 슬퍼할 텐데.”

    에드워드가 캐서린의 등 뒤로 몸을 숨기며 히죽 웃었다. 물론 숨긴다고 숨겨질 덩치가 아니라는 점에서 제로니스를 열 받게 하는 듯했다.

    “캐시도 언젠가 너를 포기할 때가 오지 않겠어?”

    “에이, 그럴 일은 없어. 우리 캐시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치, 캐시?”

    “…….”

    “어라, 캐시. 왜 웃기만 해. 응?”

    캐서린이 대답하지 않자 에드워드가 끈질기게 추궁했다. 남매가 실랑이하는 사이, 내가 제로니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희 가문과 관련이 제법 있었나 봐요. 방금 전 소공작의 말대로라면 어머님과도 연관 있는 거 같던데.”

    “고모님께도 들은 적 없나?”

    “전혀요.”

    내가 고개를 저어 부정하자 제로니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님께서 어깨를 다친 게 아마 그때였지.”

    “네?”

    나는 엘레나가 어깨를 다친 일이 엠버의 난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때라면 아직 엘레나가 대공비가 아니라 황녀일 때인 탓이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제로니스가 조금 소극적으로 말했다.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 하필 상대가 딜란으로 대공의 각성을 당겨서 고모님이 다쳤다는 것밖에는.”

    “그럼 그 어깨의 상처도…….”

    “하델루스의 각성은 몹시 위협적이니까.”

    이제 보니 데미안이 그 상처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기가 낸 상처라서 그랬던 거다.

    하델루스 가문의 고유 힘은 대단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대신 각성기가 몹시 치명적이었다.

    배타성이 강한 힘은 주변을 모두 공격해 버리고 마니까.

    게다가 딜란이라면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하는 각성 촉진제였다.

    부작용이 커서 원작에서 제로니스도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약물이기도 했다.

    그런 걸 먹고도 용케 살아 있는 걸 보면 데미안도 참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심각하면 죽음에까지 이르는 극약을 견디는 일은 보통 행운보다 더한 운이 필요한 일이었다.

    황제가 하델루스더러 운이 나쁜 듯 좋은 가문이라 평한 게 이제야 제대로 와닿았다.

    반역에 휘말린 운 나쁜 사내이면서 딜란을 극복한 몇 안 되는 행운아가 바로 데미안인 탓이었다.

    게다가 아키드도 운 나쁘게 미각성 발작을 일으켰으나 각성 후 누구보다 강해진 걸 보면 정말로 하델루스는 운발 가문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엠버의 난이라.’

    나는 납치당했던 당시 흑마법사들이 엠버 가문을 운운하던 것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겼다.

    그들이 엠버 가문더러 전 수장의 일가라고 한 게 번뜩 생각난 탓이었다.

    “혹시 엠버 가문이 흑마법사와 연루된 전력이 있나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 봤군.”

    그렇다면 엠버 가문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멸문당했다는 건데.

    나는 흑마법사들이 흘리듯 한 대화를 다시 곱씹었다.

    ‘그분을 보좌하는 그 흉터 있는 사내 말이야. 어쩐지 낯이 좀 익어. 안 그런가?’

    ‘자네도 느꼈나? 실은 나도 엠버 일가가 생각이 나서 조금 꺼림칙하네.’

    흉터 있는 사내가 제이드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나는 제로니스에게 정중히 물었다.

    “혹시 엠버 가주의 초상화는 남은 게 전혀 없을까요?”

    “아마 다 불태웠을 거라 이곳엔 없을 걸세.”

    하긴 반역 가문 수장의 초상화를 남겨 두었을 리 없었다. 마젠타에서도 떼어 낸 걸 어디 가서 찾을까.

    정말 닮았나,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그때 제로니스가 말했다.

    “아, 거기라면 있을 수도 있겠군.”

    “거기라뇨?”

    “대공이 엠버 성을 경매에서 사서 예술품으로 탈바꿈시켰거든.”

