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나탈리 후작이 잠자코 쳐다만 보자 제이드가 말을 이었다.
“회유가 안 된다면 협박하라고 가르치신 분도 어머니이십니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지금 그 말은 성녀라는 지위를 흔들어 제물을 움직여 보겠다는 뜻인가?”
“필요하다면요.”
제이드의 흔들림 없는 대꾸에 나탈리 후작이 노기를 흩트렸다.
그래. 아직 자신들에겐 제물이 있었다.
“제물이 사용한 금기가 무엇인지 속히 알아내렴. 그게 성녀의 지위를 흔드는 것보다 더 상대에게 위협이 되는 약점일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이걸 가져가거라.”
나탈리 후작이 인형 하나를 건넸다. 이를 본 제이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그저 제물과 조용히 할 얘기가 있어 데리고 가라는 거란다.”
나탈리 후작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제이드는 침묵했다.
눈을 붙여 그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려는 게 뻔한데도 항변할 수 없었다.
나탈리 후작은 의심이 많은 자였다. 양자로 인정받기까지도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여전히 갈 길이 먼 관계에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기뻐하실 만한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좋다. 더는 실망시키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나탈리 후작이 호갑투로 손을 찔러 피를 내었다. 검붉은 핏물과 함께 높은음자리표 문신이 반짝였다.
제이드가 그 문신을 가만히 응시하자 나탈리 후작이 말했다.
“받아 마셔라. 내가 만든 인형들을 부릴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의미이니.”
“감사합니다.”
제이드가 무릎걸음으로 가 뚝뚝 흐르는 피를 받아 마셨다.
몸속을 타고 흐르는 기이한 힘에 제이드의 뺨 위로 가온음자리표가 선명히 자리 잡았다가 사라졌다.
그를 후계자로 삼은 순간부터 그에게는 이미 막대한 양의 피를 제공한 상태였다.
애초에 재능이 있던 몸이라 여타 잔챙이 흑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장세를 보였다.
고작 몇 년 새에 가온음자리표까지 성장한 것을 보면 확실히 재능 있는 자였다.
마침 조직을 이끌 후계가 필요하던 차에 제이드와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자라면 자랄수록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얼굴이 나탈리 후작을 가끔 섬뜩하게 했지만.
이미 그들은 멸문된 지 오래였다. 시체도 모두 확인하였고.
나탈리 후작이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너를 후계자로 삼은 것을 후회하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 내 아들아.”
다정한 부름과는 사뭇 다른 냉랭함이 가득한 채였다.
제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 * *
오랜만에 찾은 인트라비아는 여전히 따뜻하고 북적거렸다. 나와 아키드는 1지구에 위치한 별장에 짐을 풀었다.
대공 부부는 남은 업무가 있어 함께 오지는 못했다. 아마도 데뷔탕트가 시작될 즈음 수도로 올라올 터였다.
내 각성기를 도와준 에이프릴 쌍둥이도 함께 수도로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아카데미 고등부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대학부에 입학해 수학 중인 탓이었다.
원래라면 아키드도 대학부에 입학했어야 했지만 내 체질상 각성을 마친 후에 수도로 오는 게 좋아 유보했었다.
수도보다도 북부가 나를 더욱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어엿한 각성자가 되었으니 내 몸 하나는 충분히 건사할 수 있었다.
아마도 데뷔탕트를 마치고 내년 즈음 함께 대학부에 입학해 수도의 사교계에 온전히 편입하게 될 터였다.
이것도 하델루스이기에 가능한 느긋한 처사였다. 대부분의 가문은 어릴 때부터 아카데미로 들어가 사교계에 하루빨리 입문하려 난리이니까.
사실 대학부라고 해도 수업이 많지 않고 거의 사교 모임이었다. 제로니스가 소속된 마젠타도 그중 하나였다.
벌써부터 카일은 마젠타로 오라고 성화였다. 물론 그곳에 에드워드가 있는 탓에 아키드는 눈에 불을 켜고 반대를 했었고.
나 역시 이미 마젠타가 아닌 블리드에 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블리드는 원작에서 아키드가 이끌던 사교 모임이었으니까.
명색이 하델루스의 며느리인데 라이벌 격인 마젠타 소속으로 갈 수는 없었다.
데미안과 엘레나처럼 원수지간도 아니고.
물론 캐서린이 있는 마젠타에 가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하델루스인 것을.
아키드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나탈리 후작 건을 보고하기 위해 입궁한 상태였다.
이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도 좋겠지만 이미 키나를 통해 쉐리를 만나기로 약속한 후였다.
나는 내가 가진 옷 중에 제일 평범한 드레스를 입고, 후줄근한 로브를 걸친 후 코끝까지 후드를 눌러쓴 채 마차에 올라탔다.
7지구에 도착해 마차를 돌려보낸 후, 골목의 평범한 주점으로 들어갔다.
“인어의 눈물 한 잔 주세요.”