    “예술품이요?”

    “말이 예술품이지 거의 폐가에 가깝지. 내키는 대로 부숴서 ‘반역자의 집’이라고 떡하니 이름까지 지어 예술품이라 우겼으니까. 매해 철거하라는 민원에도 들은 척도 안 하고 말이야.”

    화풀이도 참 비싸게 하는 아버님이셨다.

    그래, 성격 파탄자1은 괜히 등극한 게 아니었지.

    나는 새삼 데미안의 괴짜 기질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 싶어 조금 짠하기도 했다.

    단순한 충성심에서 우러난 행동이라기보단 엘레나가 다쳐서 눈이 뒤집힌 거겠지.

    반역 가문의 성이라 해도 유구한 황실파 가문의 터였다.

    방치하는 것보다 활용하는 게 더 이득일 텐데 굳이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여전히 데미안에게 그날 일은 잊지 못할 상처임이 틀림없었다.

    “딱히 추천하지는 않지만 정 궁금하면 찾아가 보게. 하델루스의 소유이니 출입도 자유로울 테고. 관리도 없이 방치되어 있으니 개중에 초상화도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그때 에드워드와 실랑이를 마친 캐서린이 내 팔을 끌었다.

    “로에나, 이쪽으로 와 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캐서린을 따라 마젠타 펜트하우스 구경을 마저 잇기로 했다.

    조만간 데미안의 예술품을 구경하러 그곳에 가 봐야겠다, 마음먹으면서.

    이윽고 휴게 공간에 도착한 나와 에셀 남매, 제로니스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때였다.

    나는 최근에 캐서린이 크게 아팠다는 말에 놀라 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세상에, 캐시. 지금은 괜찮은 거야?”

    “으응. 보다시피.”

    캐서린이 맑게 웃으며 안심시키자 제로니스가 거들었다.

    “괜찮기는. 정말 크게 잘못되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병명도 모르고 있잖아.”

    얼굴에는 걱정기가 가득했다. 캐서린이 어색하게 웃기만 하자 에드워드가 말했다.

    “꼭 각성기처럼 열이 펄펄 끓기만 해서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때를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에드워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예전에 크게 아팠던 때와 비슷한 증상이었던 모양이다.

    몸이 좋지 않은 캐서린은 종종 이유 없이 아프곤 했는데, 그때마다 에셀 성은 비상이라고 했다.

    캐서린이 부러 씩씩하게 대꾸했다.

    “이제는 열도 안 나는걸. 각성기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오빠?”

    장난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좌중이 싸해졌다. 캐서린이 각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만 모인 자리라 더더욱 그랬다.

    제로니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캐서린의 손을 붙들었다.

    “난 그냥 네가 건강하기만 해도 좋아.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마워, 제로. 근데 나는 건강하기만 한 거 싫어.”

    캐서린이 평소답지 않게 단호히 대답하며 손을 물렸다. 아무래도 최근에 아팠던 일로 캐서린의 심리가 무척 불안한 것 같았다.

    “캐시, 나랑 잠깐 산책할까?”

    나는 아무래도 그녀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여 가볍게 제안했다.

    “그래. 우린 여기 있을 테니 다녀와, 캐시.”

    제로니스가 권하는 말에 캐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물던 곳과는 다소 떨어진 정원의 돌길을 따라 거닐기를 한참. 내내 조용하던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걸까?”

    “평소답지 않기는 했지.”

    “나는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 주는 내 몸이 싫어.”

    캐서린이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제로니스가 각성하고 나서 머리가 복잡해. 분명 기쁜 일인데, 동시에 속상해.”

    나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여긴 사람이 홀로 아픔을 극복하니 양가적인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래도 약해지는 시기는 반드시 온다. 그 시기로 인해 더더욱 단단해지는 거니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캐서린을 마주 보았다. 그녀가 의아히 쳐다보기에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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