내 주문에 주인이 냉큼 알아듣고 나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지하로 내려가자 그곳에 쉐리가 이미 와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귀족들은 다들 늦장만 부리고 지각이 일상인 줄 알았더니.”
쉐리가 기지개를 켜며 나를 맞았다. 여전히 불경하고 아니꼬운 투였지만 이전처럼 적대적인 느낌은 없었다.
“원래 모든 일에서 시간 엄수는 기본이지. 내가 언제 지각하는 걸 본 적이 있었나?”
“없지. 없으니까 신기해서 하는 말이잖아요.”
“반말을 할 거면 그냥 해. 애매한 존대로 살살 눈치 보지 말고.”
“우수 고객한테 반말을 할 수야 없지요.”
“정확히는 채권자겠죠, 실드의 쉐리 씨.”
채권자라는 말에 쉐리가 인상을 팍 쓰며 투덜거렸다.
“내가 아무래도 악덕 사채업자에게 걸린 게 분명해. 어떻게 갚아도, 갚아도 줄지를 않아?”
“이제 막 자리 잡아서 갚아 나가기 시작했으면서 엄살은. 누가 그쪽을 그렇게 키워줬는데, 자꾸 볼멘소리하면 섭섭해서 이자를 올리는 수가 있어?”
“내가 이 빚을 다 갚는 날엔 아주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고 말 거예요. 기대해도 좋아요, 대공자비님.”
“사랑 고백으로 들을게.”
싱긋 웃으며 맞받아치자 쉐리가 질색을 하며 몸서리를 쳤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안 물어봐? 내가 왜 수금을 핑계로 직접 찾아왔는지.”
“독촉을 참 적극적으로 하는 유난스러운 귀족인가 보다 했죠.”
“의뢰를 하려고 왔어. 남은 빚을 갚는 데도 꽤 도움이 될 거야.”
의뢰라는 말에 쉐리가 눈을 끔벅였다.
이미 하델루스라는 좋은 자본이 있는 가문이 일개 거리의 길드에게 요청할 의뢰가 무엇이 있냐는 눈치였다.
나는 상체를 기울여 깍지를 낀 채 턱을 괴고 말했다.
“아마 너도 흥미를 가질 의뢰일 거야.”
“딱히 귀족들의 일엔 영 흥미가 없는데요. 분명 고리타분한…….”
“제이드를 찾았어.”
제이드라는 말에 쉐리가 눈을 깜빡이다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보아하니 이미 나탈리 후작의 양아들로 입적한 걸 들은 모양이었다.
“이보세요, 대공자비님. 저 쉐리예요. 수도의 일은 대공자비님보다 더 빠삭하답니다.”
“그럼 나탈리 가문이 흑마법사였다는 것도 알겠네.”
“그럼요. 그런 일쯤은…… 네엑?!”
“어라라? 쉐리도 모르는 게 있네. 이제 좀 관심이 생겼으려나.”
내가 놀리듯 중얼거리자 쉐리가 바짝 다가와 물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사실이지. 내가 수도로 오기 전에 납치까지 당하면서 얻은 정보인데.”
“납치를 당했다고요?”
쉐리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어리바리하게 굴었다.
설마 흑마법사가 간도 크게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들도 내가 정령사라는 걸 몰랐다면 굳이 위험하게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정령사라는 것만 빼고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내막을 전해 들은 쉐리는 다소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대공자비님 말씀은, 제이드가 의도를 가지고 아키드를 찾아가 가족을 공격했다는 거네요.”
뭔가 열 받은 지점이 묘하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나는 쉐리의 분노에 기름을 붓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응. 그리고 13지구에 대해서 물으니 이미 버리고 온 인연이니 아는 척도 하지 말라더라. 아주 살벌하던데?”
없는 말도 아니었다. 이것보다 유하게 말했을 뿐 그 말뜻은 똑같았으니까.
쉐리를 도발하는 데에 이만한 것도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의도한 발언이었다.
제이드의 이야기를 들은 쉐리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말했다.
“비겁한 새끼. 감히 우리를 버린 것도 모자라 뒤통수까지 갈겨?”
뒤이어 분통을 터트리며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당장이라도 제이드를 찾아내 요절을 낼 기세였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쉐리가 얼음물을 한 잔 더 가져오라 지시를 내린 때였다.
내가 쉐리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같이 복수해 보지 않을래?”
“복수요? 저는 그렇다 치고, 대공자비님은 뭘 복수하려는 건데요?”
“그야 당연히 내 남자를 배신한 죄지.”
나를 건드리는 건 때와 상황을 고려해 잠시 참을 수는 있어도, 내 새끼…… 아니, 이젠 내 남자가 된 내 새끼를 건드리는 건 때고 상황이고 뭐고 절대 못 참는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악랄하게 복수해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쉐리는 ‘내 남자’ 발언에 질색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피식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랑 손잡으면 절대 질 일은 없어.”
덕후는 강한 법이거든.
특히 집요한 덕후는 아무도 못 이기지.